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1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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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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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선 [hsyoonrda] 쪽지 캡슐

2026-10-09 ㅣ No.234092

침묵의 성전

 

윤홍선

 

 

1. 비명

 

 소나무 향이 서늘하게 감도는 성전의 문을 열었을 때, 제일 먼저 맞아준 것은 서늘한 침묵이었습니다. 민우는 삐걱거리는 맨 뒷줄 장의자에 주저앉듯 몸을 묻었습니다.

 

지난 석 달, 그의 삶은 온통 사방에서 몰아치는 비명이었습니다. 피땀으로 일군 사업장의 무너지는 소리, 빗발치듯 걸려 오는 차가운 독촉 전화, 믿었던 이들의 실망 섞인 비난, 그리고 밤마다 귓가를 죄어오던 자책의 귀신들. 세상은 온통 그를 향해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지르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올려보려 입술을 옴짝여도 흩어진 마음은 허공만을 맴돌 뿐이었습니다.

 

"하느님, 제가 대체 무엇을 그리 잘못했습니까? 어디 계십니까! 단 한 말씀이라도 좀 해보십시오!"

 

속에서 터뜨린 통곡은 높다란 천장을 때리곤 차갑게 떨어졌고, 성전은 여전히 무심한 정적 속에 침묵할 뿐이었습니다. 하느님마저 자신을 외면했다는 배신감이 차갑게 가슴을 찔렀습니다.

 

2. 시계 소리

 

그때, 제대 옆 쪽문이 스르르 열리며 세월을 얹은 늙은 수녀 한 분이 조용히 걸어 나왔습니다. 감실 앞에 깊이 고개를 숙인 수녀는 민우보다 한참 앞쪽에 자리를 잡고 가만히 앉았습니다. 그녀는 기도문을 읊지도, 두 손을 번쩍 들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무릎 위에 야윈 손을 살포시 얹은 채 붉게 피어오르는 감실등 불빛만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10분, 20분이 흐르고 성전의 시간마저 멈춘 듯한 그때, 답답함을 견디지 못한 민우가 조심스레 다가가 곁에 섰습니다.

 

"수녀님, 답답하지 않으십니까?"

 

수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 깊고 맑은 눈동자에는 세파를 견뎌낸 이만의 깊은 평화가 담겨 있었습니다.

 

"무엇이 답답합니까, 형제님?"

 

"이렇게 가만히 계신다고 무슨 소리가 들립니까? 하느님이 대답이라도 해주십니까? 저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저 막막한 침묵뿐인데요."

 

수녀는 나지막이 미소 지으며 성당 구석의 오래된 괘종시계를 가리켰습니다.

 

"형제님, 저 시계 소리가 들리십니까?"

 

귀를 기울이자, 성전의 깊은 정적을 뚫고 째깍, 째깍, 째깍… 톱니바퀴의 숨소리가 단단하게 울려왔습니다.

 

"저 시계는 형제님이 성당 문을 열기 전에도,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지금 이 순간에도 쉬지 않고 울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형제님의 마음속에 세상의 소음과 억울함, 하느님을 향한 원망의 비명이 가득 차 있을 때는 바로 곁에 있는 저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던 것이지요."

 

수녀의 따뜻한 말소리가 민우의 가슴 위에 살포시 얹어졌습니다.

 

"호렙산의 엘리야를 기억하십니까. 거친 바람과 지진, 사나운 불길 속에도 하느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모든 폭풍이 지나간 뒤 들려온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소리' 속에 계셨지요. 하느님은 침묵이라는 언어로 말씀하십니다. 내면의 외침을 끄지 않으면 그 은은한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듣고자 애쓰지 말고, 먼저 가득 찬 불안과 원망을 내려놓아 보세요. 그분은 정답을 던져주는 분이 아니라, 이 침묵 속에서 당신과 함께 울고 계시는 분입니다."

 

3. 느낌

 

수녀가 떠나고, 성전 안에 다시 홀로 남겨진 민우. 그는 가만히 눈을 감았습니다.

 

수녀의 따뜻했던 잔상이 잔잔히 스러진 뒤, 성전에는 또다시 막막한 정적이 내려앉았습니다. 민우는 거친 숨을 내쉬며 굳게 눈을 감았지만, 내면에서는 수개월간 쌓인 억울함과 절망의 파도가 마지막 발악을 하듯 사납게 휘몰아쳤습니다. 무너진 사업장의 비참함, 채권자들의 차가운 눈빛, 그리고 “왜 나에게만 이런 시련을 주시느냐”는 하느님을 향한 사나운 원망이 가슴속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부딪혔습니다.

 

그러나 폭풍 같은 비명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빈자리에, 방금 전 늙은 수녀가 나지막이 건네고 간 한마디가 작은 균열을 내며 온기를 품고 스며들었습니다.

