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지금 독도 문제와 금강산 사건 등 외교의 부재를 확인하는 여러 가지 일로 정부 여당이 사면초가에 몰려있다. 무엇인가 큰 사건으로 드러나야만 그제서 ‘어이쿠!’하는 정치인들과 공무원들. 외국에 살다 보면 그 외교의 부재를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일들이 많이 발생한다.
처음 독일에 왔을 때는 교포들이 아무런 고민 없이 국적을 바꾸는 것을 보면서 조금 의아해 했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날 얼을 오늘에 되살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며 학교를 다녔던 나로서는 그 일이 좋게 보일 리 없었다.
그러나 10년을 이 곳에서 두 아이를 키우며 살다보니, 왜 우리가 대한민국을 버려야 하는지 충분히 알게 됐다. 그것은 독일인들의 외국인에 대한 편견과 취업과 각종 행정절차에서 오는 불이익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것 보다는 뒷받침이 전무한 우리 정부의 책임이 더 크다.
비근한 예로 영국 출입국 시의 비자 문제다. 여기서는 영국으로 갈 일이 서울에서 부산 가는 것 보다 더 자주 있다. 특히 아이를 기르다 보면 많은 학교가 영국으로 수학여행을 가고 있고 또 가까운 나라다 보니 어학연수도 자주 보내게 된다.
그런데 갈 때마다 비자가 문제다. 이미 한국은 영국 출입국사무소에서 무비자 국가로 인정된 지 오래지만 문제는 독일인들이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 영국 비자에 관한 안내 웹사이트를 찾아보면 어디에도 한국이 무비자 국가라는 말은 나와 있지 않다.
당연 아이들을 인솔해 가야하는 여행사 직원이나 교사들에게는 중요한 일이다. 그 문제만 발생하면 학부모와 인솔자간에 입씨름이 시작된다. ‘우리는 무비자 국가이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아무리 설명해 봤자, ‘그런 정보가 어디 있느냐, 내 놓으라’면 말문이 막혀 버린다. 일본에 관해서는 있지만 한국은 없다는 것이다.
얼마 전 어떤 학부모는 수학여행을 준비하는 영어선생님과 비자 문제 때문에 실랑이를 벌이다. 학교가 떠나가도록 대판 싸움까지 한 일이 있었다. 처음엔 비자였지만 이 일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OECD국가’라는 등 ‘한국이 잘사는 나라라는 걸 모르냐’는 등 구차한 설명까지 늘어놓는 단계에 접어들자 자존심에 상처를 입게 되었고,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면서 일어난 일인 모양이다.
이번에 우리 아이도 2주 동안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준비 과정에서 여행사 직원은 또다시 비자 문제를 들먹이며 안내문에는 어디에도 한국이 무비자 국가라는 것이 나와 있지 않으니 비자를 준비하라는 것이다. '이 아이는 이미 여러 번 다녀왔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 불안해하는 여행사 직원도 내심 이해됐다. 매번 일어나는 일이지만 그 때마다 전년도에 문제 없이 버젓이 다녀 온 나조차도 불안해 진다. 정말 맞긴 맞는 건가? 그 사이에 법이 바뀐 건 아닌가.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별 기대도 없이 주독 한국대사관에 전화를 해 보았지만 역시나 여직원은 담당자도 바꾸어주지 않고 ‘아마도 비자가 필요 없을 걸요.’라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담당자가 누군지도 모르겠고 전화도 연결해주지 않으니 목청을 높일 필요도 없을 것 같아 전화기를 내려놓고 스스로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리 저리 인터넷을 뒤지다가 정부 담당자에게 직접 문의할 수 있는 길을 알게 됐다. 인터넷 국민신문고에 글을 올렸다. 내 글의 요지는 ‘우리나라는 무비자 국가라는 것을 왜 독일에서는 알 수 없느냐’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처음으로 민원이라는 것을 올려보며 국민을 위한 정부라고 하더니 우리나라도 많이 변했구나 생각하며 뿌듯하기도 했었다. 또 담당자에게 전달되는 과정이 착착 컴퓨터에 나타나니 더 신뢰가 갔다.
