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0일 (화)
(녹)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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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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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10:14 ㅣ No.192559

김건태 신부님_깨어 있는 삶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건이나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우리 가톨릭 신앙인들은 주님이 우리를 어디로 이끄시는지는 몰라도, 그분이 이끄시는 곳에서 언제나 그분을 알아보고 그분을 맞이하고 그분을 따라야 합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따라나섰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 하고 이르십니다. ‘허리에 띠를 맴’은 봉사의 옷차림으로서, 즉시 무슨 일이나 행동을 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춘 모습입니다. 이 옷차림은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파스카 축제를 지낼 때 취한 여행자의 차림이기도 했으며, 메시아를 기다리는 몸가짐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등불을 켜 놓고 있을 것’을 명하십니다. 매우 늦은 시각이라 하더라도, 돌아오는 주인에게 문을 바로 열어드리기 위한 준비 자세를 가리킵니다.

사건 속에서, 만남 속에서, 성경 안에서, 그리고 기도 안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함을 말합니다. 주님은 끊임없이 우리가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행동을 보일 것을 요구하십니다. 주님은 당신의 재림을 향해 이미 길을 떠나셨으며, 우리를 당신과 함께 이끌어가시는 분이며, 우리는 그 여정에 서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늘 깨어 준비하고 있는 종들에게 축복의 말씀을 건네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 깨어 있는 종들!” 이 사람들은 육신의 원의와 나약함을 거슬러 싸워 이긴 사람들, 무기력을 종용하고 나태를 부추기는 유혹을 떨치고 일어선 사람들입니다. 깨어 기다리기를 포기하고 싶었던 충동을 이겨낸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주님은 당신이 몸소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을 약속하십니다. 놀라운 약속, 전혀 예기치 못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 속에는 우리는 모두 늘 깨어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마음, 시중을 들고 싶어 하실 정도로 간절한 주님의 바람이 담겨 있음을 확인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예수님과의 만남은 깨어 기다림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즐기게 해주는 평화 속에 머물게 합니다. 최후의 평화, 최후의 행복은 천상 잔치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끝까지 깨어 기다린 사람들은 기다린 분의 식탁에 초대될 것이며, 그 자리에서 주님은 초대받은 사람들을 위해 시중드시며 당신의 영광을 나누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깨어 기도하고 희생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에 소홀함이 없는, 기쁨과 평화 가득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루카 12,35-38: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행복하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35절) 그리스도인의 삶은 기다림의 삶이며, 그 기다림은 ‘주님이 오신다.’는 확신 속에서 깨어 있는 사랑으로 표현된다. 성 그레고리오는 이 구절을 해석하며 이렇게 말한다. “허리에 띠를 매는 것은 욕망을 절제하는 것이며, 등불을 켜는 것은 선행으로 영혼을 밝히는 것이다.”(Homiliae in Evangelia, 13,1 요약) 곧, ‘허리에 띠를 매는 것’은 내적 절제와 순명을, ‘등불을 켜는 것’은 자비와 사랑의 실천을 의미한다. 따라서 깨어 있음은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지속적인 행위이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36절) 이 비유는 일상의 순간 속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영적 민감함을 요구한다. 교리서는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주님께서 오실 날을 기다리면서, 이미 그분께서 오시고 계심을 깨달아야 한다. 그분은 말씀과 성사, 그리고 가난한 이 안에서 오신다.”(671.1088, 2449항 참조) 우리는 매일의 사건과 사람 안에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해야 한다. 이웃을 통해 다가오시는 주님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깨어 있지 못한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너의 문 앞에 서 계신 가난한 이를 외면하지 마라. 그분은 너에게서 빵을 청하지만, 사실은 너를 위해 하늘 나라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Sermo 389,5 요약) 

 

예수님은 놀라운 약속을 하신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37절) 이 구절은 하느님 나라의 역설을 보여 준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기다린 종들을 위해 ‘종의 자리’를 다시 취하신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장면을 이렇게 해석한다. “하늘의 행복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의 음식으로 내어주시는 데 있다. 그분은 우리를 시중들어 당신 생명에 참여하게 하신다.”(Summa Theologiae, III, q.73, a.3 ad 3 의역) 따라서 깨어 있는 자에게 주어질 상급은 하느님 자신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보상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주시는 분이시다. 

 

오늘 복음은 단순히 죽음에 대한 준비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는 ‘종말론적 현재’ 안에서 살아가는 기다림이다. 우리는 이미 구원된 존재로서,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깨어 있는 자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발소리를 듣는다. 그는 세상의 일에 잠들지 않고, 사랑의 불을 꺼뜨리지 않는다.”(Homiliae in Matthaeum, 77,2 의역) 하느님께서 오시는 순간은 특정한 시간이 아니라 사랑으로 행하는 모든 순간이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지금, 여기서” 깨어 있어야 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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