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는 무엇을 청하고자 하는지 생각지도 않고 성당에 나오는지요!
우리가 어떤 사람을 방문하러 갈 때 무엇 때문에 가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비로운 하느님께 흡사 이렇게 말하려는 듯합니다.
"내가 당신께 말씀 드리려고 하는 것은 한두 마디뿐입니다. 빨리 좀 가게 해주십시오......"
나는 자주 이런 생각을 합니다.
즉 우리 주님을 예배하러 나올 때 우리가 산 신앙과 완전히 순수한 마음으로 청한다면
청하는 것을 모두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아시시의 성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 축일:9월17일
*성녀 콜레타 축일:2월7일
이상을 가진 사람은 장애를 극복하며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일도 과감하게 실행한다.
요한 비안네는 이상을 가진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는 사제가 되기를 원했으나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에 신학 공부를 잘 해낼 수가 없었다.
이상을 가진 사람은 장애를 극복하며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일도 과감하게 실행한다.
결국 라틴어 강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으로 신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나 사제가 되고자 하는 꿈을 이루기 위해 그는 개인 교수를 찾았다.
책과의 오랜 투쟁 끝에 요한은 마침내 사제가 되었다.
불가능한 행위를 필요로 하는 상황들이 항상 그를 따라다녔다.
요한이 주임 신부로 있던 아르스 본당에는 편안한 생활에 젖어 신앙에는 무관심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의 이상은 "일부 악마들은 오로지 기도와 단식으로만 쫓아 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엄격한 단식과 짧은 수면을 통해 자신을 이끌어 갔다.
그는 카타리나 랏사뉴와 베네딕타 라르데트와 함께 소녀들을 위해 섭리의 집을 설립했다.
그들은 이 섭리의 집을 만드는 데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하느님께서 도와 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요한 비안네의 뛰어난 점은 고해 신부로서의 업적이다.
겨울에도 그는 하루에 11,12시간 동안 성사를 주었고,
여름철에는 하루에 16시간씩이나 고해 성사를 주었다.
만일 그가 사제의 사명에 헌신적이 아니었다면
매일매일 자신을 아낌없이 주는 그런 일은 결코 견디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곧잘, 하고 싶었으나 할 시간이 없어 하지 못한 일들을 하기 위해 은퇴를 기대한다.
그러나 요한 비안네는 신부는 은퇴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짐에 따라 신자들에게 봉사하는 시간은 더욱 늘어났다.
그는 수면 시간을 짧게 가졌고 자주 마귀의 방해를 받았다.
이상을 가진 사람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가 항상 넘치는 힘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물질적 안락에는 강한 애착을 가지면서도 종교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이
우리 시대의 보편적인 현상인 것 같다.
만일 외계에서 온 사람이 우리를 관찰한다면,
그는 우리가 목적을 향해 가고 있는 순례자라고는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 비안네는 항상 목적을 가지고 여행을 한 사람이었다.
요한 비안네 신부는 전례적인 기도를 권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개인적인 기도는 여기저기 흩어진 밀짚과도 같다.
만일 당신이 그것에 불을 붙인다면 조그마한 불꽃이 일어날 것이지만
밀짚을 다발로 모아서 불을 붙인다면 하늘로 치솟는 기둥 같은 큰 불꽃이 일어날 것이다.
공동 기도는 이와 같은 것이다."
구약성서에 "하느님은 성인들 사이에서 기적을 행하신다"하신 말씀은
모든 성인 성녀를 일컬은 말이지만,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에게는 특히 적중되는 말씀이다.
그는 1786년 5월 8일 프랑스의 리용 근교인 다르딜리 마을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농업을 생업으로 하는, 재산은 별로 없었으나 부지런하고 성실한 부부였다.
아버지는 가난한 사람, 특히 어려운 길손을 받아들이기를 매우 좋아했는데,
그런 손님 중에는 성 베네딕토 라브르도 끼어있었다.
요한 비안네는 이런 훌륭한 부모를 모신 넷째 아들이었다,
그의 부모들은 다른 독실한 신자와 마찬가지로 심히 근심했으며
특히 신부가 없어 미사참여와 영성체를 마음대로 하지 못함을 비통하게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 비안네는 열 한살이 되어 첫 고해를 하고 그 2년후에 첫영성체를 했다.
그는 일찍부터 신부가 되고자하는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해 학비를 조달할 길이 없음을 알고
부모에게 그런 뜻을 전하지도 못하고 매일 매일의 양을 치며 농가의 자녀로서 할 일을 다하며 지냈다.
그는 어떠한 일이든지 다 잘했다. 그러나 신부가 되고가 하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고 날로 더 커갔다.
그래서 그는 17세 되는 때 용기를 내어 부모에게 그 뜻을 표명했다.
물론 부모들의 기쁨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공부를 하기에는 경제적인 여건이 넉넉하지 않아,
그로부터 2년간을 더 집안 이을 돌보는데 소일했다.
그러자 하느님의 안배로 에쿨리 마을의 바레이 신부가 그 자신이 가난한 시골 신부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공부 시켜주기로 했다.
이리하여 비안네가 그 신부 밑으로 가게 된 것은 1805년이었다.
바레이 신부는 손수 비안네에게 필요한 학문을 가르쳤다.
