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3일 (금)
(홍) 주님 수난 성금요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공지사항 2026년 전국 교구 교구장 부활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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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goodnews] 쪽지 캡슐

10:33 ㅣ No.2972

2026년 전국 교구 교구장 부활 메시지

 

서울대교구

광주대교구

대구대교구

대전교구

마산교구

부산교구

수원교구

안동교구

원주교구

의정부교구

인천교구

전주교구

제주교구

청주교구

춘천교구

군종교구

 

 

 

 

[서울대교구]

2026년 부활 메시지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마르 16,7)

 

 

    주님의 부활을 맞이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사슬을 끊으시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 주셨습니다.”(2티모 1,10) 이 기쁜 소식이 온 세상에 울려 퍼지는 이때,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전쟁과 긴장 속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기억하며, 불안 속에 살아가는 이들, 그리고 양심에 따라 살아가려는 모든 이에게도 주님의 위로와 희망이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전합니다. 주간 첫날 새벽, 무덤을 찾은 여인들은 예수님의 몸을 찾지 못하고 당황합니다. 그러나 그때 들려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신앙의 중심을 이루는 기쁜 소식입니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루카 24,5-6)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빈 무덤 앞에 서 있는 이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상처 입은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전쟁과 갈등은 계속되고, 많은 이들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현실은 우리에게 불안과 혼란을 안겨 줍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빈 무덤은 절망의 자리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을 통해 죽음이 끝이 아니며, 하느님의 생명이 어떤 어둠도 넘어선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이 희망은 단순한 위로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부활의 희망 안에서 ‘생명을 살리는 삶’으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이 생명은 우리의 관계 안에서 드러납니다.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며 다시 손을 내미는 자리에서 드러나는 생명입니다. 그리고 이 생명은 고통받고 소외된 이들을 향하며, 우리는 그들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납니다. 교황 레오 14세께서는 사도적 권고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Dilexi te)〉에서, 가난한 이들의 상처 입은 얼굴과 무고한 이들의 고통 속에서 그리스도 자신의 고통을 보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DT 9)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받는 모든 이를 기억하며 기도하고 연대해야 합니다. 특별히 전쟁과 폭력 속에서 생명의 위협을 겪는 이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부르심은 우리의 일상 안에서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가까이 있는 이들의 아픔에 응답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돕는 작은 실천 안에서 우리의 신앙은 살아 움직이며, 그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심을 드러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돌보는 책임으로도 이어집니다. 우리는 절제와 배려를 통해 창조를 돌보고 생명을 존중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나아가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안에서도 우리는 인간의 존엄을 중심에 두어야 합니다. 인공지능을 비롯한 모든 기술은 인간을 소외시키는 도구가 아니라 서로를 연결하고 생명을 살리는 데 봉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자리에서 생명을 지키고 살리는 길을 선택할 때,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과 더욱 깊이 함께하게 됩니다.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우리 삶에는 여전히 두려움과 불안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더 많이 가지려는 마음과 잃을지 모른다는 걱정 속에서 지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천사의 말은 오늘 우리에게도 들려옵니다.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마르 16,7)
    그 ‘거기’는 우리가 살아가는 바로 이 자리입니다. 갈등과 분열을 넘어 화해를 선택하는 자리, 무관심과 혐오를 넘어 타인의 아픔에 마음을 여는 자리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각자의 양심에 따라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생명을 살리는 선택으로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보다 먼저 그 길을 걸어가시며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는 부활의 증인으로서 절망이 아니라 희망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두려움에 머물지 않고 다시 일어나, 우리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의 길을 따라 걸어가야 합니다. 다가오는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는 우리에게 이 부활의 기쁨을 새롭게 체험하는 은총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2026년 부활 시기를 맞아, 참된 생명의 희망을 마음에 새기고 일상 안에서 그 기쁨을 누리시기를 진심으로 빕니다. 우리가 만나는 이들과 그 기쁨을 나누며, 은총 안에서 살아가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러한 삶은 우리를 새롭게 하고 서로를 향해 나아가게 합니다. 우리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고 생명의 증인으로 살아갑시다.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천주교 서울대교구장·평양교구장 서리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광주대교구]

2026년 교구장 부활메시지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마태 28,10)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오늘 복음은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무덤을 찾은 여인들의 발걸음에서 시작됩니다. 그들의 가슴에는 스승을 잃은 슬픔과 세상의 불의에 대한 절망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 말씀에는 슬픔에서 기쁨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변하는 ‘위대한 역전’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이 마주한 것은 죽음의 흔적이 아니라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태 28,6)라는 희망의 선포였습니다.

    1. 무덤의 돌을 굴려내는 용기
    여인들이 무덤에 갔을 때, 그들의 마음은 커다란 돌덩이로 막힌 것처럼 무거웠을 것입니다. 그들은 무덤을 막은 그 큰 돌을 누가 치워줄까 고민했습니다. 그때 천사가 무덤의 돌을 옆으로 굴려내자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은 두려워 떨며 까무러쳤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진심으로 찾았던 여인들에게 천사는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28,5)라고 위로합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나 혼자서는 도저히 치우기 어려운 ‘마음의 돌’이 있습니다. 본의 아니게 오해받았을 때의 노여움, 터무니없는 처우를 받았을 때의 황당함, 급변하는 상황에서의 경제적인 불안, 가족이기 때문에 겪을 수밖에 없는 갈등 등과 같은 개인적인 것들이 있습니다. 또한 힘의 논리만 남은 국가 위기 앞에서도 자신의 이익만을 좇는 일부 지도자들의 이기심, 경제적 양극화로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을 벗어나기 어려운 사람들의 무력감, 가짜뉴스에 매몰되어 진실을 외면한 채 일방적인 주장으로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어리석음 등과 같은 사회적인 돌들도 있습니다. 부활은 이러한 돌들을 치우고 어둠 속에서 빛을 향하여 걸어 나오는 용기입니다. 우리 시대의 상실과 아픔을 직시하고 그 곁을 굳건히 지키면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함께 하는 것이 바로 무덤의 돌을 굴려내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를 짓누르는 걱정들을 주님 무덤 앞에 내려놓읍시다. 주님께서 “두려워 말라”(마태 28,10 참조)라며 우리 손을 기꺼이 잡아 주실 것입니다. 

    2. “말씀하신 대로” 주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
    오늘 복음에서 천사는 아주 중요한 말을 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태 28,6) 예수님은 빈말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라고 하신 약속,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마태 5,4 참조)라고 하신 약속을 부활을 통해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삶이 막막할 때 세상의 화려한 말들에 귀 기울이기보다, 우리 곁에 놓인 성경 말씀을 펼쳐보십시오. 주님은 당신 삶으로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실천하셨습니다. 절망하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을, 슬퍼하는 이들에게는 위로를, 굶주리는 이들에게는 나눔을,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류에게는 당신의 부활로 말씀이 이루어짐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주님은 우리에게 변치않는 희망으로 삶의 용기를 주시고 모든 방식으로 우리 곁에 살아계십니다. 

