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5일 (월)
(녹)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예수님께서는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자유게시판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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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점수 [sooyaka] 쪽지 캡슐

2008-07-25 ㅣ No.122364

연중 제17주일. 2008년 7월 27일


마태 13, 44-46.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를 밭에 묻혀 있는 보물과 값진 진주에 비유하였습니다.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산다고 말합니다. 보물 혹은 진주는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고 갖고 싶어 하는 대상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발견한 사람은 모든 것을 버리면서까지 그것을 얻으려 노력한다는 비유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소유하고 즐기는 대상이 아니라, 한 번 알면, 가진 것을 모두 버리면서도 추구하는 대상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가르치신 것은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한 이론이나 지식을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은 현세에도 내세에도 하느님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하느님을 자기의 삶 안에 영접하여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의 계명을 잘 지키고 그분에게 잘 바쳐서 그분의 마음에 들어, 그분으로부터 특혜를 받아 잘 사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의 높은 사람들 같이 우리가 교섭하고 환심을 사야 하는 분도 아닙니다. 그런 처세술은 이 세상을 사는 인간에게 지혜로운 길일 수는 있어도 하느님 앞에 요구되는 인간의 자세는 아닙니다. 자기 한 사람 잘 되는 길을 찾는 것이나, 기적을 찾아다니는 것은 그리스도 신앙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지키고 바치라고 요구하지도 않으시고, 몇몇 사람에게 기적하는 힘을 주고, 다른 사람들은 외면하는 분도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하느님이시고, 당신 생명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는 사람과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생명을 희생시키면서까지 하느님의 일을 철저히 실천하셨습니다. 그분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 있었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서 하느님에 대해 알아듣고, 그 하느님의 일을 배워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를 밭에 묻힌 보물 혹은 좋은 진주에 비유하였습니다. 그것의 진가를 알아보는 그리스도 신앙인에게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얻어야 하는 보물 혹은 진주와 같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 신앙인은 가진 것을 다 버리기까지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사람과 함께 있고, 그 함께 있음에 충실하기 위해서도 많은 것을 버립니다. 부모가 자녀들과 함께 있기 위해 한 인간으로서 정당히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버립니다. 부부가 함께 있고, 친구가 친구와 함께 있기 위해서도 많은 것을 희생합니다. 그 희생은 그 함께 있음이 좋아서 자유로이 택한 결과입니다. 함께 있음이라는 보물을 얻기 위해 자유롭게 선택한 일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많은 것을 버리면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음을 택해서 더 자유로워지고 더 풍요로워집니다. 이것은 자유를 잃고 노예가 되는 길이 아닙니다. 노예도 주인과 함께 있기 위해 자유를 버립니다. 교도소에 수용된 사람은 자유를 잃고 교도관과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된 사람은 한 인간 개체로서는 많은 것을 잃었지만, 자녀를 사랑하고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더 자유롭고 더 행복합니다. 부부가 되어 가정을 이루는 사람도 많은 것을 버렸지만, 부부로서 누리는 새로운 자유와 삶의 풍요로움을 누립니다. 친구에게 충실한 사람도 우정을 위해 많은 것을 버렸지만, 친구와 함께 있어서 누리는 자유와 기쁨을 맛봅니다. 하느님의 나라도 우리가 많은 것을 버려서 하느님과 함께 있으며 더 큰 자유를 누릴 것을 요구합니다. 그 자유는 우리가 이기심을 벗어나 더 넓은 시야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살게 해 줍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실천하는 사람이 더 자유롭고 더 큰 풍요를 누리며 삽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어떤 베푸심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의 권력자들 같이, 인간 위에 군림하고 심판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더 자비롭고 더 자유로울 것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하느님의 자비와 자유를 실천하셨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면서 당신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으셨습니다. 바울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자유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하셨습니다.”(갈라 5,1). 이 자유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무상(無償)으로 베푸셨다는 자각에서 시작합니다. 그 자각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애착과 환상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줍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우리의 생명이고 우리의 세상입니다.


우리 삶의 깊은 곳에 들어가면 베풂의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주 힘들게 아주 드물게 베풀지만, 그것으로 행복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베풂의 이야기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면, 우리의 삶은 대단히 살벌합니다. 더 많이 갖고, 더 높아지고, 더 강해지기 위한 경쟁만 보일 것입니다. 베푸심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은 감사도, 용서도, 희생도 모를 것입니다. 그에게는 오로지 경쟁만 있을 것입니다. 어떤 작가의 말과 같이 ‘인간은 두 발 가진 동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나 한 사람 잘 살고, 나 한 사람 많이 갖고, 나 한 사람 도로상에서 빨리 가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세는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베푸심은 하나의 암호와 같이 우리 삶의 깊은 곳에 감춰져 있습니다. 그 암호를 읽어내고 실천하신 예수님입니다. 오늘 복음은 보물 혹은 진주를 발견한 사람은 가진 것을 다 버린다고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이기심, 욕심, 경쟁심 등이 사라질 때 비로소 그 실체를 나타냅니다.


이 베푸심의 발견과 영접은 나의 계획, 나의 노력으로 획득하는 성과가 아닙니다. 베푸심이신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셔야 합니다. 그분의 숨결이 우리 안에 일하셔야 합니다. 이 숨결은 땅속 깊이 묻혀 있는 보물과 같이, 보이지도 소리를 내지도 않습니다. 이 숨결은 하느님의 것이고 우리 삶의 깊은 곳에 흐르는 베푸심의 숨결입니다. 내가 이 숨결을 찾아 돛을 달면, 나도 이 숨결과 함께 흐를 것입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우리의 베풂이지만, 우리도 그 흐름에 합류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보물이나 진주와 같이 숨겨져서 혹은 암호와 같이 해독(解讀)을 필요로 하는 양식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의 숨결이 우리를 움직이도록 비록 미숙한 실천이라도 하는 사람 안에 하느님은 그 생명의 아버지로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십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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