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
---|
연중 제18주일 2008년 8월 3일.
마태 14,13-21.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을 시켜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신 이야기였습니다.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것을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았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있었던 사실을 그대로 보도하는 것이라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근을 해결해 주는 분으로 잘 모셨겠지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한두 사람이 한 끼니를 먹을 수 있는 분량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5000명이 먹고도 남았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사실 보도라고만 생각하면, 우리에게 많은 의문들이 생깁니다. 복음서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예수님은 살아계실 때, 무료 급식을 기적적으로 실현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의 먹거리를 기적적으로 해결해 주는 분으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돌을 빵으로 바꾸어 보라며 유혹하는 자의 말에 예수님은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못하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마태 4,4)고 대답하셨습니다. “목숨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혹은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위해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시오.”(마태 6,25)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행복 선언’에서 예수님은 배부른 사람이 아니라 굶주리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를 사실 보도라고만 볼 수 없는 이유는 더 있습니다. 이야기의 무대는 갈릴래아 호수 주변입니다. 그곳에 과연 오천 명도 더 되는 사람들이 운집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던가? 외딴 곳이라고 말하면서 먹고 남은 것을 담은 열두 개의 광주리는 어디서 구했는가? 음향 시설도 없고, 자동 배식 장치도 없는 시기에 오천 명 이상의 사람들을 어떻게 통솔하였으며, 그들에게 어떻게 배식하였나? 오늘의 이야기는 이런 의문들에 답을 제공해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사셨던 인물이고, 우리가 그분을 알 수 있는 것은 초기 교회가 그분에 대해 남긴 이야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과거에 일어난 사실을 정확하게 보도하는 문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에 대해 알아들은 사람들이 하느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전하기 위해 기록한 문서들입니다. 그 안에는 예수님에 대한 회상과 그분이 가르치신 하느님에 대한 말이 있습니다. 그들은 구약성서의 신앙전통 안에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당신을 믿는 백성과 함께 계신다는 모세의 깨달음을 이어받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셨다는 이야기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또한 예언자 엘리사가 보리떡 스무 개로 백 명을 먹였다는 이야기(2열왕 4,42-44)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신약성서 저자들은 이런 구약성서의 언어를 빌려서 그들이 체험한 예수님과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배에서 내려 거기 모여든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는 말로 시작하였습니다. 군중들을 헤쳐 보내어 각자가 자기 먹을 것을 마련하도록 하자는 제자들의 제안에 예수님은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구약성서의 모세와 같이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면, 사람은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고,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을 돌보아 주고 고치는 노력을 합니다. 그 옛날 엘리사 예언자는 보리빵 스무 개로 백 명의 사람들을 먹였습니다. 예수님은 엘리사보다 훨씬 더 큰 분입니다. 그래서 복음서는 빵을 4분의 1로 줄이고 먹은 사람은 50배로 늘렸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면, 사람은 가진 것을 나누어 많은 이를 먹입니다. 그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은 병고와 굶주림을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가엾이 여기며, 고치고 먹이는 은혜로운 하느님을 가르쳤습니다.
각자가 자기 병을 걱정하고, 각자가 자기 먹거리를 해결하는 것이 인류역사가 살아온 질서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이웃의 아픔을 가엾이 여깁니다. 그리고 일용할 양식을 보아도 그것이 하느님이 베푸신 것이라고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이웃과 나눕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살아 있는 생명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에게는 모든 것이 은혜롭게 보입니다. 오늘 복음은 보잘것없는 나눔이지만, 그 나눔으로 우리 주변에 굶주리는 사람이 없어진다고 말합니다. 먹고 남은 것이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는 말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나눔의 실천은 우리의 삶에 뜻밖의 풍요를 갖다 준다는 뜻입니다.
물론 오늘의 복음에는 초기교회가 실천하던 성찬에 대한 기억도 들어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는 말은 초기교회가 성찬을 위해 사용하던 표현양식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의 중심을 이루는 성찬, 곧 성체성사는 나눔의 신비를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이 가엾이 여기고, 베푸시는 분이라, 하느님과 함께 사는 신앙인도 이웃을 가엾이 여기고, 이웃과 나눌 것을 가르칩니다. 우리가 찾는 정의는 사람들에게 무자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받은 만큼 주고 준만큼 받아내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각자가 노동한 만큼 벌어서 그만큼 누리며 사는 것이 정의라고도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잣대로 정의로운 사회, 공평한 사회를 추구하면서, 우리의 기준에 미달하는 사람을 미워하거나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잣대로 정의와 공평을 가르치셨습니다.
복음서가 전하는 최후 심판의 이야기(마태 25,31-46)는 정의와 공평을 위한 하느님의 잣대가 어떤 것인지를 말해 줍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말은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를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 주는 것이 하느님의 정의와 공평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창세기는 하느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사람 안에 당신의 숨결을 불어 넣으셨다고 말합니다. 이웃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 안에 하느님의 숨결은 살아계십니다. 이웃을 가엾이 여기고 축복하며 살도록 요구된 인간입니다. 인간이 지향하는 정의와 공평은 인간다운 사회를 위해 부족합니다. 인간이 인간을 제도적으로 공평하게 하여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겠다던 공산주의는 불과 몇 십 년의 실험 후 인류역사 안에 그 종적을 감춰가고 있습니다. 그 사상은 이웃을 가엾이 여기지도 않고, 이웃에게 축복이 되는 나눔도 외면한, 냉혹한 인간들을 만들었습니다. 하느님은 가엾이 여기며 나누는 따뜻한 숨결을 인간 생명 안에 불어넣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의 이야기는 가엾이 여기는 예수님, 나누어서 모든 이를 풍요롭게 하시는 예수님을 보여주면서, 우리도 배워서 하느님의 자녀 되라고 촉구합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