    3. 가장 낮은 곳, 갈릴래아로 가라는 초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여인들에게 건네신 첫 마디는 “평안하냐?”(마태 28,9)였고 이어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마태 28,10 참조)라고 하셨습니다. 왜 하필 갈릴래아입니까? 갈릴래아는 제자들이 그물을 던지며 물고기를 잡던 삶의 터전이자, 하루하루 땀 흘려 일하는 평범한 이들과 아픈 이들이 모여 살던 소박한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화려한 예루살렘의 권좌가 아니라, 고통받는 이들의 눈물 섞인 삶의 현장으로 먼저 가 계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갈릴래아는 어디일까요? 국정은 점차 안정을 찾아가고 있지만 민생의 삶은 여전히 어렵기만 합니다. 경제적 어려움은 단순히 돈 문제를 넘어 사람들을 심적으로도 여유가 없게 만듭니다. 작은 말에도 쉬이 상처받고 주변보다는 자신을 챙기는데 급급하게 됩니다. 이렇게 어려울 때일수록 마음 한 자락 내어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의 손을 잡아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 돌봄이 필요한 어르신과 장애인, 취업 준비로 지쳐가는 자녀들, 은퇴 이후에도 구직활동을 할 수밖에 없는 가장들, 억울한 일을 당해도 제대로 하소연할 수조차 없는 이주노동자들, 그리고 사회적 참사로 눈물 흘리는 이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할 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거창한 도움이 아니라 따뜻한 말 한마디, 재능 나눔, 이웃을 향한 작은 관심 등이 바로 우리가 갈릴래아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방법입니다. 

    4. 부활은 “함께 걷는 여정”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부활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안부를 물으며 챙길 때, 주님은 우리 가운데 현존하십니다. 삶이 그리 녹록지 않은 것이 현실이지만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이로서 세상의 두려움을 떨치고 일어납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보다 앞서 갈릴래아로 가고 계십니다.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더 낮은 곳으로 더 소외된 곳으로 함께 걸어갑시다. 그 여정 끝에 살아계신 주님께서 우리를 환한 미소로 맞아주실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 함께 기뻐합시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2026년 4월 5일 주님부활대축일 
천주교 광주대교구장 옥현진 시몬 대주교

 

 

 

[대구대교구]

2026년 교구장 부활 담화문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묵시 21,5)

 

 

사랑하는 우리 교구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빛으로 어둠을 가르시고, 생명으로 죽음을 넘어오신 주님의 부활을 온 마음으로 기뻐하며 축하합니다. 오늘 교회가 노래하는 이 기쁨은 단지 한 사람이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났다는 경이로움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부활은 하느님께서 오래도록 약속하신 마지막 시대의 구원이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낸 사건입니다. 길고도 지난했던 인간의 역사, 그 안에 쌓여 온 허물과 결핍, 상처와 눈물, 죄와 단절의 시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 가득한 응답이 부활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 역사의 가장 어두운 자리까지 내려가셨고,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부활은 하느님의 사랑이 마침내 인간의 흠결과 실패보다 더 크고 깊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렇기에 부활은 역사 안에서 서로를 아프게 했던 수많은 갈등과 대립, 상처와 슬픔이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회복될 수 있다는 희망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상처 없는 몸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못자국이 남아 있는 몸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 상처는 더 이상 죽음의 흔적 아니라 사랑이 끝내 패배하지 않았다는 생명의 표지가 되었습니다. 우리 삶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치유되지 못한 상처가 있고, 아직 화해하지 못한 기억이 있으며, 오래된 오해와 미움이 남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부활은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외면하지 않으시며, 당신의 사랑 안에서 다시 시작하게 하신다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우리 사회는 깊은 대립의 시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계엄 사태 이후 우리 사회는 더욱 날카롭게 갈라졌고, 극단의 언어는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더 멀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제 곧 다가올 6월의 지방선거는 이러한 현실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부활을 믿는 사람으로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스스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활 신앙은 편을 갈라 적개심을 키우는 비겁함이 아니라, 진실 안에서 화해를 모색하고 정의 위에서 공동선을 세우려는 용기를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갈등의 시대 속에서 화해와 일치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화해와 일치는 진실을 희생하여 얻는 값싼 평화여서는 안됩니다. 정의 없는 화해는 오래가지 못하고, 진실을 외면한 일치는 결국 더 큰 균열을 남깁니다. 우리는 극단적 분열을 부추기는 왜곡된 정보와 거짓의 언어에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뜨거운 열심만으로 복음의 정신을 흐리게 하고, 교회의 정통 신앙을 자기 확신과 만족의 도구로 바꾸는 그릇된 신심들에도 단호히 맞서야 합니다. 신앙은 누군가를 정죄하는 무기가 아니라, 진리 안에서 자신을 먼저 성찰하고 이웃을 살리는 길이어야 합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삶과 무관한 사변적 교리로 남아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사랑을 지키기 위하여 불의에 침묵하지 않을 때, 진실을 외면하지 않을 때, 상처 입은 이들의 곁에 머물 때, 부활은 오늘도 살아 움직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이 세상 안에서 숨쉬게 하는 일은 결국 우리의 몫이기도 합니다. 정의를 향한 작은 결단, 진실을 붙드는 양심, 서로를 사람으로 존중하려는 인내, 그것이야말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오늘 우리 가운데 다시 걸으시는 길이 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부활을 축하한다는 것은 어쩌면 이 시대와 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다시 배우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슬픔이 있는 곳에 위로가, 거짓이 흔드는 곳에 진실이, 증오가 자라는 곳에 사랑과 정의가 더 깊이 스며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 놓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가정에서, 본당에서, 일터와 사회 안에서, 예수님의 부활이 하나의 말이 아니라 살아 있는 현실이 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굴곡진 삶의 자리마다 주님의 생명이 번져 가고, 사랑과 정의가 필요한 곳마다 우리 교회의 발걸음이 더욱 담대하고 따뜻하게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러분의 가정과 공동체에 참된 평화와 희망을 가득 내려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2026년 주님 부활 대축일에
대구대교구장 조환길 타대오 대주교

 

 

 

[대전교구]

2026년 주님 부활 대축일 메시지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에페 2,14)

 

 

    + 찬미 예수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십자가상 죽음으로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와 다시 화해시켜 주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을 찬미합시다. 알렐루야!
    유다 지도자들의 모함으로 예수님께서 로마 병사들에게 붙들려 가실 때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습니다. 베드로 사도만이 예수님 뒤를 따라갔지만, 밤새 세 차례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증언을 듣고 제자들은 다시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또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처음 건네신 말씀이 평화의 인사입니다. 요한복음 20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세 차례 축복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에페 2,14)라고 선언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이루어진 구원을 평화라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이 가르치는 평화는 태초에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고 한 상태를 잘 보존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하느님의 숨을 받아 하느님을 닮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느님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죄와 연루되지 않고, 하느님을 아버지로 하는 한 형제로 서로 사랑하며 살면서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세상을 잘 돌보는 것이 평화입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 스스로 하느님이 되고 싶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른다는 마음을 빼앗긴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죄의 뿌리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느님을 떠난 인간에게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 시작하신 구원경륜은 죽음이 지배하는 죄의 역사를 다시 하느님 품 안으로 회복시키는 역사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의 긴 역사는 인간의 힘으로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구원의 메시아를 약속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아와 그분이 맺어주실 새 계약을 기다렸습니다. 때가 차자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오시어, 이제 그분이 가시는 길은 우리도 갈 수 있게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우리의 죄를 당신 몸에 지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죄값을 치르셨습니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죄의 용서와 영원한 생명의 구원이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서 태초에 원하셨던 하느님 닮은 인간의 모습을 회복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일은 예수님이 오시기 수백 년 전 이사야 예언자가 이미 알려준 소식입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 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이사 53,4-6)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평화에 이르셨고, 그 평화를 사도들에게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사도들을 통하여 주님의 평화를 받았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미하며,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평화의 은총을 받으신 여러분 모두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이제 우리는 평화의 사도입니다. 평화는 하느님과의 화해이며, 이웃 형제자매들과의 화해는 물론 모든 피조물과의 화해를 의미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 1,20)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의 자비를 믿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을 희생하여 우리와 화해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 한 아버지의 자녀들입니다. 시기와 질투 그리고 싸움과 전쟁은 화해와 반대되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이들의 삶이 아닙니다. 기뻐하는 이와 함께 기뻐해 주시고, 슬퍼하는 이웃과 함께 울어 주십시오. 지금도 국제사회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혹은 권력자가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하여 무모한 전쟁을 일으켜 평범한 시민 특히 어린아이들까지 희생시키면서도 아무런 반성의 태도를 보이지 않습니다. 이번 춘계주교회의에서도 이런 상황에 아픈 마음으로 동참하면서, 신자 여러분에게 단식과 기도로 세상의 평화를 위해 함께 해주실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지구 생태계 역시 우리 인간과 화해를 기다리며 신음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며, 당신을 닮은 우리에게 모든 피조물을 맡기셨습니다. 생태계 파괴의 주된 원인은, 보다 편리한 삶에 대한 욕망과 그에 상응하는 돈벌이입니다. 우리는 조금 천천히 조금 불편하게 살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삶을 위해서도 유익합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피조물을 돌보아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고 하신 모습을 보존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의 지극한 자비로 구원받은 부활의 증인이며 평화의 사도입니다. 가난한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며 부활의 기쁨을 전하고 진정한 형제애로 평화를 이루십시오. 지구 생태계도 하느님 자녀들의 자비로운 손길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주님 부활을 온 마음으로 축하드립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2026년 4월 5일 예수님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대전교구장 주교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마산교구]