그러나 답변을 보고는 역시 뭐가 달라졌겠나 하는 생각에 화가 더 치밀었다. 담당자가 보낸 메일에는 내 질문요지에 대한 답은 없었고 ‘영국 비자 및 출입국 문제는 영국 정부에서 결정하는 사항이기 때문에 우리 대사관내에서는 구체사안별로 답을 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대한민국인은 무비자로 입국 할 수 있다.’며 자세한 사항은 영국 내무부로 문의하라며 전화번호를 보내왔다.
참 어이가 없었다. “나 보고 영국 내무부로 직접 전화해서 알아보라고? 내가 영어 못한다고 조롱하는 거야 뭐야!” 씩씩대다가 처음부터 제대로 된 답이 오리라 기대도 하지 않았기에 그저 해프닝으로 끝나고 아이는 ‘비자에 관해 문제가 발생할 경우 모든 책임은 부모가 진다’는 확인서에 서명을 하고 무사히 다녀왔다.
비자문제 말고도 독일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보면 처량하기 그지없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먹고 살만하다고 다들 떠들고 있지만,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독일사람들이 보는 한국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한국이란 나라는 여전히 아시아 어느 끝자락에 붙어있는 작은 후진국 정도로 알려져 있고, 그 때문에 교포들은 여러 가지 부당함을 감수하며 스스로 싸워서 해결해야 하는 불편함 속에 살고 있다.
얼마 전 서류를 제출하러 갔던 대학 외국인청에서 또다시 씁쓸함을 맛봐야 했다. 아직도 우리가 제3세계 국가들로 분류된 사무실 문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더 기분 나쁜 것은 문을 열다 옆을 보니 ‘제3세계국가-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아시아(일본 제외)’라고 쓰인 명패였다.
한국이 먹고 살만한 나라라는 것. 이 곳 사람들은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는 것은 거짓말이고 전문적인 지식인층을 제외하고는 일반인들은 모른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삼성 컴퓨터가 최고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 삼성과 LG, 독일에서도 심심찮게 굴러다니는 현대자동차가 한국이란 나라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아는 이는 지금까지 내가 만나 본 사람들 중에서 아주 드물었다. 그것도 한국인과의 접촉을 통해서 알게 된 사람을 제외하면 전무했다고 해야 맞다.
기업이야 당연 ‘어떻게 하면 물건을 더 팔 수 있느냐’에만 골몰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 한국브랜드임을 왜 홍보하지 않았냐고 물을 수는 없다. 물건을 파는 데 부정적 이미지가 된다면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 것은 이 곳에 나와 있는 공무원들의 몫이다. 기업이 만들어 놓은 좋은 이미지라도 이용해서 왜 한국을 제대로 알리지 못하는지, 도대체 그들은 왜 외국까지 나와서 국민의 혈세를 축내고 있는지, 여기 살아보니 더 이해가 안 된다.
대사관에서 교포들을 위해 하는 일이라고는 5,6년에 한 번 여권 연장하는 것밖에는 기억나는 게 없다. 외교관님들이사 높은 사람 만나고 다니는 데 더 관심 있겠지만, 그렇다면 그에 따른 성과는 보여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것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 번 무능한 외교력으로 일어난 사건들로 인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쓸데 없는 데 시간낭비 하지말고 우리나라를 알릴 수 있는 일이 무언지 연구 좀 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후진국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허울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 수 있도록, 또는 그 때문에 훗날 한국을 위해 큰일을 할 수도 있는 자라나는 많은 인재들이 국적을 포기하고 현지인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말이다.
한글학교 운동회나 교민들이 모이는 큰 행사에 나와서 악수하며 대접받으러 얼굴 내미는 대사님과 영사님께 한마디 하고 싶다.
“여기 아이들은 영사가 고개 숙이며 손 내밀어야 하는 높은 신분의 사람이란 사실을 모릅니다. 그런데 나와서 인사하지 않아도 되니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신분보장을 위한 일에나 골몰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