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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학교에서 다진 몸을 순회 사목에 쏟은 하느님의 종 김봉식 마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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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걸어간 길] 신학교에서 다진 몸을 순회 사목에 쏟은 하느님의 종 김봉식 마오로 신부
김봉식은 1913년 8월 24일 북간도 훈춘 지방 팔지 육도포의 태평촌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북한과 러시아 사이에서 두만강이 점점 좁아지다가 바다에 이르는 여덟 개 호수 유역이다. 그의 아버지는 평신도 지도자로서 육도포 신자 공동체를 결속하였으며 선교사의 신실한 협조자였다. 1923년 육도포 본당이 설립되자 아버지는 본당 전교 회장으로 활동했다. 경건하고 부지런한 어머니는 많은 식구를 위해 밤낮으로 애썼다. 어릴 적 김봉식은 허약해서 요절한 다른 형제자매들처럼 약골이었다. 그러나 신학교 생활은 그에게 강인한 체력을 길러 주었다. 그는 이 단련된 체력이 쇠진할 때까지 순회 사목자로 살았다.
신학교 체육교육으로 몸을 만들고
김봉식은 고향 마을의 중국인 학교에 다니면서 중국말을 배웠으나, 1923년 태평촌에 안나 학교가 설립되자 그곳에서 공부했다. 그는 재능이 뛰어나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부족한 재능과 병약한 체력 때문에 무엇이든 더 많은 애를 써서 성취하는 덕목을 길렀다.
1928년 9월 그는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간도를 떠나 덕원까지 험난한 여정에 올랐다. 신학생 일행과 용정에서 만나 회령까지 가야 했는데, 여름 장맛비로 철도가 끊겨서 팔지 태평촌에서 용정까지 100km가 넘는 거리를 걸어야 했다. 신학생 35명은 용정에서 삼원봉까지 20km를 걸어가서 그곳에서 하르트만노 에벌 신부의 도움으로 일단 몸을 추스른 뒤 40km를 더 걸어서 늦은 저녁 거의 초주검이 되어 회령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학생들을 기다리던 신학교 학장 안셀름 로머 신부는 기차에 이들을 태워 덕원까지 데려왔다. 번듯한 신학교가 보였으나 아직 성당은 없었다. 1년 전만 해도 완전 공사장이었다.
지금 체육 교육은 매우 보편적이지만, 당시 한국의 전통 교육과 근대 교육과의 차이를 명확히 보여주는 과목이었다. 신학교에서는 단체 생활을 해서인지 체육에 관한 관심이 지대했다. 김봉식은 신학교의 체육 교육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인간에게 있어 육체란 어떤 의미인지,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이해했다. 일단 김봉식은 신학교의 운동시설이 갖춰지는 과정을 기록했다. 그가 입학할 당시 덕원 신학교는 이렇다 할 운동구도 운동장도 없었다. 교장 신부는 운동장 만드는 데에 급급했다. 그는 학교 뒷산을 파내어 운동장을 조성하기로 했는데, 노동의 신성성을 가르칠 겸 자기 것은 손수 만들라는 뜻으로 학생들이 산을 파서 운동장을 만들도록 했다. 하루 30분에서 1시간씩 교장과 학생 모두 괭이나 삽을 들거나 손수레를 끌면서 일했다. 서울 백동 소신학교 때부터 주요 운동이던 축구장과 정구장을 우선 만들었고, 차츰 야구와 농구시설도 설치했다. 여름에는 원산 앞 바다에 나가 오리떼처럼 수영을 즐기고 겨울에는 언 논바닥에서 썰매를 탔다. 이것들이 규칙적 운동의 중심이었는데, 학생들은 한낮에 땀 흘리며 상쾌하도록 뛰었다. 신학생들은 다른 청년들과 여러 번 축구 대회 또는 전국 시합도 했으나 진 적은 별로 없었다.
덕원 신학교 교수였던 비테를리 신부도 이를 뒷받침하는 이론을 펼쳤다. 그는 “육신은 영혼의 기관과 연장이다. 육신이 건장한 것은 영혼에 매우 이익이 된다. 고대인은 ... 건전한 정신은 건전한 육체에 있다라는 격언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선교회에서 육체 생명을 강장케 하기를 권고할 뿐만 아니라, 체육은 천주의 계명이므로 체육을 무시하는 것은 헛된 동기로 육신의 생명을 해하는 것과 같이 제 오계를 거스르는 죄라”고 뒷받침했다. 그러면서 그는 체육은 자기 직업의 본분과 인간 사회와 본국에 대한 본분을 실행할 수 있기에 매우 필요하며 각자에게 맞는 체육 방법이 있다고 했다. 몸으로 일하는 사람에게는 자기 육체 건강을 보존해야 하기에 특별히 휴식과 노동의 변화가 요긴할 것이며,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그 심장과 폐의 근육을 발달시키기 위해 체조와 스포츠가 요긴하다고 했다. 나아가 운동의 이상은 전 육신의 지체를 균일하게 발달시키는 것이며, 또 체육은 단지 육신의 건강과 기능을 발휘하는 데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육체의 아름다움에도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신부는 “돌로 지은 주의 성전도 깨끗하게 꾸미거든 하물며 천주 성전인 생활한 육신을 어찌 깨끗이 꾸미지 않는가?”라고 반문했다(「그리스도 교회의 체육관」, 『신우』 7, 1939). 김 신부가 살아서 왜관에서 비테를리 원장신부를 만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그의 다져온 육체도 공산군의 박해를 피하지는 못했다.