 

2026년 교구장 부활 담화문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루카 24,15)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하기를 기도드립니다.

우리는 지금 모든 것이 쉽지 않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그로 인한 고통, 우리 사회의 심각한 저출산과 만연해 있는 사회적 고립 현상은마치 커다란 돌처럼 우리의 희망을 가로막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래서 때로 이런 절망감을 토로하게 됩니다. “이제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 하지만 바로 그때, 부활하신 주님께서우리 곁에 다가오십니다.

희망이 없어도 희망합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도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이 끝났다는 체념 속에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예수님께서 먼저 다가오시어 그들과 함께 걸어주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신앙의 선조 아브라함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 믿었습니다”(로마 4,18). 아브라함 역시 희망 없는 날들을 살아가고 있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그와 함께 계셨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따라서 희망은 내가 할 수 있는 가능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희망을 미래에서 찾으며 “먼 훗날, 언젠가는 괜찮아지겠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과거는 이미 없고, 미래는 아직 없으며, 현재만이 존재합니다”(『고백록』 11, 14). 그러므로 희망은 먼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 안에서 시작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현재 일상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우리가 지쳐 있거나 길을 잃었다고 느낄 때, 주님께서는 조용히 다가오셔서 물으십니다. “무슨 일이냐?” 그리고 우리와 함께 걸어가 주십니다.

희망, 기술이 아니라 하느님
오늘날 우리는 기술이 우리 삶을 대신하려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마치 우리의 선택을 대신하고, 미래를 예측하며, 불안을 줄여줄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기술 문명 덕분에 이동 능력과 생산 능력, 정보 처리 능력이 향상되어 우리는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빠르게 처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억과 계산, 분석 능력이 크게 향상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희망은 기술에 있지 않습니다. 교황청 문화교육부 문헌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행위 주체성을 잃을 때, 더 나은 공동의 미래를 향한 희망도 함께 사라집니다”(『인공지능 시대에 인간 주체성 회복』 한글본 출간 예정). 부활은 바로 이러한 희망을 다시 일으키는 사건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통해 인간의 고귀함을 일깨워주시고, 이 혼돈의 시대에 나아가야 할 바를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부활은 우리가날로 발전하는 기술에 휘둘리거나 잠식당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통해 다른 이들 특별히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는 책임 있는 주체성을 지닌 사람이 되도록 변화시켜 줍니다.

새로운 가난 속의 희망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오늘날 우리 곁의 ‘새로운 가난’ 안에서 당신의 얼굴을 드러내고 계십니다(『내가 너를 사랑하였다』 서문, 참조). 가난한 이들과의 만남은 우리 자신을 변화시킬 수있는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길입니다. 바로 그곳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과의 만남, 내적인 친밀함 안에서만 우리의 참된 인간성은 회복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자기 삶의 터전을 떠나온 이주민들과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 상처 입은 가정과고립감을 겪고 있는 노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회에서 내쳐지고 버려진 이들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희망은 혼자서 붙드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타인에게 먼저 손 내밀어 그들의 지친 손을 잡아줄 때, 우리는 단지 선행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살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은총의 순례
주님께서 빵을 나누실 때, 엠마오의 제자들은 비로소 주님을 알아보고 곧바로 길을 돌이켰습니다. 우리도 말씀과 성찬 안에서 날마다 주님을 만납니다. 희망은 지금의 이 만남에서 시작되는 은총의 순례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지난 60년 동안 우리 교구를 이끌어오신 하느님의 손길은 이제 다음 세대인 청소년과청년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2027년에 있을 세계청년대회(WYD)를 준비하는 우리는 이 대회를 통해 청년들과 함께 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미래의 세대들은 부활의 기쁨을 안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희망의 순례자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올해 교구 설정 60주년과 교구청 신청사 봉헌이라는 뜻깊은 기쁨과 은총의 시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교회 담장을 넘어, 우리 지역의 믿지 않는 이들과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에게까지 전해져야 할 보편적인 희망의 사건입니다. 교구청사는 우리를세상과 단절시키는 성벽이 아니라, 누구나 찾아와 쉬고 영혼의 생기를 되찾을 수 있는 ‘희망의 등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구민 모두가 각자 삶의 자리에서 부활의 기쁨을 살아가는 순례자가 되어, 우리 지역 사회 곳곳에 평화와 생명의 향기를 전합시다.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평화의 모후님!
복자 신석복 마르코, 구한선 타대오, 정찬문 안토니오,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박대식 빅토리노, 윤봉문 요셉!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2026년 4월 5일
주님 부활 대축일
교구장 이성효 리노 주교

 

   

 

[부산교구]

2026년 부활 메시지

 

 

찬미 예수님.

알렐루야.

부산교구 형제자매 여러분,
2026년 부활 대축일이 다가왔습니다. 우리에게는 가장 큰 축제이고 중요한 부활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분을 따라 살고, 부활할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 여러 가지로 참 어렵습니다. 각국에서의 많은 전쟁들, 경제적인 또 정치적인 어려움 이런 것이 많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그 부활이 무엇인지, 또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고 있는지,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더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통 없이 죽음 없이 부활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번 부활에는 우리가 더 깊이 묵상하고 부활의 은혜를 더 많이 받아서 모든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내고 참으로 기쁜 부활절이 되기를 바라고 기도하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기쁜 부활 대축일 지내십시오. 축하합니다. 알렐루야.

부산교구장 손삼석 주교

 

 

 

[수원교구]

2026년 주님 부활 대축일 메시지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마태 28,6)

 

 

† 경청과 식별로 동행하는 수원교구!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

사랑하는 수원교구 형제자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1. 부활, 우리의 희망
주간 첫날 새벽,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천사는 그들에게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태 28,6)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뒤이어 베드로와 다른 제자도 비어 있는 예수님의 무덤을 확인하게 됩니다(요한 20,3-8 참조).
‘빈 무덤’을 목격했을 때 제자들은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요한 20,9 참조). 하지만 비어 있는 무덤을 시작으로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으로 말미암았던 슬픔과 좌절은 부활을 통해 기쁨과 희망으로 바뀌고, 제자들은 새로운 삶을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열어 준 신비로운 사건입니다.