 

‘그분은 이 정적 속에서 당신과 함께 울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 문장이 굳게 닫혀 있던 민우의 영혼 가장 깊은 틈새에 툭 하고 떨어졌습니다. 순간, 쿵 하는 무거운 울림과 함께 그의 사유가 멈추어 섰습니다.

 

‘함께… 울고 계신다고?’

 

그동안 민우가 성전에 들어와 외쳤던 모든 기도는, 하느님을 저 높고 차가운 재판관의 자리에 앉혀두고 던진 항의서였습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길래 나를 버리셨습니까?”, “왜 나를 이 벼랑 끝으로 내모셨습니까?” 하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판결을 요구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이 자신을 외면한 채 저 멀리서 무심하게 내려다보고 계신다고 믿었기에, 그분보다 더 큰 소리로 소리를 질러야만 내 목소리가 닿을 것이라 착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수녀의 말은 민우가 평생 가져온 하느님의 이미지를 완전히 부수어 버렸습니다. 하느님은 저 높은 곳에서 냉정하게 판결을 내리는 엄숙한 재판관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민우가 피눈물을 흘리며 일군 일터가 무너져 내릴 때도, 채권자들의 고함 속에 고개를 숙이고 떨 때도, 그리고 아무도 없는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절망하던 그 모든 밤에도, 민우의 바로 곁에서 가슴을 찢으며 함께 눈물을 흘려주신 분이었습니다.

 

자신이 들었던 세상의 소음 속에서 하느님은 결코 멀리 계셨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너무 크게 지른 자신의 비명과 원망의 소리에 묻혀, 바로 옆에서 나지막이 내쉬시는 그분의 아픈 숨소리를 들지 못했을 뿐이었습니다.

 

‘아… 내가 그분께 말씀하실 기회조차 드리지 않았구나. 그분의 슬픈 표정을 단 한 번도 바라보아 주지 않았구나.’

 

깨달음이 영혼을 관통한 순간, 민우는 비로소 하느님의 마음과 눈이 맞닿았습니다. 자신의 상처만 바라보느라 정작 자신을 향해 팔을 벌리고 계시던 하느님의 눈물을 보지 못했던 지난날의 어리석음이 가슴을 후벼팠습니다.

 

사나운 소용돌이 같던 내면의 소음들이 순식간에 정지했습니다. 가슴을 짓누르던 서운함, 세상에 대한 증오, 미래에 대한 아득한 두려움까지—그것들을 지탱하던 손가락의 핏줄이 하얗게 불거질 정도로 꽉 쥐고 있던 주먹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나갔습니다.

 

그것은 절망에 굴복한 패배가 아니었습니다. 더 이상 혼자서 이 잔인한 무게를 버텨내지 않겠다는, 비로소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품에 온전히 나를 내던지는 ‘거룩한 내맡김’이자 성숙한 순명이었습니다.

 

4. 마음

 

민우는 자신이 평생 짊어지려 애썼던 무거운 짐들의 파편을 하나씩, 하나씩 마음의 손에서 놓아 제대 발치 아래로 밀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침묵의 깊은 사위 속에서 가만히 마음의 입술을 열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당신을 향해 사나운 질문을 퍼붓고 목이 쉬라 원망을 내지르던 제 무지함을 용서하십시오.

 

저 높은 곳에서 무심하게 바라만 보고 계신 줄 알았습니다.

 

나 홀로 이 차가운 절망의 폭풍 속을 견디고 있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나의 억울함에 눈이 멀어, 나의 자책과 두려움에 귀가 막혀,

 

바로 제 곁에서 가슴을 찢으며 함께 울고 계시던 당신의 슬프고 따뜻한 눈물을 보지 못했습니다.

 

주님, 저는 너무나 지쳤습니다.

 

평생 제 힘으로 지탱하려 애썼던 무거운 짐들,

 

무너져 버린 일터의 잔해와 사람들에게 받은 서운함, 그리고 내일에 대한 까마득한 두려움까지—

 

제 하찮은 두 손으로 꽉 쥐고 있던 그 모든 무게를 이제 당신의 제대 발치 아래 내려놓습니다.

 

더 이상 물을 힘도, 불평할 기운도 없습니다.

 

그저 이 거룩한 침묵의 안식처 속에서 당신의 품에 온전히 저를 내던집니다.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주님,

 

세상이 줄 수 없는 이 성스러운 평화로 제 빈 가슴을 채워주셨으니, 이제 저는 혼자가 아님을 믿습니다.

 

당신께서 다시 걸어가라 하시는 그 길을, 당신의 손을 꼭 잡고 겸손하게 걸어가게 하소서.

 

저를 불쌍히 여겨주신 주님, 사랑합니다.”