그런데 이 성인처럼 열심한 신부가 가장 정신을 차려 가르친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속죄로서 고행을 하는 것이었다.
요한이 침식을 가리지않고 공부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 후 베리오르 소신학교에 입학했으나, 거기서도 역시 성적은 좋지 않았다.
이해력은 있으나 기억력은 매우 부족했다. 교사들은 그의 성적이 불량하므로 그를 퇴학시키기로 했지만
그의 두터운 신앙심과 품행의 단정함은 전 학우의
모범이 되었으므로 재학하도록 한 것이다. 그 후 요한은 불요 불굴의 정신으로 공부를 해
겨우 신학부에 진급하게 되었고 마침내는 그의 소망인 사제 서품을 받게 되었다.
신부가 된 그는 그의 은사인 바레이 신부의 보좌가 되었다.
바레이 신부는 이미 연로해 때때로 병석에 눕게 되었으나 여전히 엄격한 고행의 생활을 계속했다.
그는 은사와 더불어 무엇이든지 하고, 은사에게 무엇이든지 배우려 했으며,
은사는 제자에게 한 가지라도 더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 두성인의 공동생활은 오래 계속되지 못했으니,
즉 그가 부임한 지 2, 3개월이 되자마자 은사 바레이 신부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영원히 세상을 하직했기 때문이다.
그 후 비안네 신부는 아르스의 주임 신부로 임명되었다.
아르스는 작은 마을인데, 주민들은 다 신자이지만 대개가 냉담하여 판공성사도 보지 않는 형편이었으며,
주일이 되어도 성당에 나오지 않고 예사로 밭에 나가서 일을 하며 세상 쾌락만을 찾는 것이었다.
이 젊은 신부는 이러한 본당 형편에도 조금도 낙심치 않고 오로지 하느님께 의탁했다.
얼마 안되어 그의 친절, 그의 자애심, 그의 훌륭한 행실은
자연히 모든 사람의 마음에 큰 감명을 주게 되었다.
그의 덕에 경탄하게 되고 이어 그의 훈계를 명심하는 자들이 되었으며
그처럼 냉담하던 자들이 차차 신앙심이 깊어져 성실한 신자가 되었다
그들에게 회개의 은총을 주기 위해 비안네 신부는 얼마나 열심히 기도를 하고
얼마나 많은 고행을 하며 초인간적 활동을 했을까?
그의 존엄한 속죄 생활은 증인이 없으면 믿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그는 끊임없이 단식재를 지키며 감자만으로 식사를 했다.
딱딱한 침대에 담요 한벌, 그 나머지는 성당의 장식을 하든가 빈민에게 희사하던가 했다.
그러한 성스러운 신부의 활동은 곧 근방에 알려지게 되고 나중에는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소문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를 방문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성사를 보기 위해 먼 곳에서도 사람들이 모여왔다.
그들 중에는 신앙에 대해 실망한 자, 마음의 고민으로 위로가 필요한 자,
오랫동안 성사를 보지 않고 방탕한 생활로 대죄중에 있는 자들도 무수했지만,
성인 신부를 만나고 난 후부터는 모두 기쁜 마음으로 돌아갔다.
비안네 신부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의 빛으로 사람의 마음속까지 꿰뚫어 보는 은혜를 받았다.
사람들이 어려워서 말을 못하는 것까지 들여다보며
그는 매일 장시간 동안 고해성사를 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떤 날은 15시간, 17시간씩 고해 성사를 주는 일도 있었으며
그에게 성사를 보는 사람은 1년에 평균 2만명에 달했다.
그 지방의 기후는 여름에는 매우 덥고 겨울에는 매우 추웠다.
이러한 일기에도 불구하고 비안네 신부에게 성사를 보고자 하는 신자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혹은 2,3일 동안 줄을 지어 기다리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요한 비안네는 이런 많은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면서도 그의 엄한 고신 극기의 생활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수년 동안 그의 마음을 혼란시키려는 악마의 유혹을 당했다.
그 외의 다른 시련도 닥쳐왔다. 즉 그를 허무맹랑하게 악평하는 투서를 몇 통 받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평상시와 같이 모든 사람들을 동등하게 대하는 태도를 조금도 변치 않았다.
그는 매일 솔직하고 유효한 설교를 하며 충실히 자기 의무를 이행했다.
그러한 생활과 활동은 정말로 하느님의 특별한 도움이 없이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런 것을 알게 되자 불신한 자들도 많이 회개했고 그를 조소하던 자들도
그의 성덕에 감동되어 신덕을 굳게 했다.
요한 비안네는 이렇게 부단한 고행과 활동의 생활을 보내기를 41년간,
1859년 7월 29일엔 열 일곱 시간이나 고해 성사를 주고 성당에서 나오자
"나는 이제 그만이다!"하고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의 건강은 다시는 회복될 수가 없었다.
그는 5일 후에 임종했는데, 감격의 눈물을 머금고 노자성체를 영하고
신자들에게 강복을 주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주교가 왔을 때 그는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2, 3시간 후에 숨을 거두었다.
그는 과로로 운명한 것이었다.
교황 비오 10세는 그를 복자위에,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성인품에 올렸고
본당 사제의 수호 성인으로 선언했다
♬03. Maranatha! Alleluia! 마라나타 알렐루야 - taiz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