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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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 신부님_하나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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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4-05-16 ㅣ No.172455

 

오늘 복음은 대사제의 기도 마지막 부분,

즉 예수님께서 모든 믿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신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한 기도'에 이어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요한 17,20) 기도하시는데, 이는 바로 '우리를 위한 기도'입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청하시는 내용이 실로 엄청난 것임을 우리가 더 잘 압니다. 저마다 다른 개성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하나가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가정 생활을 하는 사람도, 공동체 생활을 하는 사람도, 아니, 크고 작은 단체나 모임에라도 이름을 어떻게 걸쳐 본 사람이라면 다 겪어서 아는 바입니다. 여럿이 하나가 되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회의가 들 정도의 아픈 체험이 있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22)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기대와 바람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수준 이상입니다. 성삼위 하느님을 "하나 됨"의 모델로 삼으시니, 황송하기는 한데 과연 가당키나 한 일일까요? 하나가 된다는 건 모두 획일적으로 똑같아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누구도 하나가 되자고 타인에게 자기와 같아지라고 요구할 순 없습니다. 성부와 성자의 하나 됨은 똑같아서가 아니라 각자의 고유성을 사랑하고 품고 포용하는 데서 일어나는 일치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하나 되기를 바라시고 성부께 청하셨다면, 우리에게 그 실현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뜻도 됩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의 기도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실 테니까요.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요한 17,23)
이 말씀에는 하나 됨의 실마리가 들어 있습니다. 천양지차로 다른 우리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고 그분을 마음속 지성소에 모시고 산다면, 예수님 안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연히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는 것이겠지요. 우리 각자의 육신과 재능과 성향 등 저마다 부여받은 껍데기가 다를지라도 서로가 내면에 모신 성삼위 하느님은 같은 하느님, 나뉠 수 없는 한 분이신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분께서 한 분이시니 우리가 그분의 이끄심 대로 따라간다면 서로를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어쩌면 인간의 경우 하나 됨은 '뚝딱!' 하고 완성된 완료적 상황이라기보다, 끝없이 서로를 향해 다가가며 거리를 좁혀가는 무한대의 진행 상태가 아닐까 싶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사이를 좁혀가는 과정에서 서로를 향해 베푸는 사랑과 연민과 수용과 양보와 희생이 각자 내부의 하느님을 드러내게 되고, 거기서 솟아나는 동질감과 일체감이 일치를 희망할 때 하나가 되어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인간의 약함과 한계를 아시는 하느님께는 완성태의 하나 됨 이전에, 일치를 향해 가는 과정까지 포함해 "하나 됨"일 것이라 믿습니다.

제1독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체포된 사도 바오로가 수석 사제들과 최고 의회 앞에 서게 된 사건을 보여줍니다. 무자비한 전쟁에 익숙했을 천인대장이 "바오로가 그들에게 찢겨 죽지 않을까 염려하였다"(사도 23,10)고 하니 그 분위기가 얼마나 험악했을지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바오로 앞에는 당시 종교지배층의 두 권력,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이 포진해 있었습니다. 부활과 천사와 영의 존재를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 여부로 뜻이 갈린 사람들입니다. 첨예한 대립의 현장에 선 사도 바오로의 모습을 관상합니다. 비록 그는 신념이 다른 이들 한가운데 서 있지만, 그의 내면에는 하나이신 성부 성자께서 현존하시고, 모든 믿는 이들이 하나 되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염원이 존재하기에 적어도 바오로를 통해 "하나 됨"의 시동이 걸린 것이라 보여집니다. 결과가 나오기는 요원하나 "나는 죽은 이들이 부활하리라는 희망 때문에 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사도 36,6)라는 증언으로 이미 씨앗은 뿌려졌으니까요.

"용기를 내어라.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위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사도 23,11) 왜 꼭 예루살렘이고 꼭 로마였을까요? 모든 이들의 하나 됨을 향한 예수님의 바람은, 구약에 묶여 눈과 귀를 닫은 유다인들의 땅 예루살렘에서뿐만 아니라, 황제와 이교신을 숭배하는 제국주의 폭력의 온상지 로마에서도 선포되고 증언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상극점에 선 이들이 방향을 틀어 서로 하나 됨을 향해 나아가게 되면 비스무리한 것들을 조금씩 양보하며 이루는 일치에 비해 실로 엄청난 효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천 년 넘게 지난 오늘 우리는 그 열매를 확인하고 있으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하나가 된다는 것, 이것은 선한 지향을 가지고 모인 이들의 영원한 바람이자 숙제이기도 합니다. 또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염원이기도 하고, 우리를 당신 모상으로 지어내신 하느님의 꿈과 기대이기도 할 겁니다. 정치, 종교, 사회, 이념, 성별, 계급, 빈부, 나이, 인종, 민족, 국가, 소속, 직업, 재능, 취미, 성향 등등 미처 다 셀 수 없이 무수한 다양성을 안고, 저마다 자기 자리에서 서로를 향해 나아갈 때 하나 됨의 여정은 시작됩니다. 완성은 내 안의 예수님(과 그분 안의 하느님)과 상대방 안의 예수님(과 그분 안의 하느님)께서 하실 것이고, 이 기도는 이루어지는 중입니다. 그러니 벗님, 용기를 냅시다!
 


▶ 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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