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한국 설립 120주년
( 2008년 7월 22일 )
꼭 120년 전 미명이 동터오는 새벽 5시경이었습니다.
제물포에 자카리아, 에스텔 두 프랑스 수녀님과 비르지니, 프란치스카
두 중국 수녀님이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마르세이유 항구를 떠나 수에즈를 통과하고 인도양의 파도를 넘고 남지나해의 뜨거운 햇살에
현기증을 견딘지, 한 달하고도 20일이 더되는 쉽지 않은 여정이었습니다.
교회의 유익과 이웃의 필요에 응답하면서
낯선 이국땅을 향해 용감하게 나선 첫 선교 수녀님들이 이 땅에 오심으로써
이제 은둔의 땅 조선에서 복음적 수도생활이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대륙에서는 해가 처음으로 돋아나는 이 땅에서, 드디어 하느님의 미소를 반사하며
새 빛을 발하는 이들이 역사의 새장을 활짝 열어젖혔습니다.
그리고 두근거리면 조선 땅에 발을 내디딘 이 언니들의 뒤를 따른
또 다른 부르심이 계속되고 계속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하심이 수도회의 역사 안에 펼쳐졌습니다.
120년의 세월을 지내면서 조선왕조의 끝을 지냈습니다.
엄혹한 일본 제국주의를 넘어섰습니다. 격랑의 한국 현대사도 함께 했습니다.
19세기에서 21세기의 긴 여정동안 한국 교회의 맏딸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면서,
더욱 깊이 깊이 뿌리내리어 저 깊은 곳에서 물을 길어내는 역사였습니다.
_ 120주년 기념 미사 _
자카리야 수녀님의 선교일기의 마지막 대목은 이렇습니다.
‘저는 할 일이 너무도 많고 하느님께 얻어 드릴 많은 영혼이 있는,
이처럼 아름다운 선교지에 저를 보내 주신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저에게 필요한 영적, 물질적 도움을 주시도록 하느님의 섭리에 의지합니다.’
땅 끝으로 알고 도착한 아름다운 선교지였을지 모르지만 할 일은 지천이었습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모르는, 정말 아무 것도 없는 척박한 상태에서
첫 언니들의 소임은 시작되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지만, 하느님을 모셨기에 모든 것을 가진 자의 넉넉함이 거기에 있습니다.
지혜와 경험은 부족했을 것이나, 성령의 이끄심을 신뢰하는 자의 자신감이 거기에 있습니다.
당장 내일 무슨 일이 닥칠지 예상할 수 없었으나,
오늘의 근심은 오늘로 족하다고 하신 주님께 순명하는 자의 자유로움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흔들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뒤돌아 볼 수 없었습니다.
하여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_ 첫 수녀님들이 항해하신 바다를 바라보며..._
_ 첫수녀님들이 조선에 첫발을 디디신 그 곳에서 _
우리는 한국 교회의 맏언니, 맏딸입니다. 맏언니, 맏딸은 자기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맏딸다움은 예쁘게 몸치장함에 있지 않습니다.
맏딸다움은 손이 트는 것을 개의치 않고 찬물에 손을 담글 줄 아는
헌신하는 사랑 안에서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맏딸은 상황에 대한 불평이라곤 모릅니다.
왜 내가 맏이로서 이 힘든 것들을 다 떠맡아야 하느냐고 투덜거리지 아니합니다.
맏딸들은 우리 집이 왜 이모양이냐며 불평할 그 시간에 손길이
필요한 곳을 찾아 부지런히 움직입니다.
맏딸은 동생들의 허물을 들추어 고쳐야한다고 하지 않고
그 허물이 제 것 인양 끌어안고 다독일 줄 아는 넉넉한 품새를 지녔습니다.
_ 수녀원 정동 첫 집 자리에서..._
_ 수녀원 정동 첫 집 순례를 마치고..._
우리 교회의 맏딸로서 120년을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맏딸이었기에 받는 대접보다는 맏딸이었기에 치뤄야하는
눈물과 한숨이 그 시간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희생을 마저 채우는 봉헌된 이의 아픔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아니하고 속으로 끌어들이는 인내가 켜켜이 있을 것입니다.
120년을 기념함은 장하게 살아온 역사에 대한 찬사를 받고자 함이 아니라,
그저 앞으로도 많이 눈물짓고, 안으로 한숨짓고,
티내지 않고 아파하고 말하지 않고 한없이 인내하겠노라 다짐하기 위함입니다.
사람의 힘만으로는 그 못할 짓을 주님 오시는 완성의 그날까지
계속하겠노라는 선포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신 포기할 수 없는 맏딸의 몫이라는 되새김이기도 합니다.
120년의 발걸음을 기념하면서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복음적 요청에
또다시 ‘예’라고 응답하도록 이 시간 기도합니다.
여전히 할 일이 많다하신 주님의 추수 밭에서 하느님을 우러르고 공동체를 지탱하고
이웃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는 이삭 줍는 여인들의 이 삶을 충실히 쉼 없이 살아가기를,
이 시간 열심히 청하도록 합시다.
오직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그것만을 위하여.
_ 120주년 기념미사 남상근 신부님의 강론 전문 _
www.spcseoul.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