연길 수도원 첫 번째 한국인 성직 지망 수련수사
김봉식 신부의 첫 소임은 연길 대목구 팔도구 본당 보좌였다. 김 신부의 사목 활동은 사제직 시작부터 박해의 연속이었다. 김 신부가 사목을 시작할 무렵은 만주국 일본 괴뢰 정부가 연길 수도원이 설립한 모든 학교를 국유화할 때였다. 훈춘은 일본 관동군 주둔지로 변해 버렸다. 일본군은 살 집을 구했고 사제관마저 접수했다. 1944~1945년 사이에는 김 신부에게 훈춘강 이남 지역의 공소 방문을 군사시설이라는 이유로 금지했다. 일본군은 학교에서 일본어만 배우도록 하고, 한국어 사용을 금지했다. 그래서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한글을 직접 가르치고 세례를 준비해야 했다. 김 신부도 종교 교육을 받기 어려운 아이들을 보살피며 우리말을 가르쳤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붉은 군대가 일본 점령군을 몰아내고 무혈입성 했다. 북간도를 점령한 소련군이 성당을 약탈하기 시작했고, 중국인 공산당원들도 가세했다. 이 시기 무차별적 살해가 자행됐다. 1945년의 어수선한 여름, 김 신부는 도문에 갔다가 뜻밖에 안셀모 벤츠 신부의 생명의 은인이 되기도 했다. 한 소련 병사가 안셀모 신부 사제관으로 총을 들고 들이닥쳤는데, 예상치 않게 김 신부가 보이자 놀라서 도망친 것이다.
팔도구, 훈춘, 도문본당을 거쳐 함경도 지역 순회 사목
이후 김 신부는 훈춘본당 보좌로 발령받아 훈춘의 엑베르토 되르플러 신부에게 갔다. 1946년 훈춘에서 8개월 남짓 주둔한 소련군 부대가 철수했다. 신부들은 3년 반 동안 일본군과 소련군이 차지했던 성당과 사제관, 수녀원을 되찾으려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4월 말 두 신부는 체포되어 도문을 거쳐 연길로 압송됐으나 김 신부는 풀려나 훈춘본당으로 돌아왔다. 당시 중국 공산당은 외국인을 감금했지만 한국인은 딱히 관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공산정권 초기에는 인간의 한국인 성직자들이 신자들을 지도하며 박해를 견뎠다.
한 달 뒤인 5월 말 중국 공산당에 연길 수도원이 폐쇄되고 모든 독일인 수도자가 남평 수용소에 감금되자 김 신부는 도문 성당에서 신자들을 보살폈다. 이곳에는 연길 수녀원 소속 한국인 수녀들이 피신해 있었는데, 김 신부와 함께 소임을 계속했다. 당시 도문에는 인민재판이 두려워 만주에서 피신해 온 한국인이 많았으므로 신자가 늘었다. 김 신부는 정책에 잘 따른다는 인상을 주려고 시 당국에 협조하기까지 했지만 그는 공산당의 실체를 오래전부터 파악하고 있었다.
간 상황을 비판했다(『신우』 창간호 「노시아 지경에서」, 1933). 이는 신부가 되면서부터 공산당의 박해 속에서 사목하고 순교한 그의 정신적 기조가 어떠한지를 잘 보여준다.
훈춘에는 두 명의 수녀가 돌아와 환자들을 돌보고 있었기에 김 신부는 훈춘에도 세 차례나 사목하러 갔다. 며칠씩 묵으며 성사 베풀었는데, 1947년 여름 마지막 방문 때는 수녀들이 간청해서 성체를 훈춘에 모셔 두었다. 그해 7월부터 모든 종교를 반대하는 대규모 선동이 시작되고, 공포 통지가 8개월간 지속되었다. 집회에 참석한 주민 모두는 저마다 종교가 있는지 밝혀야 했다.