2. 죄와 죽음의 세력, 고통 중에 있는 이들
세상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여전히 죄와 죽음의 세력이 작용하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는 종교와 경제, 정치적인 이유로 나라 간 갈등과 전쟁이 끊이지 않고, 배타적 자국 우선주의의 확산으로 말미암아 세계 평화가 위협받고 있습니다. 한편, 급속히 발전하는 인공지능과 첨단 기술은 인류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지만, 동시에 인간 존엄을 해칠 우려가 제기되며 아울러 신성한 노동의 의미를 왜곡시킬 걱정과 불안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또한, 공동의 집인 지구를 병들게 하는 심각한 생태 환경 문제와 기후변화 현상은 우리와 후손들의 암울한 앞날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가장 상처를 많이 입고 힘들어하는 이들은 가난하고, 힘없고, 소외된 이들입니다.
레오 14세 교황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을 향한 사랑은 하느님의 마음에 충실한 교회의 복음적 특징입니다”(레오 14세,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 103항).

이러한 고통의 현실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수난과 십자가의 길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결코 절망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시어 고통과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님을 보여 주셨고, 우리에게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3. 부활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은 부활 신앙을 믿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며 복음의 정신을 널리 알려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눈에 보이는 현실만 바라보고 그것만을 목적으로 살고 있지 않습니다. 부활 신앙을 고백하는 우리는 생명을 경시하는 문화에 맞서 생명의 존엄을 수호하며 건전한 생명 문화를 건설해야 합니다. 또한, 인간을 수단화하는 기술과 경제 논리 속에서도 인간의 고유한 가치를 지키는 정의와 참 진리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현대사회의 급격한 발전과 변화 속에서 소외된 이들, 특수 계층을 우선하는 구조적 경제의 틀로 인해 주변부로 밀려난 이들, 인공지능과 기술 발전을 숭상하는 능률 제일주의로 인해 일자리를 잃은 이들, 기존의 정의롭지 않은 사회 환경에 짓눌려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가는 젊은 세대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희망과 생명의 길을 찾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 살아가며 죽음을 넘어 생명을 지향하고, 절망을 넘어 희망을 증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4. 그리스도의 성심 안에서 부활의 증인으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회칙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Dilexit Nos)에서 “생수의 샘인 그리스도의 옆구리 상처는 구세주의 부활하신 몸에서 계속 열려 있습니다. … 그 안에서 우리는 … 당신 자신을 남김없이 바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묵상합니다.”(151항)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내어주신 그 옆구리에서 토마스 사도는 자비롭고 사랑 가득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느끼며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요한 20,27-28 참조).

십자가상 죽음을 통해 성취된 무한하신 예수님의 사랑의 대가는 초자연적 부활로 이어져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우리는 그 지극하신 예수님 성심 안에서 참된 부활의 기쁨을 발견합니다. 우리도 죽음의 세력에 굴복하지 말고, 세상에 참 빛과 희망을 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부활의 삶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시노드 이행 단계를 살아가며 ‘2027 세계청년대회’를 준비하는 수원교구가 부활 신앙 안에서 더욱 굳건히 하나 되어 주님을 널리 전하게 되기를 빕니다.
경청과 식별의 여정 안에서, 우리 모두가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으로 거듭나기를 기도합니다.

수원교구의 주보이신 평화의 모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2026년 4월 5일
주님 부활 대축일에
수원교구장 이용훈 마티아 주교

 

 

 

[안동교구]

2026년 부활 메시지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주님 부활 대축일을 경축하며, 가장 먼저 교황 레오 14세께서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를 선물로 우리에게 주시라고 청하신 그 기도를 간절한 마음으로 함께 바치고 싶습니다.

    “제자들에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인사를 건네신 주님, 저희에게도 당신의 평화를 선물하여 주소서. 역사속에서 당신의 평화를 실현할 힘을 주소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당신 평화의 사도로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말씀으로 평화의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릅니다.

바오로 사도는 부활하신 그분께서 친히 평화의 선물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다고 선언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또 그 모든 계명과 조문과 함께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에페 2,14-18)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선물로 약속하셨습니다. 그 평화는 여러 지체가 한 몸을 이루는 신비체인 교회 안에서 실현됩니다. 바오로 사도에 따르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고 한 몸을 이루는 지체들의 관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몸은 한 지체가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 지체는 많지만 몸은 하나입니다. … 하느님께서는 모자란 지체에 더 큰 영예를 주시는 방식으로 사람 몸을 짜 맞추 셨습니다. 그래서 몸에 분열이 생기지 않고 지체들이 서로 똑같이 돌보게 하셨습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1코린 12,12-14.20.24-27)

    아시다시피 지금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국가 간의 여러 전쟁, 특별히 미국과 이란의 중동 전쟁으로 수많은 생명이 희생당하고 위협받고 있습니다. 전쟁의 재난과 함께 그로 인한 일상적인 삶을 지탱하기 어려운 경제적인 불안까지 겹쳐 전 세계인들이 함께 고통을 겪으며 견뎌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하루 빨리 전쟁이 멈추고 모든 이가 정상적인 일상으로 되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드릴 뿐입니다. 특별히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기를 기도하며 함께 앞으로 나아가고 싶습니다. 이러한 세상을 위해 레오 14세 교황의 평화를 위한 기도를 더 간절하게 함께 바치고 싶습니다.

    “제자들에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인사를 건네신 주님, 저희에게도 당신의 평화를 선물하여 주소서. 역사속에서 당신의 평화를 실현할 힘을 주소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항상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권혁주 요한크리소스토모 주교

 

 

 

[원주교구]

2026년 부활 메시지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마르 16,6)

 

 

† 찬미예수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 부활의 기쁨이 여러분에게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분(예수님)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르 16,6)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복음입니다.
사도들과 그 제자들, 그리고 그 제자들의 제자들에 의해 전해지는 복음입니다. 
2000년의 역사를 넘어 전해오는 복음입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땅 끝까지 민족과 종족을 넘어 전해오는 복음입니다. 
시대와 언어와 박해의 장벽을 뚫고 전해오는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우리도 장차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죽음 후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부질없는 꿈입니다. 
그들은 이 땅, 지금의 삶에만 충실합니다. 
이 땅에서 자녀들이 잘되기를 희망합니다. 
이제 가족들이 아프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죽음 넘어 부활은 그들에게는 호사스런 생각이고, 분에 넘치는 희망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이보다 확실한 미래는 없습니다.

죽음 후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삶은 공수래 공수거입니다. 
부활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삶은 희망입니다.
그들에게 삶은 기쁨입니다. 

어떤 희망입니까? 
일찍이 어떤 이도 본 적이 없는 희망입니다. 
어떤 이도 들어 본 적도 없는 희망입니다.
어떤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았던 희망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조심스럽게 마련하여주신 선물에 관한 희망입니다. 
그 희망은 예수님의 부활로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어떤 기쁨입니까? 
전능하시고 선하신 아버지, 사랑하는 하느님을 만나는 기쁨입니다.
이 세상 소풍 이야기를 들려드릴 자비의 아버지를 만나는 기쁨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 아버지와 더불어 그리워했던 이들을 만나는 기쁨입니다.
그 기쁨, 그 설레임은 예수님의 부활로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희망과 기쁨의 절정입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신앙의 출발점이요, 목적이며, 그 중심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여러분 모두가 지금 여기서부터 기쁨과 평화를 누리기를 빕니다.

