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5일 (일)
(녹) 연중 제30주일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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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승수 신부님 [연중 제30주일 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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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cornelia2] 쪽지 캡슐

07:59 ㅣ No.192651

[연중 제30주일 가해] 마태 22,34-40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인간의 사랑과 하느님의 사랑은 어떻게 다를까요? 인간은 보통 자기 마음에 드는 이를 사랑합니다. 세속적인 조건이 출중한 사람, 자기에게 도움이 되고 기쁨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지요. 그래서일까요? 평생을 함께할 반려자를 찾으러 나간 자리에서 연봉이 얼마나 되는지, 어떤 브랜드 몇 평의 아파트에 사는지,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뭐하는 집안인지 등에 대해서는 꼬치꼬치 캐물으면서, 정작 그의 사람 됨됨이가 어떠한지, 그가 어떤 신념을 가지고 있는지,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이고 가장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랑에 호불호를 따지기 시작하면, 여러 선택지를 두고 저울질을 하게 되면 그건 이미 더 이상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겁니다. 그런 우리에 비해 하느님은 마음이 가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그분께서 더 마음을 쓰시는 이들은 보통 우리 사회에서 소외되고 무시당하는 ‘작고 약한 이’들이지요. 열 손가락을 이빨로 깨물면 다 아프지만, 그 중 상처입고 약한 손가락은 더 아픕니다.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부모로서, 그 아픔을 누구보다 더 잘 헤아리시고 깊이 공감하시는 하느님이시기에 고통과 시련 앞에 더 괴로워하는 아픈 손가락들을 더 따뜻하게 보살피시는 겁니다.

 

오늘의 제1독서에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이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첫째, 이방인을 억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정든 고향을 떠나 먼 타지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무시와 차별 그리고 배척까지 당하는 그들을 자비로이 품으라는 것이지요. 둘째, 과부와 고아를 억누르지 말라고 하십니다. 위험에서 보호해줄 울타리도,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언덕도 없는 그들을 가엾이 여기며 그들의 보호자가 되어 주라는 겁니다. 셋째, 가난한 이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길은 열어주라고 하십니다. 가진 재산이라고는 ‘겉옷’ 한 벌 뿐인 이가 돈을 갚지 않았다고 그것을 빼앗으면 그는 사막의 밤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얼어죽을테니, 부득이하게 그의 생명줄인 겉옷을 담보로 잡는 상황이 생기더라도 밤에는 그 옷을 입고 있을 수 있게 아량을 베풀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이런 하느님의 권고를 무시한다면, 우리의 욕심과 이기심 때문에 우리 사회의 작고 약한 이들이 내뱉는 탄식 소리가 하느님 귀에까지 들어간다면, 그분께서 직접 우리에게 그 책임을 엄중히 물으실 것입니다. ‘왜 내가 넘치도록 충만하게 베풀어준 은총을 이웃과 나누지 않고 독식했느냐’고 말이지요.

 

탐욕의 노예가 되어 멸망하지 않으려면, 사랑을 마음 속에만 간직하고 있지 말고 행동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사랑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 그 방법을 알려 주시지요. 먼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여러가지 모습으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표현하려고 노력합니다. 기도를 열심히 한다던지, 주일 미사를 빠지지 않고 참례한다던지, 교회가 정한 신자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한다던지 하는 방법으로 말이지요. 하지만 그 정도로는 한참 부족합니다. 기도는 내가 하느님께 바라는 바를 이루기 위해 하는 것이고, 미사 참례나 신자로서의 의무 이행은 내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여 구원받으려고 하는 것이니 엄밀히 따지면 나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우리가 당신을 사랑함을 하느님께서 알아주실까요? 많은 분들이 이 ‘방법’ 때문에 하느님 사랑을 어렵게 느끼시지만, 사실 중요한 것은 방법이 아니라 ‘진심’입니다. 하루 종일 사랑을 표현할 방법을 고민한다고 해서 내 마음이 상대방에게 전해지는게 아니지요. 그를 기쁘게 만들어주고 싶어서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하는 행동이 그의 마음에 가 닿는 겁니다. 하느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싶다는 진심을 담아서,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는 게 중요합니다. 나중에 후회가 남지 않도록 말이지요. 그것이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선을 다한다고 하면서 정작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을 향한 사랑은 그분께 다다르기 전에 공허한 메아리처럼 흩어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웃에게 표현하라고 하십니다. “마누라가 예쁘면 처가집 말뚝 보고도 절을 한다”는 속담처럼,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분께서 아끼고 사랑하시는 이들 또한 사랑하는게 당연하겠지요. 하느님께서 당신 외아들을 기꺼이 내어주실 정도로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셨으니, 나도 이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 형제 자매들을 최선을 다해 사랑해야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다를 수 있는 이웃사랑의 최고 경지는 어떤 수준일까요? 바로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자비롭지만 남들에게는 엄격한 성향을 지니고 있기에, 자기도 모르게 내 쪽으로 기울어지는 그 마음으로 다른 이를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내가 이웃에게 베풀 수 있는 최선, 최고의 사랑이 되겠지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웃을 그렇게 사랑함으로써 그 사랑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라고 하십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우리를 하늘나라로 이끄는 구원의 수레에 달린 두 바퀴입니다. 둘 중 어느 한쪽이 빠지면 하느님 나라에 무사히 다다를 수 없지요. 둘 중 하나도 제대로 실천하기 버거운데 둘 다 실천해야 한다고 하니 마음이 부담스럽고 힘드시겠지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각각의 바퀴가 아니라, 두 바퀴를 관통하고 있는 중심축인 ‘사랑’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충실히 섬기는 이는 사람에게 해를 입힐 수 없습니다. 내 곁에 있는 이웃이 바로 하느님의 모상이며 현존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본적으로 사람을 연민하고 존중하는 이, 이웃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알고 다른 이에게 자선을 베푸는 데에서 기쁨과 보람을 느낄 줄 아는 이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려운 교리나 신학을 잘 몰라도, 우리 마음 안에 심어진 ‘사랑’이라는 본성이 우리를 그렇게 이끌어 가는 것이지요. 그러니 우직하고 성실하게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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