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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30년사 편찬사업 구술채록5: 방북과 평화나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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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30년사 편찬사업 구술채록 · 5] 방북과 평화나눔
• 일시 : 2024년 8월 23일 (금) 오후 2시 • 장소 : 서울대교구 이종국관
정세덕 신부 : 사실 저는 북한하고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이에요. 당시 저는 미국의 평화신문에 있다가 한국에 오게 됐고, 미국에서 비자 문제가 있어서 다시 평화신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던 상황인데, 주교님이 민화위의 일을 부탁하셔서 사전에 준비도 없이 민화위에 오게 됐습니다.
그런데 제가 민화위에 와서 처음부터 굉장히 커다란 사건에 직면하게 됐어요. 그전까지만 해도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은 주교님들의 당연직이었습니다. 당시 민화위는 구조적으로 굉장히 커다란 몫을 교구에서 차지하고 있었는데, 실제 하는 일을 들여다보면 남북관계의 정치적인 변화와 사회적인 변화에 맞춰 큰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왜 날 여길 보내실까?”라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사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본당 신부가 적당한 나이가 되면 다 본당 가서 신자들하고 사목하고 싶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민족화해위원회, 그것도 본부장직을 맡기신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연히 제가 민화위에 오자마자 북한에 큰 수해가 났고, 아마도 2010년도엔가 연평도 포격 사건이 나서 북한하고 사이가 굉장히 아주 껄끄러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저는 민족화해위원회가 뭔지, 또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어떤 개념이나 생각,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전혀 갖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본부장직 맡았을 때는 북한의 수해 지원 사업에 대한 이야기가 교회에서 많이 나오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북한 주민이 고통받는 시기에 우리가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여론이 많이 일었습니다. 교회에서는 북한의 수재민을 돕자는 모금 운동이 자연스럽게 벌어졌고, 그 모금된 금액으로 저희가 북한을 지원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실무 책임을 맡게 되면서 통일부, 청와대, 매스컴 사람들과 접촉을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직접 북한의 실무자들이 요청해 왔던 것에 대한 응답을 보내게 됐습니다. 그 응답의 결과로 우리가 “만나서 이야기를 하자.”는 이야기를 했을 때 북한 실무자 측에서 그 당시에는 이례적으로, “그럼 만납시다.” 이렇게 얘기를 해서, 개성에서 북한 사람들을 처음 만나게 됐습니다.
이렇게 제가 한 발 한 발 민화위에 발을 디디게 됐고, 또 급속도로 깊숙이 발을 디디게 됐습니다. 그걸로 인해서 제가 13년이라는 제 황금같은 청춘을 이렇게 민족화해위원회에 바치게 됐습니다. 또 그로 인해서 사제로서의 어떤 소명과 비전, 한반도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 그것으로 인해서 제가 교회에서 민족화해위원회라는 하나의 구성체가 다만 그냥 명분의 구성체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한국 사회의 평화와 세계 평화, 또 더 큰 테마를 생각할 수 있는 단체가 된 것 같습니다.
이병윤 : 밀가루 지원사업을 교회가 결정하게 된 배경과 사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기억나는 에피소드에 대해 들려주십시오.
정세덕 신부 : 제가 민화위에 들어갔을 때는 완전히 남북관계가 단절되어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이 도와주셨는지, 제가 부임한 지 한 달도 안 돼서 북한 사람들과 직접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개성에서 북한 사람들과의 첫 만남에서 굉장히 이상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는 이 사람들이 분명히 신자라고 해서 왔고, 그 이전에 조선가톨릭교협의회라는 단체가 하나의 공식적인 북한의 조직으로서 저희하고 접촉을 해왔는데, 이 사람들의 생각이나 행동 양식에서 하느님을 중심으로 해서 우리가 함께 만난다는 느낌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북한 사람들이 굉장히 깜짝 놀랐어요. 왜냐하면 기존에 신부님들은 북한 사람들을 처음 만났을 때, 다 공손하고 예의 바르게 하셨습니다. 또 북한 사람들에게 애원하듯이 얘기를 하셨는데, 저는 전혀 그런 모습으로 북한 사람들을 대하지 않았습니다.
쉬운 말로 얘기를 하면 저는 “우리가 지원해주는 것은 거저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당신들도 우리가 요구하는 것을 어느 정도는 최선을 다해서 들어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서로 간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정직해야 하고, 확실하게 책임져야 할 것은 서로 책임져야 한다.”는 모습으로 저는 그들에게 계속 요구를 했고 설득하여서 그런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들에게 요구한 것은 우리가 준 2억 원 정도 가치의 밀가루 2백 톤이 어디로 갔는지, 누구를 위해 어디에 갔는지에 대한 정확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식량이 북한에 들어가면 자기네들 손을 떠나 배급소에서 배급을 나누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네들은 알 수 없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데 저는 “그럴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그 당시에 한두 군데 정도 우리가 정확하게 주고 싶은 데를 요청했습니다. 그때 제가 구체적으로 요청했던 데가 안주였습니다.
