2026년 10월 25일 (일)
(녹) 연중 제30주일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자유게시판

<詩人 김영랑의 생애와 모란꽃에 얽힌 사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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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희 [edohyy] 쪽지 캡슐

2023-05-19 ㅣ No.228061

<詩人 김영랑의 문학생애와 

5월의 모란꽃에 얽힌 사랑 이야기>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金永郞(1903~1950) 시인, 본명은 윤식(允植).

시인이 아닌 음악가가 되기를 꿈꿨다고 합니다. 하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영문학을 공부했고, 자신이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을 음악으로 달래며 살았다고 하네요. 그의 서정적인 시가 유난히 음악성을 띄는 이유도 짐작이 가네요. 어찌보면 지금의 아티스트들이 이 

시대엔 시인들이지 않았을까 싶어요.


영랑은 모란이 필 무렵에 맞춰 해마다 자신의 집 사랑채에서 전국의 문인과 문인 지망생을 초청해 시 창작 대회를 열었다고 합니다. 


어느 해 봄에도 대회를 열었는데, 김영랑도 마당에 가득 피어 있는 모란을 보며 시를 한 편 썼습니다. 하지만 시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쓰고 난 종이를 뭉개 버리려 했지요.


그런데 때마침 곁에 있는 춘원 이광수가 이를 보고는 그 종이를 뺏어 읽었다고 합니다. 詩를 본 이광수는 깜짝 놀랄 대작(大作)이라고 생각해서 

그 자리에서 크게 낭송했고, 그 作品은 청중의 많은 박수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 詩가 바로 “모란이 피기까지는“이었는데, 하마터면 文學史에 남을 아름다운 詩 한편이 그대로 묻힐 뻔했던 것이지요


또한 그의 詩세계는 상실과 소멸, 죽음의식 등이 주류를 이 루는데 이러한 양상들은 유미주의적 심상으로 귀결되었습니다. 


글옮긴이~이도희(아오스딩) 拜.

添言~본글을 가톨릭 자유게시판/twitter/facebook에 게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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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신문(2023년5월19일자)

[고두현 아침 시편 문학 칼럼]에서,


김영랑(1903~1950) : 

永郞은 아호(雅號)임/본명 金允植; 고향은 전남 당진군 탑동/강진읍 남성리). 詩人 본명은 윤식(允植)은.


최승희를 사랑해 목을 맸던 나무도…

시인 김영랑(1903~1950)의 생가가 있는 전남 강진. 거리 곳곳에 그의 시구절을 딴 모란공원, 모란상회, 모란미용실 등이 보입니다. 


영랑사진관과 영랑다방, 영랑화랑도 있습니다. 컴퓨터가게 간판에도 詩人의 이름이 붙어 있군요.


군청 옆길로 걸어 올라가니 고즈넉한 초가집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의 옛집이지요. 안채에 딸린 마당의 장독대도 정겨운 풍경입니다. 


해마다 봄이면 마당 한구석에 모란이 피어나는 곳. 진한 모란 향기가 그의 시비를 감싸는 모습이 그림 같습니다.


뒷마루에 걸터앉아 그의 시집을 펼칩니다. 가는 길에 읽다가 접어두었던 ‘모란이 피기까지는’ 이 눈에 먼저 들어옵니다. 꽃이 피기까지의 기다림과 

낙화한 뒤의 절망감을 반복적인 리듬으로 노래한 詩죠.


기다림이 무산된 순간의 절망을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뚝뚝 떨어지는 모란에 빗댄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삼백예순날 하냥  섭섭해’ 울면서 그토록 기다린 ‘찬란한 슬픔의 봄’은 또 무슨 의미일까요.


그의 ‘찬란한 슬픔’은 젊은 날 이루지 못한 사랑의 비극에서 비롯됐습니다. 상대는 훗날 한국 최고 춤꾼으로 이름을 날린 무용가 "최승희"이지요.


최승희는 작가 최승일의 여동생입니다. 영랑은 14세에 일찍 결혼했으나 1년 만에 상처하고, 서울 휘문의숙(徽文義塾, 지금의 휘문고)에 다니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거기에서 최승일을 사귀었지요. 관동대지진 여파로 유학 생활을 접고 귀국한 뒤 서울 나들이 때마다 최승일의 집에 묵으면서 자연스럽게 최승희를 만났습니다.


최승희가 숙명여학교 2학년이었으니, 14세밖에 안 됐지만 뛰어난 미모에 내면도 꽤 성숙했던 모양입니다. 당시 영랑은 22세였죠. 오빠 친구인 영랑의 詩的인 감수성에 최승희의 마음도 흔들렸습니다. 둘 사이는 마침내 결혼을 약속할 정도까지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두 집안은 이들의 사랑을 허락하지 않았죠. 영랑 집안에서는 “그런 경성의 신여성은 우리 가문에 필요 없다”며 손사래를 쳤고, 최승희 집안에서는 영랑의 지방색을 들어 반대했습니다.


1년간의 줄다리기 끝에 상심한 영랑은 뒤란 대나무숲 동백나무에 목을 매고 자살을 시도하다가 발각됐습니다. 영랑 생가에 장독대 쪽으로 가지를 길게 늘어뜨린 나무가 바로 그 나무 입니다.



출처; 한국경제신문; 2023년5월19일자.

{고두현 아침 시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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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옮긴이~초승달 이도희(아오스딩) 拜.

添言~본글을 가톨릭 자유게시판/twitter/facebook에 게재됨.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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