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7월 23일 (목)
(녹)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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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6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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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umbrella] 쪽지 캡슐

2026-07-22 ㅣ No.190747

‘50주년 기념 책자 발간 위원회모임이 있었습니다. 디자인과 편집을 담당한 자매님은 기존의 책자 편집 방향을 새롭게 바꾸어 보자고 제안하였습니다. 예전에는 본당의 역사를 중심으로 기념 책자를 만들었다면, 이번에는 이야기가 있는 책자로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나에게 성당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세대별로 나누어 묻고, 그 안에 교우들의 신앙 이야기와 은총의 체험을 담아 보자는 제안이었습니다. 두꺼운 장정판 책자보다는 잡지 형태로 150쪽 내외의 책자를 만들고, 자세한 역사는 전자책으로 남기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위원들 모두 그 방향에 공감하였습니다. 인공지능과 다양한 디자인 프로그램도 활용하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저는 그 모임을 하면서 한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혁신과 개혁은 거창한 구호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관점의 차이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같은 현실을 보아도 어디에 기준을 두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관점의 차이로 참된 개혁과 혁신을 보여주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기쁜 소식은 세상이 말하는 기쁜 소식과 달랐습니다. 세상은 성공, 명예, 권력, 재물을 기쁜 소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겸손, 나눔, 용서, 사랑을 기쁜 소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기준은 땅에 있지만, 예수님의 기준은 하느님의 뜻에 있습니다. 세상이라는 저수지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참된 기쁨을 길어 올릴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의로움이라는 저수지에서만 우리는 생명의 물을 길어 올릴 수 있습니다.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도 관점의 전환을 보여줍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에게 안식일은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었습니다. 글을 몰라서, 가난해서, 몸이 아파서 안식일을 온전히 지킬 수 없는 사람은 죄인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교통 신호가 사람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있는 것처럼, 안식일도 사람을 살리고 하느님께 가까이 이끌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사람을 억누르는 도구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관점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이 말씀은 단순히 재물의 많고 적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눈으로 보면, 이 말씀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마음에 관한 말씀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더 깊이 깨닫습니다. 나누는 사람은 나눔 안에서 더 큰 기쁨을 얻습니다. 희생하는 사람은 희생 안에서 더 풍성한 사랑을 체험합니다. 은총은 움켜쥐는 사람에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흘려보내는 사람 안에서 더 크게 자랍니다. 반대로 마음을 닫고 자기만을 위해 살며, 하느님의 말씀을 외면하는 사람은 이미 주어진 은총마저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하느님의 말씀을 볼 수 있는 눈,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 그리고 그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는 마음이야말로 참된 축복입니다. 많이 가졌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고 그 뜻을 살아갈 수 있기에 행복한 것입니다.

 

서산대사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는 발걸음을 함부로 하지 마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된다.” 김구 선생님도 이 말씀을 평생 삶의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내가 오늘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어떤 마음으로 신앙을 살아가느냐가 뒤따라오는 이들에게 이정표가 됩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피의 순교로 사제들에게 좋은 이정표를 남겨 주셨습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땀의 순교로 사제들에게 좋은 이정표를 남겨 주셨습니다. 신앙의 선조들은 박해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우리에게 신앙의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분들은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이었지만, 하느님의 기준으로 보면 참으로 부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있었고, 하느님의 뜻을 볼 눈이 있었으며, 그 말씀을 삶으로 증언할 용기가 있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정녕 내 백성이 두 가지 악행을 저질렀다. 그들은 생수의 원천인 나를 저버렸고, 자신을 위해 저수 동굴을,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팠다.” 이 말씀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해당합니다. 우리는 때로 생수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외면하고, 세상의 성공과 욕망이라는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파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참된 생명이 고이지 않습니다. 참된 기쁨도, 참된 평화도, 참된 희망도 하느님 안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본당의 50주년 기념 책자가 단순히 지나온 역사를 기록하는 책이 아니라, 은총의 발자국을 모으는 책이 되면 좋겠습니다. “나에게 성당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결국 나는 하느님을 어디에서 만났는가?”라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성당은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곳이고,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하는 곳이며, 서로의 삶이 신앙의 이정표가 되어 주는 곳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관점을 세상에서 하느님께로 돌리면 좋겠습니다. 성공과 욕망이라는 갈라진 저수 동굴이 아니라, 생수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마음을 두면 좋겠습니다. 기도하는 사람, 나누는 사람, 희생하는 사람은 더 많은 은총을 받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이미 참된 행복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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