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19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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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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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선 [hsyoonrda] 쪽지 캡슐

11:19 ㅣ No.192541

길 위의 성전




윤홍선

https://m.blog.naver.com/hsyoonrda/224439340566



1. 무료 급식소의 아침


가을바람이 쌀쌀해진 11월의 아침, 수연의 공방 ‘등불’이 있는 골목 어귀의 나눔의 집 무료 급식소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수연은 일주일에 한 번, 공방 문을 열기 전 이곳에서 배식 봉사를 했습니다. 5년 전, 가장 어두운 밤에 성체등의 빛으로 삶을 건져 올린 이후 그녀에게 봉사는 단순한 선행이 아닌 생명의 호흡과도 같았습니다.


스텐 식판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과 국을 담아내던 수연의 눈에, 줄 맨 끝에서 주춤거리는 한 젊은 청년이 들어왔습니다. 얇은 여름 옷가지 하나만 걸친 채 거칠게 터진 손을 문지르고 있는 청년의 이름은 민우였습니다. 낡은 배낭을 짊어진 그의 눈빛에는 세상 전체를 향한 경계심과 깊은 절망이 서려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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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굳게 닫힌 마음


민우는 밥을 받아 들고도 사람들과 떨어진 구석 자리에 홀로 앉아 허겁지겁 국밥을 삼켰습니다.


수연은 그 모습에서 5년 전 성당 담벼락 아래서 세상의 모든 문이 닫혔다고 느끼던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황급히 자리를 떠나려는 민우에게 수연은 따뜻한 두유 한 병을 쥐여주며 나지막이 말을 건넸습니다.


"춥지요? 내일도 따뜻한 국 준비할 테니 꼭 오세요."


하지만 민우는 두유를 가방에 쑤셔 넣으며 차갑게 쏘아붙였습니다.


"동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내일이면 쫓겨날 인생이니까."


민우는 사업 실패와 믿었던 사람의 배신으로 길거리로 내몰린 청년이었습니다. 세상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찬 그의 마음은 단단히 잠긴 성전의 붉은 나무문처럼 철통같이 닫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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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골목길의 등불


며칠 뒤 밤, 공방 작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수연은 빗방울이 떨어지는 골목길 벤치에 웅크리고 있는 민우를 발견했습니다. 고열로 헐떡이며 신음하는 민우를 본 수연은 망설임 없이 그를 자신의 공방 안으로 데려왔습니다.


공방 한구석의 따뜻한 온돌 바닥에 민우를 뉘이고, 수연은 수건을 적셔 밤새 그의 이마를 닦아주었습니다.


새벽녘, 기침을 하며 눈을 뜬 민우는 공방 은은한 목공 조명 아래서 자기 이마의 수건을 갈아주는 수연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두운 공방 안, 목재 향기와 함께 감도는 은은한 불빛은 마치 성당 한구석을 비추는 성체등과도 닮아 있었습니다.


"왜… 아무 관계도 없는 저한테 이렇게까지 하시는 건가요?"


민우의 떨리는 물음에 수연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습니다.


"나도 한때는 세상의 불이 다 꺼졌다고 생각하며 죽음을 떠올렸던 적이 있어요. 하지만 그 밤, 누군가 날 위해 켜둔 작은 불빛 하나 때문에 다시 살았지요. 당신에게도 그 불빛이 전해지길 바랄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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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무를 깎는 시간


갈 곳이 없던 민우는 수연의 공방에서 일을 거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거칠고 불만 가득했던 그의 손길이었지만, 수연은 서두르지 않고 나무를 다듬는 법을 차근차근 가르쳐주었습니다.


"거친 나무도 사포로 결을 따라 다듬다 보면 결국 매끄럽고 따뜻한 결이 나와요. 사람 마음도 똑같답니다."


나무를 깎고 향을 맡으며, 민우의 가슴 속에 쌓여 있던 소음과 분노가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수연이 매일 아침 성당 감실 앞에서 가져오는 그 은은한 평화가 어디서 오는지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민우는 공방 구석에 남은 자재로 작은 십자가 모양의 조명을 조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손가락에 상처가 나면서도 밤늦게까지 나무를 깎아내는 그의 눈빛은 이전의 절망이 아닌 무언가를 향한 열망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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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길 위에 지어진 성전


어느덧 겨울이 찾아오고, 성탄절을 앞둔 주말이었습니다. 수연과 민우, 그리고 나눔의 집 봉사자들은 무료 급식소 앞 마당에 작은 '길 위 나눔 장터'를 열었습니다. 민우가 정성껏 만든 나무 소품들과 십자가 조명들도 장터 한구석을 장식했습니다.


수연은 장터에서 모인 수익금과 따뜻한 목도리들을 추위에 떨고 있는 노숙인들과 홀몸 어르신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순간, 민우는 깨달았습니다. 높은 석조 건물과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있는 성당만이 거룩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상처받은 이들이 서로의 체온을 나누고,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는 이 춥고 가난한 길거리 골목이야말로 주님이 머무시는 진정한 성전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민우는 자신이 만든 나무 십자가 조명에 불을 켰습니다. 붉고 따스한 빛이 길거리 사람들의 지친 얼굴 위로 은은하게 번져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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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빛을 이어가는 사람


봄이 찾아올 무렵, 민우는 수연의 공방을 떠나 다시 세상 속으로 나아갈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는 기술 교육원에 등록해 가구 디자이너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출발하는 아침, 민우는 수연에게 자그마한 나무 조각을 선물했습니다. 감실 옆의 붉은 성체등 모양을 본떠 만든 자그마한 목공예품이었습니다.


"수연 자매님, 자매님이 제게 보여주신 빛 덕분에 제가 다시 살았습니다. 이제는 제가 길 위에서 방황하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작은 등불이 되어주겠습니다."


수연은 민우의 손을 꼭 쥐어주었습니다.


민우가 떠나가는 골목길 위로 따스한 봄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습니다. 수연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평화를 느끼며 나지막이 기도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거리에, 세상의 모든 어두운 모퉁이에 이 거룩한 사랑의 불빛이 영원히 꺼지지 않고 피어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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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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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성전#가톨릭 묵상#가톨릭 영성#단편소설#윤홍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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