1947년 도문과 훈춘 지역을 순회하며 신자들을 돌보던 김봉식 신부는 한국인 수녀들과 함께 덕원 수도원으로 갔다. 김 신부는 고산 본당에 파견됐다. 공산화되고 각 본당은 스스로 생계를 꾸려 나가야 했는데, 고산본당에서는 신부들이 밭일과 농장일을 하고 있었다. 1947년 11월 김 신부가 오자 쿠니베르토 신부는 몇 달간 쉴 수 있게 됐다. 쿠니베르토 신부가 다시 돌아오자 김 신부는 순회 사목자가 되었다. 김 신부는 함경남북도 지역을 순회하며 ‘평신도 묵상회’를 개최, 신자들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맞설 수 있도록 교육했다. 파비아노 담 신부와 아르눌포 슐라이허 부원장 신부가 함께 교육했다. 그러나 공산당의 강론 방해로 결국 평신도 묵상회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김봉식 신부는 다시금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소임을 찾았다. 1949년 1월 20일 신부는 이천에서 임시 본당 신부로 활동했다. 이곳에는 월남하려는 수도자나 신학생들의 왕래가 잦았고, 김 신부가 이들을 도와주었다. 김 신부는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의 일을 계획했다. 김 신부는 이천에 한국인 수녀가 관장하는 분원 설립을 추진하기도 했다. 김 신부는 원산, 덕원, 평양 등지로 다니며 은밀히 성사를 주고 미사를 집전했다. 또한 수도자들도 신부가 숨어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성사생활을 이어갔다.
또 김 신부는 원산에서 지내기 어려운 수녀들을 이천본당에 초대해 본당 일을 돕도록 했다. 1949년 6월에는 김태주 수녀와 전숙렬 수녀가 이천으로 와서 2주간 일했다. 그들 다음에는 이북에 집이 없는 스테파니아 수녀와 후밀리타스 수녀를 본당으로 불렀다.
결국, 1950년 이천본당으로 이사하던 김태주 수녀가 김봉식 신부가 붙잡혀갔다는 소식을 직접 듣게 되었다. 김태주 수녀는 1950년 5월 28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맞춰 이천본당에 갔다가 박삼례 수녀를 만났는데 김 신부로부터 박 수녀와 함께 생활하도록 초대받았다. 그 때는 북한 정권이 비밀리에 남침을 준비하느라 밤낮없이 군수품을 실어 나르느라 교통편을 제대로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김태주 수녀는 6월 18일에야 출발하여 6월 22일 저녁 늦게 이천에 도착해서 신부와 잠깐 인사만 나누고 쉬었다. 24일 새벽에 신부가 보위부에 끌려갔다는 전갈이 왔다. 마지막임을 직감한 김복례 레오날드 수사와 수녀들은 몇몇 교우들과 함께 마지막 성체를 나누어 영했다. 같은 시각에 이북에 남은 신부들은 모조리 잡혀갔다.
1950년 9월 11일 인천에 상륙한 유엔군은 10월부터 북진을 개시했다. 10월 14일 선발대와 함께 존 머피 군종 신부가 원산에 도착했다. 하지만 김봉식 신부와 이광재 신부 바로 직전에 살해당했다. 유엔군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북한군은 10월 9일 원산 교화소에 가둬뒀던 400여 명(530명이라는 보고도 있음)의 인사들을 교화소 뒷산 방공호 둘레에 앉혀놓고 총으로 쏘아서 웅덩이 속으로 떨어지게 한 후 흙으로 덮어놓고 도망가 버렸다.
살육 현장에서 가까스로 살아난 한준명 목사의 말을 듣고 원산본당 신자들이 시쳇더미에서 두 신부의 시신을 찾아냈다. 윤병원 수녀의 동생인 윤 아나다시아와 몇 사람이 나섰다. 김 신부는 의복으로, 이광재 신부는 어릴 적 다친 손가락으로 신원을 확인했다. 김봉식 신부 시신은 등 뒤로 손이 포박된 채 머리에 총상을 입은 모습이었다. 두 사제의 유해는 군종 신부의 손으로 거두어져 원산 성당 뒷동산에 있는 본당 묘지, 간도 개척자 브레 신부의 무덤 옆에 안장되었다. 10월 22일, 존 머피 신부와 패트릭 오코너 신부는 몇 명의 한국인 수녀들과 두 명의 한국인 신학생과 함께 장례미사를 드렸다.
신부가 되면서부터 시대 상황으로 일정한 소속을 갖기 어려웠던 김봉식 신부는 필요로 하는 곳곳을 찾아다니며 사람들이 신앙을 잃지 않도록 격려했고, 생전에 많은 사람에게 살길을 제공했다. 그는 연길 수도원의 첫 성직 수사로서 덕원과 원산 수도공동체의 수도자들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김봉식 신부의 누나 요세파 수녀, 여동생 플라치다 수녀 모두 베네딕도회 수녀였다. 왜관 수도원은 그와 동료들에 대한 시복시성 과정을 밟고 있다.
* 김정숙 소화 데레사 - 프랑스 파리 Ecole des Hautes Etudes en sciences sociales에서 역사인류학으로 박사학위 취득하였다. 영남대 국사학과 명예교수로 현재 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 운영위원, 대구가톨릭학술원 회원, 대구대교구와 수원교구 시복시성위원, 안동교회사연구소 객원연구원, 「교회와역사」 편집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24년 가을(Vol. 67), 김정숙 소화 데레사 교수] 0 7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