2026년 4월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 원주교구장 조규만 바실리오 주교

 

 

 

 

[의정부교구]

2026년 부활 메시지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마태 5,9)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라고 인사하시면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같은 인사를 하시면서 다가오십니다. 그분이 주시는 평화가 봄 햇살처럼 우리 모두의 마음에 가득하기를 빕니다. 또한 봄이 겨울을 물러가게 하듯이 평화의 주님께서 우리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그리고 온 세상에서 미움과 증오와 폭력을 몰아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현재의 세계 상황을 보면 간절한 마음으로 평화를 기원하게 됩니다. 수년째 지속되고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에 이어서 최근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으로 시작된 전쟁이 해당 지역을 넘어서 전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로는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지만 전쟁으로는 모든 것을 잃게 된다.’라는 교황님들의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세상 곳곳에서 분쟁과 전쟁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이들이 죽고 다치고, 희생자 가족의 “울음소리와 애끓는 통곡 소리”(마태 2,18)가 그치지 않습니다.

사실 분쟁과 폭력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습니다. 인류의 첫 조상 아담과 하와의 아들 카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한 이래로 서로 싸우고 죽이는 비극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 평화에 대한 염원과 희망도 함께 자라났습니다. 대표적으로 구약의 이사야 예언자는 모든 민족 간에 더는 전쟁이 없는 날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이사 2,4) 미카 예언자도 같은 희망을 간직하면서(미카 4,3 참조), 참된 평화를 이룩할 목자가 장차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미카 5,1-4 참조).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예언자들이 기대했던 참된 평화를 세상에 주시러 오신 구세주이십니다. 이는 그분의 탄생을 알리는 천사들의 노래에서도 드러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예수님께서는 수난 전에 천사들이 노래했던 그 평화를 제자들에게 약속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으시어 적개심의 장벽을 허물어버리심으로써 우리의 평화가 되셨습니다(에페 2,14 참조).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릅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철저히 힘의 논리에 의한 평화입니다. 힘으로 약자를 누르고, 무력으로 반대편을 제거해서 다른 소리가 나오지 못하게 하는 평화입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사랑 의 논리에 의한 평화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약자는 물론 죄인까지도 내치지 않고 감싸안는 사랑이며, 남의 목숨을 빼앗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목숨을 내놓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에 기초한 평화는 어떤 경우든 상대를 존중하며, 설사 상대가 나와 맞지 않는다고 해도 배척하지 않고 서로 화합해서 사는 것, 곧 상생(相生)의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참 빛으로 오신 구세주를 알아보지 못한 세상(요한 1,10 참조)에서 그분이 주시는 참 평화가 자리 잡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구세주로 알아본 제자들이 먼저 당신의 평화를 실천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럼으로써 제자 공동체가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마태5,14) 처럼 평화의 산성(山城)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실제로 예루살렘의 초대교회 공동체는 온 백성의 호감을 얻을 정도로 서로 친교를 나누면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사도 2,42-47 참조). 그런 모습이 우리 교회를 통해 계속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평화를 말하는 이들은 많지만, 평화를 실천하는 사람은 너무 적습니다. 우리 그리스도 신앙인이 평화의 본보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매 미사에서 십자가와 부활로써 참 평화를 이루신 주님을 기억하는 우리는 평화의 장인(匠人)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체 안에 계신 주님과 하나 되어 그분의 마음을 우리 안에 간직해야(필리 2,5 참조)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처럼 자비의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부드러운 말을 건네며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변화가 시작됩니다. 이렇게 나로부터 시작된 작은 변화는 큰 변화의 씨앗이 됩니다.

올해 우리는 ‘평화를 구하는 기도’를 남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인의 선종 800주년을 기념합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이 기도대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면 좋겠습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는 평화의 도구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2026년 주님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 의정부 교구장 손희송 베네딕토 주교

 

 

   

[인천교구]

2026 부활 메시지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요한 20,1)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이 기쁨과 은총이 우리 교구 모든 신자와 가정에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부활의 기쁨이 교회를 넘어 이 세상에 널리 퍼져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모든 것을 허무하게 만들었습니다. 모든 것이 허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과 수많은 사람에게 십자가상의 죽음은 실패와 절망만을 남긴 듯 보였습니다. 육중한 돌로 닫힌 무덤을 보면서 그 슬픔은 더할 나위 없이 크게 다가왔습니다.

비통한 마음으로 무덤을 향해 걸어갔던 여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음을 보고 놀랍니다.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빈 무덤 앞에서 비로소 여인들은 깨닫습니다. 그분께서 무덤에 계시지 않음을, 다시 살아나셨음을, 육중한 돌을 밀어내듯 죽음을 뚫고 생명으로 나가셨음을 체험합니다. 절망에 빠졌던 사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빈 무덤을 통해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하면서 그들의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절망과 허무가 사라진 자리에 기쁨과 희망 그리고 생명으로 가득한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렇게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감을 말합니다. 부활을 뜻하는 ‘파스카’(Pascha)가 ‘거르고 넘어가다’라는 말에서 유래했듯, 부활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절망에서 기쁨으로 ‘넘어간’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를 체험한 이들 역시 절망을 딛고 기쁨으로 충만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라고 말하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로마 6,8)라고 부활 신앙을 고백합니다.

부활은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시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그 힘이 우리를 지탱해 주어 우리도 생명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부활의 기쁨을 경축하는 온 교회와 함께 우리 모두도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기쁨을 영위합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변화는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음을 믿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낙담한 채,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모습이 이를 말해 줍니다. 그들은 스승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기에, 들어도 듣지 못하고, 눈으로 보아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한 예수님은 성경 말씀을 통해 그들의 닫힌 눈과 마음을 열어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알아보고 의심에서 믿음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나아가는 자신들을 체험하게 됩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부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게 됩니다. 그들은 단순히 부활을 체험한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삶으로 용기 있게 나아갔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셨듯,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복음을 산다는 것은 체험을 넘어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구체적인 결단에서 시작됩니다. 주님께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셨듯, 의심에서 믿음으로, 옹졸한 마음에서 열린 마음으로, 두려움에서 용기로, 단죄에서 자비로, 적대에서 연민으로, 자만에서 겸손으로, 계산적 사고에서 포용적 사고로, 부정적 사고에서 긍정적 사고로, 힘의 논리에서 사랑의 논리로 옮아감을 말합니다. 절망과 불안에서 용맹스럽게 다시 예루살렘을 향했던 제자들처럼 어제의 ‘나’에서 새로운 ‘나’로 변화되는 결심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를 이렇게 가르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콜로 3,1)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모두 부활의 증인입니다. 부활의 기쁨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통해 세상은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제자들이 “우리들이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라고 자신 있게 부활을 증언한 것처럼, 우리도 변화된 삶의 모습을 세상에 증언해야 합니다. 무분별한 개발과 과소비, 물신주의로 병든 이 세대에, 새 생명에 대한 마지막 존엄마저 위협받는 죽음의 문화를 거슬러, 무력에 의한 평화를 부끄러움 없이 선전하는 이 세상에 맞서, 우리는 부활의 힘이 무엇인지를 증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부활의 기쁨이 교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 구원을 위한 은총임을 모두가 알게 됩니다.

