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5일 (월)
(녹)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예수님께서는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자유게시판

동방 박사들의 믿음과 교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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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찬 [ujesus] 쪽지 캡슐

2008-07-30 ㅣ No.122506

거룩한 연옥 영혼들과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하느님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다른 신들을 믿는 사람들과 쉬는 교우들을 위해서 라는 지향을 미사에 참례때 혹은 기도하면서 붙이면 매우 큰 선행과 보속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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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박사들의 믿음과 교훈들

믿음이 죽어가는 것을 느끼는 영혼들아, 저 동방의 현자들은 그들에게 진리를 확증해 주는 것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만 그들의 천문학적 계산과 그들의 청렴한 생활로 완전하게 된 심사숙고의 노력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믿음을 가졌었다. 모든 것에 대한 믿음을, 지식에 대한 믿음, 그들의 양심에 대한 믿음, 하느님의 인자에 대한 믿음을. 지식으로 그들은 오랜 세월을 두고 인류가 기다린 ‘그 별’, 즉 메시아의 별일 수밖에 없는 새로운 별의 신호를 믿었다.
양심으로는 하늘의 ‘목소리들’을 받아서 그들에게 ‘저 별이 메시아가 오신 것을 가리키는 별이다’하고 말하는 같은 목소리를 믿었다. 하느님께서 그들이 목적을 달성하도록 어떻게든지 도와주실 것이라고 믿었었다.

그리고 그들은 성공하였다. 징조를 연구하는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그들만이 이 징조를 알아차렸다. 그것은 그들만이 올바른 뜻을 가지고 하느님의 말씀을 알고자 하는 불안스러운 소원을 마음에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하느님께서 그들을 기억하시고 영원히 구원해 주시기만을 청한다. 이와 같이 그들이 길을 떠나기로 결정할 때에 아무런 인간적인 걱정도 하지 않는다. 우리들 같으면 수많은 핑계를 내놓았을 것이다. ‘말이 서로 다른 나라와 민족들 가운데로 그렇게 먼 여행을 어떻게 할 것인가? 사람들이 내 말을 믿을 것인가? 그렇지 않고 나를 간첩이라고 잡아 가둘 것인가? 사막과 강과 산을 넘고 건너라고 사람들이 내게 어떤 도움을 줄 것인가? 그리고 더위는? 또 고원의 바람은? 늪이 많은 지대에 창궐하는 열병들은? 비가 와서 불어난 강물들은? 서로 다른 말들은? 그리고‥‥또‥‥또’하고 우리들은 이렇게 따진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따지지 않았다. 그들은 진실하고 거룩한 대담성을 가지고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 당신은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우리가 어떤 목적을 추구하고 있는지를 아십니다. 우리는 우리를 온전히 당신께 맡깁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람이 되신 당신의 둘째 위(位)에 경배하는 초인간적인 기쁨을 주십시오.’

그래서 그들은 머나먼 인도에서부터 길을 떠난다. 몽고의 첩첩산중에서 떠난다. 지중해의 파란 심장에까지 흘러가는 오지에서 떠난다. 그리고 산봉우리도, 산림도, 모래도, 대양보다도 더 위험한 물 없는 사막도 그들의 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한다.

별은 그들을 북쪽과 동쪽과 남쪽에서 데려오며, 하느님의 기적으로 그 세 사람을 위하여 같은 지점을 향하여 나아간다. 마찬가지로 또 다른 기적으로 그렇게 오랜 여행을 한 뒤에 그 같은 지점에 모이게 한다. 그리고 오직 한 가지 말만을, 즉 하느님의 말만을 하게 될 천국에서와 같이 다른 사람들의 말을 알아듣고 그들의 말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듣게 되는 은혜가 주어진다.

우리 안에 하느님께 반대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의식하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하느님께서 충실한 아들의 영혼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축복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이러한 감정에서 믿음과 신뢰와 희망의 증거가 오고 영혼의 힘과 인내가 온다.

