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19일 (월)
(녹)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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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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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11:12 ㅣ No.192540

김건태 신부님_어리석은 자 

 

예수님은 성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세상과 인류의 구원을 통해 그분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그분은 말씀과 행적을 통하여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와 있음을 예고하시며, 우리 모두 이 나라의 구성원이 되기 위하여, 더 늦지 않도록, 회개할 것을 독려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군중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청을 올립니다: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요청 자체가 특별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러저러한 문제, 예를 들어 상거래상의 난제 등에 부닥쳤을 때 도움을 청할 때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 또는 사람들에 의해 한시적인 문제를 해결하도록 위임받은 분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은 가난한 이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이며, 이 일이 가장 중요하며 시급한 일입니다. 이 세상의 재물에 관한 문제로 시간을 허비하거나 더 중요한 문제를 소홀히 할 여력이 없으십니다. 영원한 생명은 재산에 달린 문제, 더 정확하게는 탐욕과 관련된 문제가 결코 아니기에, 예수님의 경계심 촉구는 단호하십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탐욕으로 이 세상의 재물을 축적하기보다는, 하느님 나라 맞이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체험을 통해서,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리석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오로지 권력과 재물과 명예와 쾌락 그 자체에 목말라하는 사람들, 자유가 아니라 방종을 추구함으로써 사회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들, 이웃을 살피는 일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충족하고 여유로운 삶을 향유하겠다는 이기적인 의지 하나로 불타 있는 사람들, 나눔이나 베풂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합법적이라 하더라도 세상의 재물을 즐기는 데만 급급한 사람들 등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세상에 사는 사람이라고는 자기 혼자만이라는 아집과 아울러 내일을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나아가 이들은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불법의 경계를 쉽게 넘어서며, 폭력을 행사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또는 어떤 경우의 우리를 ‘어리석은 자’로 불러 세우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할 말이 없습니다! ‘오늘 밤’은 매일 찾아옵니다, 아니 인생의 매 순간이 ‘오늘 밤’입니다. 그렇다고 초조함과 두려움에 싸여 살아가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지금 어리석음의 세계에 빠져 있다면, 탐욕으로 얼룩진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면, 곧바로 헤쳐 나와 나눔과 베풂으로 진정으로 행복한 삶, 다시 말해서 신앙이 일러주는, 복되고 충만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마음이 읽힐 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안전이 보장되어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인생의 허무와 무상을 상기시키십니다. 죽음은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갑자기 다가오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회개와 기도와 사랑 실천을 통해서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들’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하루, 하느님 그리고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이 참으로 행복한 삶이라는 믿음으로, 탐욕을 털고 나눔으로 무장하여 신앙인의 삶을 뽐내는, 신나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루카 12,13-21: 어리석은 자야!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15절)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며, 재물은 그 생명의 보증이 될 수 없다. 어리석은 부자는 하느님의 주권을 잊은 채 “더 큰 것들을 지어, 곡식을 모아 두어야겠다.”(18절)라고 한다. 그는 자신의 생명과 미래까지 ‘내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20절) 이 말씀은 인간의 어리석음, 즉 하느님을 배제한 자기 확신에 대한 심판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이 너에게 주신 재산을 하느님을 위해 쓰지 않는다면, 그 재산은 너를 해칠 것이다. 네가 가난한 이에게 나누지 않은 것은, 너의 것이 아니라 도둑질한 것이다.”(Sermo 50,6 요약)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인에게 진정한 부유함은 소유의 많음이 아니라, 나눔의 풍성함에 있다. 하느님 안에서 부유한 사람은 자기 안에 머무르지 않고, 자비를 통해 이웃과의 친교를 확장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말한다. “가난한 이의 배는 너의 곳간보다 더 안전하다. 너의 곡식을 땅속 창고에 두지 말고, 하늘에 두어라. 가난한 이의 손이 곧 하늘의 문이다.”(Homilia in Lucam 12,18 요약) 이 가르침은 복음의 중심에 있는 ‘사랑의 경제’를 드러낸다. 즉, 재물은 단순히 소비나 축적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통로로 주어진 것이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루카 16,9) 이 말씀은 재물 자체가 악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을 사랑과 자비의 도구로 바꾸라는 초대이다. 교리서는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특별한 사랑으로 사랑하시며, 그들의 고통 속에서 당신 아드님의 얼굴을 보게 하신다.”(2448, 2449항 참조) 따라서 재물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은 곧 하느님 사랑의 구체적 표현이며, 하늘의 곳간에 보물을 쌓는 길이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은 재물보다 덕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자기 손으로 가난한 이를 돕고, 고통받는 이의 슬픔을 덜어주는 사람이다. 그의 부는 ‘사랑의 기억’ 속에 보존되고, 그가 떠날 때 따라오는 것은 오직 선행뿐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말처럼, “죽은 자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자비는 그를 따라 하늘로 올라간다.”(Homiliae in Matthaeum 79,5 요약) 

 

재물은 우리 손을 떠나지만, 자비는 우리를 하늘 나라로 이끈다. 사람의 생명은 소유의 양이 아니라, 사랑의 깊이에 달려 있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만이 진정한 부자이다. “가난한 이의 눈물이 너의 기쁨이 되고, 그의 미소가 너의 상급이 되게 하여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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