전쟁의 먹구름으로 모두가 함께 살아갈 내일을 걱정하는 오늘입니다. 무거운 무덤의 돌을 밀어내고 생명으로 나아가신 주님께서 세상에 건네신 첫 인사가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다가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 우리 모두 부활의 힘을 굳게 믿고, 부활의 증인으로 세상을 향해 평화와 희망을 전하는 이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주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천주교 인천교구장 정신철 요한 세례자 주교

 

 

 

 

[전주교구]

2026 부활 메시지
“두려워하지 마라.”
(마태 28,5)

 

 

사랑하는 교구민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되살아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 내리시기를 빕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는 마태오복음을 보면, 두 차례의 큰 지진이 일어납니다. 첫 번째 지진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직후에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나서 숨을 거두셨다. 그러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졌다.… 백인대장과 또 그와 함께 예수님을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다른 여러 가지 일들을 보고 몹시 두려워하며,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하고 말하였다”(마태 27,50-51).

이렇게 돌아가신 예수님께서는 서둘러 무덤에 묻히십니다. 노동이 금지된 안식일이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이루신 후 이제 그야말로 하느님의 안식을 취하십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624항 참조). 예수님의 몸과 영혼이 깊은 안식을 누리십니다.

두 번째 지진은 안식일 다음 날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을 때 일어납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났다. 그리고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무덤으로 다가가 돌을 옆으로 굴리고서는 그 위에 앉는 것이었다. 그의 모습은 번개 같고 옷은 눈처럼 희었다. 무덤을 경비하던 자들은 천사를 보고 두려워 떨다가 까무러쳤다”(마태 28,2-4).

두 차례의 큰 지진은 땅과 하늘 그리고 마음을 뒤흔드는 사건입니다. 이는 큰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일으킵니다. 첫 번째 지진은 죽음의 비명과 더불어 마침내 지옥이 승리했다는 격렬한 몸짓과 환호성과 같습니다. 그래서 백인대장과 병사들은 아주 소심하게 신앙을 고백하고 있고, 예수님을 사랑했던 여자들은 깊은 슬픔에 빠져 이제 실낱같은 희망만을 겨우 유지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 희망은 마치 그들 영혼의 깊은 잿더미 속에 살아 있는 작은 불씨와 같았습니다. 바로 이 불씨에서 여자들은 주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려는 사랑을 키우고, 실제로 안식일 다음 날 무덤을 찾아가는 용기를 냅니다. 희망의 불씨가 당겨진 것입니다. 바로 그때 두 번째로 땅이 흔들립니다. 이 지진은 사랑이 결국 이겼다는 승리의 표현이지만, 여자들은 아직 두려워하였습니다. 여자들은 몹시 놀랐고, 이에 천사는 용기와 희망을 북돋아 주는 말씀을 전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28,5).

천사는 마리아에게 구세주의 탄생을 예고할 때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활 중에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용기를 내어라.”하고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분명 당황한 영혼에 여유를 주고, 안정감을 주고,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무덤 근처에서 여자들을 만나셨을 때 다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으로, 먼저, 악이 승리했다는 첫 번째 지진의 환상을 산산이 부수십니다. 이어서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으로 당신의 사랑이 궁극적으로 승리했다는 것을 부드럽게 선언하십니다. 마침내 교회를 통해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을 목소리에서 목소리로, 믿음에서 믿음으로 우리에게까지 전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날 당신 백성을 만나실 때마다 인사말로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을 들려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실의에 빠진 당신 백성에게 약속에 대한 믿음을 회복시켜 주시고 위로를 베풀어주십니다. 실제로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으로 그 옛날 이사야의 예언은 성취됩니다. “주님께서는 정녕 시온을 위로하시고 그 모든 폐허를 위로하신다. 그 광야를 에덴처럼, 그 황무지를 주님의 동산처럼 만드시니 그 안에는 기쁨과 즐거움이, 감사와 찬미 노랫소리가 깃들리라”(이사 51,3).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분명 우리를 위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큰 용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께서는 어둠의 온갖 세력을 물리치시고, 악에서도 선을 이끌어 내실 수 있습니다. 고요하게 승리한 이 부활절에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여기 있다. 나는 죽었지만, 다시 살아났다.” 주님께서는 우리 시대에 악의 승리와 그 함성이 땅을 뒤흔들 때마다, 그분의 고난이 교회 안에서 되풀이될 때마다, 그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이 채워질 때마다 이 말씀을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슬픔과 두려움과 혼란에 빠져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이 말씀을 나지막이 들려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악의 세력이 사람들을 장악하고 죄악의 구조를 만들어내는 혼란한 역사 한복판에 이 말씀을 하시고, 거짓과 불의와 증오 등이 기세등등한 현실에서도 이 말씀을 하십니다. 아울러 상처를 입은 모든 인간에게, 임종이 목전에 다가온 모든 인간에게도 이 말씀을 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다. 내가 여기 있다.” 악과 죽음이 승리했다고 착각할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궁극적인 승리에 한 걸음 더 가까이 인도하십니다.

교우 여러분, 참으로 거룩한 이 부활절에 우리는 모두 마음을 가다듬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주 예수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시다. 특히 개인적 혹은 문화적이나 사회적 사건에서 충격을 받고 당황할 때, 독선과 오만과 교만 등의 지진이 우리의 마음을 뒤흔들 때,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입시다. 그리고 우리 죄악의 지진이 우리 자신을 무너뜨릴 때 더욱더 주님의 목소리를 들읍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다!” 주님의 말씀은 두려워하는 우리에게 분명 용기를 북돋아 주시고, 부활의 생명을 누리도록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실 것입니다.

2026년 부활절에
전주교구장 김선태 사도 요한 주교

 

 

 

 

[제주교구]

2026년 주님 부활 대축일 사목 서한
"부활의 신앙으로 평화를 이루며 살아갑시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태 28,5-6) 부활 아침에 울려 퍼진 천사의 이 말은 그때의 제자들뿐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선포되는 말씀입니다.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히 과거에 일어난 사건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과 역사를 새롭게 하는 하느님의 살아 있는 힘입니다. 그러기에 부활은 죽음을 넘어 생명으로, 절망을 넘어 희망으로, 갈등을 넘어 평화로 이끄는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최근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사이에 벌어지는 전쟁의 소용돌이는 아직도 우리 모두에게 평화의 손길이 얼마나 절실한지를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또한 지난 몇 년에 걸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도 이어지고 있고, 미얀마를 비롯해 내전에 휩쓸린 여러 나라들의 상황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아, 많은 사람이 고통과 좌절을 겪으며 어둠의 골짜기를 걷고 있습니다. 왜 이리도 인간들은 전쟁의 광풍에서 벗어나지를 못할까요? 

    우리 제주 땅에도 잊을 수 없는 고통의 역사가 있습니다. 제주 4·3의 비극입니다. 당시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고 대다수의 가정이 깊은 상처를 품고 오랜 세월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 아픔은 단지 과거에서 끝난 게 아니라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기억입니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는 그 기억을 증오와 분열의 기억으로만 남겨 두지 않았습니다. 제주의 많은 사람들은 눈물 속에서도 화해를 선택했고, 상처 속에서도 평화를 향해 걸었습니다. 부활 신앙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십자가의 어둠을 지나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듯이, 우리의 역사도 상처를 넘어 희망의 역사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제주는 오랫동안 “평화의 섬”으로 불려 왔습니다. 그러나 평화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기억을 통해 배우고, 대화를 통해 만들어 가며, 용서를 통해 완성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두려움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 부활의 첫 메시지는 바로 평화였습니다. 그래서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평화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 안에도 여전히 많은 갈등이 존재합니다. 서로 다른 생각과 이해관계가 계속 충돌하고 있습니다. 우리 제주 역시 제2공항 건설에 따른 대립과 난개발로 인한 환경파괴, 전국 이혼율 1위, 전국 청소년 자살률 1위라는 심각한 지표에서 드러나듯이 사회적 문제와 갈등 속에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 할지를 처절히 고민해야 합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교회는 한 가지 길을 분명히 가리키고 있습니다. 바로 참된 평화를 만드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진정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갈등을 피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으로 갈등을 넘어서는 사람입니다. 제주교구는 오래전부터 생명과 평화를 위한 순례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특별히 4·3과 강정 해군기지의 아픈 기억을 되새기며 화해와 치유를 위한 기도를 이어왔고, 사회문제들의 장벽 앞에서도 생명과 평화를 위한 순례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 순례는 단순한 행사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살아가는 신앙의 여정입니다. 그리고 순례는 단순히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변화되는 체험입니다. 아픈 기억이 화해로 바뀌고 상처가 치유로 바뀌며 갈등이 평화의 사명으로 바뀌는 길입니다. 그래서 제주교구의 평화 순례는 부활 신앙을 삶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길입니다.