우리가 상대하는 단체는 조선가톨릭교협회입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한 7급 공무원 정도 되는 사람들과 협의하고 얘기를 하면서 그 사람들 이야기에 쩔쩔매고 또 힘들어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는 당신들하곤 등급이 안 맞는다, 당신들 책임자 불러와라, 그리고 당신들이 하는 일을 책임진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을 데리고 와라, 날 만나고 싶으면 우리랑 관계를 맺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당신들하고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라고 했습니다. 막무가내이기도 했지만, 저는 북한 사람들하고의 대화에서 우리들의 위상이 그 정도에 머물러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고, 그런 입장에서 북한 사람들을 대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로 제가 북한을 그다음 달에 방문하게 됐어요. 사실은 제가 그 일이 있고 나서 저는 ‘하느님이 나를 이것 때문에 부르셨구나. 비록 이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내가 지금까지 신부로서 그냥 내가 하고 싶고 편한 거, 내가 행복한 걸 찾아서 신부 생활을 했지만, 하느님이 나를 당신의 도구로 쓰시고 싶은 소명이 이거였다.’는 것을 제가 북한에 가서 북한의 현실을 보면서 저는 느끼게 됐습니다.
많은 사람이 북한을 방문하고 나서 이야기를 하지만, 제가 사제로서 북한에 가서 북한 사람들의 삶의 현장과 북한의 이곳저곳을 보고 느꼈던 것은 누군가 이 사람들을 위한 도구가 되어 줘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북한이라는 사회를 하나의 정치조직으로 보는 대신 북한에 사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서 하느님이 나를 이 자리에 부르셨다는 생각을 저는 하게 되었죠. 그러면서 제가 ‘아, 이것은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구나. 이 일이 어떤 형태의 일이든 간에 정말 하느님과 신앙을 위해서, 신앙이 인간의 삶을 위한 것이라면 이건 목숨을 걸어야 한다.’라고 생각을 하며 민화위 일을 하게 된 겁니다.
이병윤 : 2012년에 처음 기획한 ‘평화의 바람’ 프로젝트의 참여 대상은 청소년이었습니다. 첫 프로젝트의 참여 대상으로 청소년에 주목했던 이유가 궁금합니다.
정세덕 신부 : 민화위에 와서 제가 북한을 다녀오고 우리 청소년들을 보면서 남북한 문제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의 가족들의 문제인데, 점점 이것이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마치 나하고는 관련 없는 문제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젊은이들도 그런 모습으로 성장하고 변화해가고 있습니다. 저도 군대 현역 생활을 했지만, 군대에 가는 것에 관해서 얼마나 많이 터부시하고, 싫어하고, 또 이것이 마치 흙수저들이나 가는 곳이고, 군대를 빠지는 것은 가진 사람들의 특권인 것처럼, 젊은이들이 인식하는 것에 관해서 참 이것은 커다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군대에 간다는 것이 꼭 전쟁을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가족들을 지키고, 자존심을 가지고 생존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인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에 관해서 저는 조금은 놀랐습니다. 그래서 우리 젊은이들이 생각할 수 있는 방향을 바꿔주면 제일 좋겠는데, 그 생각할 수 있는 방향을 바꾸는 방법이 저는 체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모여서 공통의 주제를 놓고, 체험하며 이야기를 나누면서 평화, 행복, 기쁨, 사랑, 희생과 같이 추상적이지만 실제 우리들의 삶 안에서는 굉장히 현실화해야 하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공유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지금처럼 세상을 살아간다면 이제는 서로가 별개의 외계인들밖에 될 수밖에 없지만, 언젠가 우리가 함께 살아갈 날을 위해 의식과 생각을 바꾸고, 서로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서 젊은이들이 자기의 가치관, 의식, 행동 양식을 바꿀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그 ‘평화의 바람’이라는 아주 작은 것이지만, 저 나름대로는 어떤 의미를 주는 일들을 시작하게 된 겁니다.
이병윤 : 평화나눔연구소의 설립 배경이나, 필요성, 목적에 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정세덕 신부 : 우선 저는 연구소에 주교회의 민화위 연구자, 연구를 맡았던 신자, 박사님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고, 사람들이 변화하고 발전하게 된 것은 연구소가 평화포럼을 시작한 이후부터였습니다. 세미나와 포럼이라는 연구 결과를 가지고 세상에 우리들의 이야기를 드러내놓고 하자라는 의지였는데, 그 대주제를 평화로 잡았습니다. 평화나눔이란 이름은 평화를 실천할 수 있는 역량을 강조하고자 생각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연구소 이름도 평화나눔으로 하게 되었고요.