저 세 현자는 실제로 위대하였다. 우선 그들의 초자연적인 덕행으로 그러하였고, 다음에는 지식으로, 끝으로는 재물로 그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한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에 비하면 자기들은 땅의 먼지에 앉은 먼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유다의 읍들 중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읍내의 초라한 집 앞에 이르러, 그들은 몸을 구부리고 무릎을 꿇고 경배한다. 그 하느님이 저 초라한 벽 뒤에 계시다. 그들은 지극히 열렬한 기도로 하느님이신 아기와 깊이 통할 준비를 한다. 그들은 하느님이신 희생제물을 안고 있는 동정녀의 품이라는 제대를 향하여 간다.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은 인간적인 허영으로 그러는 것이 아니고 왕중왕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이다.

그들 자신이 선물을 가지고 온다. 그래서 그들이 구세주의 가난을 구제하는 처음 사람들이 된다. 내일이면 도망자가 될 그들에게 이 금은 얼마나 유익하겠는가! 멀지 않아 사형을 당하게 될 그에게 이 몰약은 얼마나 의미심장한 것이겠는가! 그의 무한한 순결 주위에서 끓어오르는 사람들의 음탕의 역한 냄새를 맡아야 할 그에게 는 이 유향이 얼마나 경건한 것이겠는가!

교훈이 있다.
‘자기’ 자리에 있을 줄을 아는 요셉의 태도이다. 순결과 성덕의 수호자와 보호자로 거기 있다. 그러나 권리를 부당하게 가로채지 않는다. 경의를 받고 말을 듣는 것은 그의 예수와 더불어 마리아이다. 요셉은 마리아를 위하여 그것을 기뻐하고, 자기가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 되는 것을 상관하지 않는다. 요셉은 의인이다. 둘도 없는 의인이다. 그는 여전히 겸손하고 의롭다.

요셉은 선물들을 다행스러워한다.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 선물들을 가지고 아내와 아기에게 더 안락한 생활을 마련해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폭력으로 인하여 다윗의 상속인들이 왕의 소유지를 빼앗겼기 때문에 그는 보잘 것 없는 목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왕족이고, 왕다운 태도를 보인다.

마지막 교훈은 이렇다.
마리아가 아직 강복할 줄을 모르는 예수의 손을 붙잡고 거룩한 손짓을 인도한다는 것이다. 예수의 손을 붙잡아 인도하는 것은 언제나 마리아이다. 지금도 아직 그렇다. 이제는 예수가 강복할 줄을 안다. 그러나 때로는 강복을 해야 소용이 없기 때문에, 꿰뚫린 그의 손이 지치고 낙담해서 떨어진다. 우리들이 예수의 축복을 망쳐버리는 것이다. 그 때에는 마리아가 예수의 손에 입맞추면서 그 노여움을 억제한다. 어머니이신 마리아의 입맞춤! 그 입맞춤에 저항할 사람이 누구인가? 그런 다음 아주 거역 못할 사랑을 가지고 그 가냘픈 손가락으로 예수의 손목을 잡고 강복하라고 강요한다. 예수는 어머니를 물리칠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수의 어머니를 우리들의 변호인으로 만들려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야 한다.
마리아는 우리들의 모후이기 전에 예수의 모후이며, 우리들에 대한 마리아의 사랑은 예수의 사랑조차도 알지 못하는 관용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말없이 구슬같은 눈물을 흘리며 예수의 십자가를 상기시키고 공중에 십자 성호를 긋게 하면서 우리들의 사정을 변호하고 예수를 설득시킨다. ‘너는 구세주이니, 구하여라!’ 하고.

(C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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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성인의 통공 교리를 생활화 한다면 지상에서 행할 수 있는 선행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성인의 통공 안에 있는 가족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께 찬미와 흠숭을,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와 요셉께 사랑을! ) 

( http://예수.kr   ,  http://마리아.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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