    또한 부활 신앙은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을 향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사랑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제주의 자연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귀중한 선물입니다. 바다와 오름, 숲과 돌담, 그리고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은 하느님의 창조 질서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아름다운 자연을 지키고 생명을 존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활 신앙은 생명을 선택하는 삶입니다. 부활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삶으로 증언해야 할 신앙입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사랑을 실천할 때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를 용서할 때 부활이 드러납니다. 또한 우리가 사회 안에서 평화를 위해 노력할 때 부활의 빛이 세상에 비추어집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리고 우리를 세상으로 파견하십니다. 부활의 증인이 되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제주교구 형제자매 여러분, 부활의 신앙은 우리에게 새로운 눈을 뜨도록 요청합니다. 상처의 역사 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하게 하고, 갈등의 현실 속에서도 평화를 선택하게 합니다. 우리 모두 부활의 신앙으로 평화를 이루며 살아갑시다. 그래서 이 제주 땅이 상처를 넘어 치유로, 갈등을 넘어 화해로, 죽음을 넘어 생명으로 나아가는 평화의 섬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가정과 공동체, 그리고 이 제주 땅 위에 풍성히 내리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2026년 부활절에
천주교 제주교구 감목 문창우 비오

 

 

 

[청주교구]

2026년 부활 담화문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마태 28,6)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파스카 성삼일을 통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참여한 모든 분께 주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은총과 기쁨이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1. “주간 첫날이 밝아올 무렵”(마태 28,1)

    “주간 첫날이 밝아올 무렵” 두 여인이 “무덤을 보러” 갔습니다. 그들은 아직 어둠이 물러가지 않은 시간, 아니 어둠이 가장 짙게 내려앉는 밤의 끝자락에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이 밤을 가득 채운 어둠은 인간 삶에 깃든 어둠, 세상에 깃든 어둠 곧 인간 본성의 나약함과 비참함으로 인해 절망으로 마주하게 되는 현실을 상징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처럼 되어서”(창세 3,5) “하늘까지 닿는”(창세11,4) 힘을 얻고자 합니다. 하지만 나약한 우리는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로마 7,19) 죄악을 행하며 비참한 죽음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는 “불의와 사악과 탐욕과 악의로 가득 차 있고, 시기와 살인과 분쟁과 사기와 악덕”(로마 1,29)이 끊이지 않는 세상을 마주 합니다. 개인의 갈등과 폭력, 나라 간의 분쟁과 전쟁이 사라지는 “평화를 바랐으나 좋은 일 하나”(예레14,19) 없는 현실 앞에 좌절합니다. 나약함과 불완전함이 결코 헤어날 수 없는 굴레처럼 느껴지고 인간의 끝없는 탐욕이 폭력과 전쟁으로 드러나며, 죽음의 공포가 벗어 버릴 수 없는 짐처럼 우리를 짓누를 때 어둠은 여전히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그 밤의 끝은 보이지 않습니다.

    죄악이 선사하는 이 어둠은,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혀계신 이 밤에, 인류를 더 무겁게 짓누릅니다. 죽음이라는 두려움과 허무 앞에서, 큰 돌로 막혀 있는 무덤은(마태 27,60참조) 모든 희망이 사라진 세상,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세상을 상징합니다. 무덤을 막은 돌은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우리의 울부짖음을 듣지도, 응답하지도 않으시는 ‘하느님의 침묵’을 떠오르게 합니다.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루카 1,79) 우리를 돌보시지 않는 듯한 ‘하느님의 부재(不在)’가 무덤을 통해 “죽음의 승리”(1코린 15,55 참조)처럼 이 세상에 드러납니다.

    하지만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서는 굴욕적인 수난과 완전한 패배로 보이는 십자가상 죽음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온 세상에 드러내는 구원의 길임을 밝히셨습니다. 그래서 어둠으로 가득한 이 밤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사라지고 하느님의 침묵만이 가득한 밤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구원의 밤이요 거룩한 밤입니다.

    2.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태 28,6)

    이 거룩한 밤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되살아나셨습니다. 우리를 소멸과 허무로 이끄는 죽음의 어둠은 그 권세를 잃어버렸습니다(1코린 15,54-57 참조). 이제 “의로움의 태양”(말라 3,20)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을 통하여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 “죽음의 그림자”(마태4,16) 속에 있는 이들에게 참된 구원의 빛으로 떠오르십니다. 어둠은 물러가고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2코린 4,6)이 온 세상을 가득 채웁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십자가와 무덤을 거쳐 이 세상에서 하느님 아버지께로 건너갑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구원의 신비를 경축하며 주님의 파스카를 기념”(파스카 성야 전례 9항)하는 이 거룩한 밤에, 우리는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갑니다.

    세례로 주님의 파스카 신비에 참여한 우리는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을 분별하며 “선과 의로움과 진리”를 살아가야 합니다(에페 5,9-10 참조). 하지만 세상의 거센 풍파와 위세 앞에서 나약한 우리는 또다시 죄악의 어둠 속으로 빠져들기도 합니다. 여전히 “무지와 완고한 마음으로” 죄의 종으로 “하느님의 생명”에서 멀리 떨어져 살면서도(에페 4,18 참조), 자신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의로움 속에 있다고 착각하기도 합니다(로마 5,21 참조). 그래서 우리는 이 거룩한 밤에 그리스도의 빛으로 “마음과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 주시기를, “영원한 빛의 축제”로 건너가기를 청해야 합니다(파스카 성야 빛의 예식 참조). 그리고 두 여인이 그랬던 것처럼, 헤어날 수 없는 어둠이 짓누를 때 부활하신 주님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3.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마태 28,10)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 우리는 “갈릴래아”로 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먼저” 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마태 28,7.10 참조). 갈릴래아는 고된 밤샘 노동이 있는 곳(루카 5,5참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이 사는 곳(마태 4,23), 마귀 들린 이들이 사는 곳(마르 1,39), 배고픔에도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이 있던 곳(요한 6장 참조)입니다. 바로 ‘지금 여기’ 우리 삶의 한복판이 “갈릴래아”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닿을 수 없는 저 높은 곳이 아니라, 끊임없는 고통과 절망 속에 생명을 목말라하는 우리 삶 한가운데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나약함과 죽음, 두려움과 고통에 함께하시며 참된 생명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해 기다리십니다.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러 갑시다. 세상이 현혹하는 재물과 권력이 아니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신 그리스도를 따라갑시다. 세례성사로 주님의 죽음에 참여하였으니, 죄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갑시다. 시기 질투와 미움, 탐욕과 교만을 내려놓고 주님의 부활로 밝혀진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안에 살아갑시다. 참된 빛이신 그리스도를 증언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마태 5,13-14)으로 화해와 용서, 선(善)을 살아갑시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은총 안에서 기쁨과 희망을 되찾고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2026년 4월 5일
주님 부활 대축일
청주교구장 김종강 시몬 주교