 

5. 소리

 

질문과 원망이 잦아들자, 그의 영혼 깊은 곳을 난폭하게 뒤흔들던 거친 파도가 거짓말처럼 힘을 잃고 가라앉았습니다. 거품을 내뿜으며 사나운 소리를 내던 감정의 물결이 잦아든 자리마다, 비로소 투명하고 맑은 묵상의 호수가 넓게 흩어져 펼쳐졌습니다. 그 수면은 잔물결 하나 없이 평온하여, 이제는 하늘의 빛을 온전히 담아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동시에, 그동안 민우의 온몸을 짓누르던 성전의 침묵이 그 본색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외면당한 자의 외로움을 가두던 차갑고 막막한 콘크리트 벽의 정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어머니가 아기를 품에 안아 올릴 때 감도는 은은한 온기이자, 만물을 살만하게 보듬는 하느님의 따스한 숨결이 되어 그의 마른 피부와 가쁜 숨결 사이로 깊숙이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숨결이 지친 혈관을 타고 흐르자, 긴장으로 단단하게 뭉쳐 있던 민우의 어깨가 천천히 내려앉았고, 굳게 깨물고 있던 입술의 경련도 마침내 풀어졌습니다. 세상이라는 거친 정글에서 홀로 살아남기 위해 매 순간 곤두세워야 했던 모든 영혼의 감각들이 비로소 무기를 내려놓는 순간이었습니다.

 

생각의 태풍이 꺼지고 세상의 소음이 완벽하게 차단된 바로 그 내면의 빈자리, 깊은 정적의 아주 작은 틈새로 마침내 한 줄기 소리가 스며들었습니다.

 

그것은 공기를 진동시켜 귀로 들려오는 거친 음성이 아니었습니다. 가슴 가장 깊은 곳, 영혼의 기저에서부터 따뜻하게 차올라 온몸으로 번져나가는 묵직하고 나지막한 울림이었습니다. 세상 어떤 미사여구로도 채울 수 없었던 진정한 위로이자, 세상이 결코 빼앗아 갈 수 없는 깊고 부드러운 하느님의 음성이 마침내 민우의 온 가슴을 흠뻑 적셨습니다.

 

‘괜찮다, 내 아들아… 네가 흘린 모든 눈물을 내가 기억하고 있다. 이제는 안심하고 쉬어라.’

 

그 음성이 영혼의 호수 한가운데에 닿는 순간, 수면 위로 유려한 파문이 일어나며 그동안 가슴속을 짓누르던 마지막 앙금마저 깨끗이 씻겨 내려갔습니다. 민우는 눈을 감은 채 깊은 숨을 내쉬었습니다. 그 숨은 더 이상 절규나 한탄이 아닌, 거룩한 평화 속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하느님과의 첫 번째 안식의 숨이었습니다.

 

6. 일상

 

그날 성당 문을 나서자, 냉혹한 현실이 변함없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휴대폰 액정엔 독촉 문자가 쌓여 있었고 통장 잔고는 바닥이었으며,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도 여전했습니다. 그러나 민우는 매일 오후 3시가 되면 홀린 듯 다시 성당을 찾았습니다. 외부가 아닌 내면에서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처음 며칠은 성당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습니다. 눈을 감으면 어김없이 빚과 자책이 떠올라 ‘알바라도 뛰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조급함이 올랐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괘종시계의 째깍, 째깍 소리를 들으며 머릿속 소음을 잠재우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30분을 견디는 법부터 배웠습니다.

 

일주일이 지나자, 불안과 자신의 존재를 분리하는 눈이 생겼습니다. 세상은 그를 ‘실패자’라 불렀지만, 감실의 불빛은 그를 단 한 번도 실패자라 부른 적이 없었습니다. ‘사업은 망했어도 내 존재 자체가 망한 것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깨닫자 가슴에 숨구멍이 뚫렸습니다.

 

열흘째 되던 날, 자신을 배신하고 야반도주한 동업자의 떨리던 소주잔이 잔상처럼 떠올랐습니다. 그 역시 두려움에 영혼을 판 불쌍한 인간이었음을 인정하게 되면서, 그를 향한 증오를 내려놓고 “독기를 거두어 주소서” 기도했습니다. 그날 밤, 민우는 석 달 만에 약 없이 깊은 잠에 들었습니다.

 

보름이 지나자 성당은 더 이상 피신처가 아니었습니다. 예전의 화려했던 성공을 꿈꾸는 대신, 물류 창고의 일용직 일을 시작하며 정직한 하루를 살아갈 겸손한 용기를 얻었습니다. 타인의 시선은 두렵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이 자신을 온전히 수용해 주셨듯, 자신도 무너진 현실을 있는 그대로 안아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매일 오후, 감실등 아래에서 바친 1시간의 침묵은 문제를 없애주진 않았지만, 그 문제를 짊어지고 나아갈 단단한 영혼의 근육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민우의 뺨 위로 툭, 하고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습니다. 그것은 비명의 눈물이 아닌, 세상이 줄 수 없는 깊은 평화의 눈물이었습니다. 성당 밖은 여전히 시끄러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의 가슴은 이미 어떤 풍랑에도 흔들리지 않을 거룩한 침묵의 안식처를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끝-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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