그 당시 처음에 모였던 박사님들은 나름대로 신자로서 옛날 주교회의 민화위 산하에 있었던 연구단체에서 일했던 분들이었습니다. 그런 모임을 하면서 제가 꿈꾸었던 것은 우리만의 평화를 이야기해서는 평화는 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적어도 평화란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어야 할 것이고, 전 세계 평화에 한반도의 평화가 얼마나 구체적인 축이 될 수 있는지를 유념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저희가 다른 여러 분야의 분들에게 연구소를 소개하고, 함께해 주실 분들을 찾으면서 점점 외연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외연을 확장하기 전에 일반 평신도들을 위한 평화 교육 프로그램으로 평화나눔학교를 한번 실천하려 했습니다. 첫 두 해는 잘 되다가 소재가 고갈되고, 또 당시에 모였던 지도하고 가르치던 분들이 조금 연로하신 분들이다 보니까, 방법론이 구태의연해져서 뭔가 획기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평화나눔학교는 문을 닫게 됐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연구소와 민화위가 하는 여러 행사나 일들이 서로 연계성을 갖도록 하는 와중에 북한 사람들하고의 만남도 성사됐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기록하진 않지만, 제가 북한도 직접 방문을 했었고, 북한 사람들을 중국에서는 거의 두세 달에 한 번씩 이런저런 경로로 조금씩 만나게 되었고요. 그렇게 만나게 됐던 이유 중 하나는 북한 사람들을 위한 실질적인 지원사업을 좀 다른 형태로 꿈꿨던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병윤 : 2015년에 시작한 ‘내 마음의 북녘 본당 갖기’ 운동은 어떻게 계획하게 되신 건가요?
정세덕 신부 : 전국 교구의 교구장님들을 직접 다 만나 뵙고, “우리 서울교구가 이런 일을 하고자 한다. 이것이 통일을 위한 준비운동과 기도 운동에 굉장히 중요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본당이라는 공동체성에 굉장히 주목했어요. 본당이라는 공동체 속에 신자가 10%밖에 안 됐더라도, 신자가 아닌 나머지 90% 다른 사람들과 같이 어울려서 섞여서 살았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적어도 그런 공동체성을 살리기 위해서 본당이라는 의미를 우리는 잊지 않고자 했습니다. 통일에 대해서도 그곳의 공동체성을 되살리는 것이 통일 사업을 위해서도 그렇고, 역사적인 귀결도 그렇고, 또 그 안에서의 삶의 재발견으로서도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요. 그래서 ‘내 마음의 북녘 본당 갖기’ 운동은 비록 우리가 그곳의 출신은 아니더라도, 정말 기도로써 함께 엮인 본당을 만들어서 그곳의 공동체성을 우리가 기억하고 살려내어 실질적인 통일 기도운동을 해나가자는 얘기였었죠.
이병윤 : ‘내 마음의 북녘 본당 갖기’ 운동의 긍정적 영향은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정세덕 신부 : 저는 신학교에 가서 제일 깜짝 놀랐습니다. 미래교회의 주역인 신학생들에게 이야기했을 때, “아,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게 기도구나. 정말 운동을 통해서 우리 마음속에, 내 기도 안에 북한교회가 살아있다면 우리가 북한교회를 살릴 수 있구나.”라고 신학생들이 얘기하는 것을 보고 저는 굉장히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저는 앞으로 젊은 세대가 운동의 취지와 의미에 조금 더 주목해서 좀 더 길게 보고 우리 나름대로 방법을 고민해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신앙인으로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법은 기도부터라고 생각합니다. 자기의 어떤 영적인, 내적 쇄신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지, 그것 없이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노력이 우리 교회 안에서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을 위해서, 한반도의 평화나 남북관계를 위해서, 북한의 가난한 사람들을 주목하고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내적인 일을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젊은 세대 신부님들이 여기에 좀 더 주목했으면 하는 것이 바람입니다.
이병윤 : 앞으로의 민화위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정세덕 신부 : 나름대로 역사를 한번 정리해 본다는 건 중요하지만 그 역사가 열려 있는 역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다음에 어떤 큰 뜻이, 큰마음이 우리에게는 제일 필요합니다. 통일이 어떤 형태로, 어떻게, 언제 우리에게 닥쳐올지는 전혀 몰라요. 그렇지만 우리 교회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북한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언젠가는 우리와 함께 살 사람들이고 우리의 핏줄이다는 것을 절대 잊어버려서는 안 돼요. 제가 북한에 가서도 놀란 것 중에 사람들을 만나면요. ‘고향이 어디냐.’ 하면 ‘우리 할아버지 고향이 울진이에요.’ 이런 사람들 꽤 많이 있어요. 우리도 북한에 고향을 둔 이산가족이 많이 있지만, 북한에도 많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남북이 연관성이 없을래야 없을 수는 없잖아요. 그러면 이 연관성이 지금 정치 체계나 국제관계의 어떤 역할 안에서 하루아침에 다 이루어질 수는 없지만, 우리는 적어도 좀 길게 보고, 큰 뜻을 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할 수 있는 그런 일들을 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와 역사, 2025년 1월호, 구술 정세덕 아킬레오 신부(서울대교구), 정리 이병윤(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0 11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