 

 

 

[춘천교구]

2026년 춘천교구장 주교 주님 부활 대축일 담화
“평화와 생명의 길을 향하여”

 

 

    사랑하는 춘천교구 하느님 백성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이 기쁜 부활 인사를 여러분 모두와 나눕니다.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주님의 부활은 절망을 희망으로, 어둠을 빛으로 바꾸는 인류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절정입니다. 우리는 지난 사순 시기 동안 ‘생명 보호’ 와 ‘생태적 회개’ 를 마음에 새기며 기도와 절제, 사랑의 실천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여정은 단순한 개인적 성찰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공동의 집을 향한 책임을 다시 일깨워 주었습니다. 이제 부활의 빛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상처 입은 세상 한가운데로 들어오셔서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이라는 인사는 전쟁과 분쟁이 가득한 오늘날에 가장 절실한 말씀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과 갈등이 계속되고 있으며, 수많은 생명이 고통 속에 놓여 있습니다. 인간의 탐욕과 무관심, 그리고 힘의 논리가 만들어낸 이 비극 앞에서 우리는 침묵할 수 없습니다.

    전쟁은 단지 이해 당사자인 국가 간의 충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을 파괴하는 중대한 죄이며, 창조 질서를 거스르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부활 신앙 안에서 모든 폭력과 죽음의 문화를 거부하고, 생명과 평화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무기를 내려놓고 대화를 선택하며, 증오를 넘어 화해로 나아가는 용기를 청해야 합니다.

    부활은 단순히 예수님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 안에서 실현되어야 할 현실입니다. 우리가 작은 생명까지도 소중히 여기고, 자연을 돌보며, 서로를 존중하는 삶을 선택할 때, 부활은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평화를 만들고, 갈등을 화해로 바꾸며, 상처 입은 이들을 위로할 때, 우리는 부활의 증인이 됩니다.

    특별히, 생명을 위협하는 사회적 구조와 문화 속에서 우리는 더욱 깨어 있어야 합니다. 가장 약한 생명, 태아와 노약자, 가난한 이들과 고통받는 이들을 보호하는 일은 부활 신앙을 사는 구체적인 실천입니다. 생명을 선택하는 용기와 이를 지켜내는 사랑이야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하느님 백성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 길은 평화를 이루는 길이며 생명을 살리는 길입니다. 우리가 그 길을 함께 걸어갈 때, 이 세상은 조금씩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던 창조의 모습을 회복할 것입니다.

    이번 부활 시기를 맞아, 우리가 먼저 생명의 소중함을 더욱 깊이 깨닫고, 전쟁과 갈등이 종식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일상 안에서 평화를 실천하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갑시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부활이 여러분의 가정과 공동체, 그리고 이 세상에 참된 평화와 희망을 가득히 채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2026년 주님 부활 대축일에
춘천주교 김 주 영 시몬 드림

 

 

  

[군종교구]

2026년 부활 메시지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알렐루야, 알렐루야!”
(시편 118,24)

 

 

    사랑하는 군종교구민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돌무덤의 죽음으로부터 승리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며, 여러분 모두에게도 부활의 은총이 가득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축하 인사를 전합니다. 알렐루야!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요한 11,23)

    예수님께서는 베타니아에 살던 마리아와 마르타 자매, 그리고 오빠 라자로를 친구처럼 대하시며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라자로가 병을 앓다 죽게 되었고, 그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났을 때 예수님은 베타니아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라고 말하며 죽음 앞에 무력함을 고백하던 이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43) 하고 말씀하시며 라자로를 소생시키셨습니다.
    이후 라자로가 얼마를 더 살았는지 성경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분명 라자로는 예수님을 공경하며 따르다가 결국 육신의 죽음을 맞았을 것입니다. 인간이면 누구나가 건강히 오래오래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원의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마태 28,7)

    부활 대축일의 복음은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한 제자가 예수님의 시신을 모셨던 ‘빈 무덤’ 안에서 수의로 쓴 아마포와 잘 개켜진 얼굴을 쌌던 수건을 보았고,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말씀을 믿었다고 전해 줍니다. 이후 베드로 사도는 “그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사도 10,39-40)라고 증언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라자로에게 “이리 나와라.”라고 명하심으로 소생시키셨다면, 하느님께서는 돌무덤에 묻힌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시어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빈무덤’은 예수님 부활을 처음으로 드러낸 표징입니다.
    그런데 라자로와 예수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라자로가 얻은 것은 단순히 이 세상에서의 삶이 잠시 연장된 소생이었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모두가 간절히 염원한 영원한 생명, 구원의 완성이었다는 점입니다.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콜로 3,1)

    안타깝게도 우리는 불안한 세계 정세 속에서 매일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테러와 전쟁, 자연 재해와 기근, 각종 사건과 사고 소식은 우리의 삶을 어렵고 힘들게 만듭니다.
    이런 상황에서 레오 14세 교황님께서는 연일 세계평화를 말씀하시며, “하느님을 부르는 자는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 또 “어떤 이들은 감히 죽음을 정당화하기 위해 신의 이름을 빌려 쓰려한다. 그러나 신은 어둠의 편에 서실 수 없다.”라고 하시면서, 희생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대화의 길로 나아가기를 촉구하고 계십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콜로 3,1-2)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으심을 통해서 부활의 영생을 선물로 받은 복된 사람들입니다. 영원히 살고 싶다는 인간의 바람이 그분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실현되었습니다. 부활의 희망으로 우리는 현세의 고통을 극복할 힘과 근거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진정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언제나 하느님을 바라보며,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과 감사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마태 28,10)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에게 이르십니다.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
    예수님께서 제자들과의 재회 장소로 지목하신 ‘갈릴래아’는 어떤 곳입니까? 바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공생활의 주무대였습니다. 그곳에서 어부였던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이 제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갈릴래아 카나의 혼인 잔치(요한 2,1-12)에서는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하시어 잔치의 기쁨을 더하시는 표징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산상설교(마태 5-7장)를 통하여 참 행복을 전파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과 제자들, 메시아를 바라던 백성들 사이에 사랑이 시작되고 꽃을 피운 장소였습니다. 하느님과의 만남과 영적 체험이 이루어진 곳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갈릴래아’는 어디일까요? 매 주일 말씀을 듣고 성체를 받아 모시는 바로 이 성당이기도 하고, 우리가 사는 생활관, 각자의 가정, 또 주특기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는 자리가 바로 우리의 갈릴래아입니다. 그곳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곳에서 우리가 당신의 부활을 드러내는 평화의 도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곳에서 주변의 지친 이들에게 평화와 위로를 건넬 때 우리 또한 영적 기쁨을 얻어 누릴 수 있습니다.

    ‘평화의 파수꾼으로서 기도하는 천주교 신자 군인이 됩시다.’

    사랑하는 군종교구민 여러분!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의 선행이 결실을 맺기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 부활의 빛과 기쁨을 이웃에게 전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주하는 각자의 갈릴래아에서 늘 기도하는 천주교 신자 군인이 될 것을 다짐하며, 서로를 격려합시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 기쁨이 전후방 각지에서 수고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2026년 부활절에
천주교 군종교구장 서상범 티토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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