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 (제18차) 천호동성당 건축에 대한 소견 ** |
---|
** (제18차) 천호동성당 건축에 대한 소견 ** 조선시대 기와집이 즐비한 명동에 최초의 고딕양식 풍의 종교건물이며 종교단체로서는 최고의 대형성당을 지은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그 주변을 보면 기와집들과 동떨어진 환경인데 왜 이런 건축을 했을까? 그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한 건축이 아닌가 싶다. 아마도 주님의 크신 계명인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의 복음화를 위해 이를 지키고 관리하고 전파하기위한 수단으로 설계하고 건축을 하지 않았을까? 잠시 묵상을 해본다. 천호동성당은 버스가 지나다니는 길에 위치하고 있는 성당인데 성전은 보이지 않는 기이한 성당이다. 랜드 마크가 없는 것이다. 있다면 길모퉁이에 보기 흉한 쓰러져가는 이정표 정도이다. 설계를 보면 보이지도 않은 위치에 그저 상징적인 것을 보여 주기위해 설계했는지 종탑이 있는 것이다. 설계현상경기 확정 전, 사전에 호프 한 잔씩 해서 그랬나 참 이상한 설계이다. 아무리 이해를 하려고 해도 이해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길거리에서 보이는 종탑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주장이다. 지금 3000평의 대지에다 하는 행동들을 보면“사람, 건물, 대지, 돈, 다 버리는 작태이다.” 처음에 그려온 설계는 계단이 없었는데 변경하여 수많은 계단만 증가시켜놓았으며 비효율적인 활용도의 설계로 변경시켜놓고는 그 모양이 좋다고 설계변경비를 증가시켰음은 자명한 사실 일 것이다. 아니라면 이 주장에 답변을 요구한다.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을 고쳐 매지 말라고 하였는데 보기로는 업자들만 좋은 일시키는 신비의 합창으로 보인다. 이 표현이 잘못되었다면 주님과 약속한 토론회를 개최하여 마음껏 토론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열이면 열, 모두에게 설명하면 한결같은 공통분모가 나온다. 다름 아닌 기존의 계단보다 2배 이상 증가한 잘못된 계단설계와 주차설계이다. 버스 도로 길에 세워져 있는 초라한 성당이정표 위치에서 기존의 경사진 언덕을 올라가 관리실 앞에서 지하로 내려가 주차하고 다시 올라와 현재의 경사진 언덕을 다시 내려가는 설계라고 브리핑 하면,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막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흥분의 결정체이다. 그러나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하며 봉사직에 덤비는지는 몰라도 감투싸움에 혈투를 벌이는 데는 관심을 두어도,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하나 직언하는 자가 없는 곳이 이 본당공동체이니 이처럼 소인이라도 표현을 하는 것이다. 소인의 경우는 가톨릭 하면 목욕탕으로 비유를 할 때가 많다. 목욕탕에 가면 알몸이기에 높고 낮음이 없기에 그런 것이다. 무엇이 그리들 높은 것인지 분별력 상실 위기에 처할 때가 더러 있다. 왜 이리 복잡하고 어렵냐하는 것이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말이다. 높으신 분들께 부탁하고자 한다. 알몸이 되어줄 것을 말이다. 지혜스럽고, 아름다운, 보기 좋은 성당건축은 주님의 복음화에 꽃밭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늘 현존하시며 머무르고 계시기에 그렇다는 주장이다. 진솔한 직언은 아름다운 사목자를 보좌하는 첫 번째 지름길이 아닌가 하는 주장에 변함이 없다. 자신의 욕심 하나 때문에 직언보다는 비위 맞추는 쪽에 현란한 감언이설과 행동은 결국 사목자를 크게 상처 주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크게 상처받는 걸로 마무리가 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경고한다. 인의장막을 치지 말고 사표들을 쓰라는 것이다. 나의 존귀하신 하느님께서 우주 만물을 띄어 넘는 초월에서 오셨고, 창조하신 우주만물을 초월에서 보고 계신 것을 어렴풋이나마 깨달을 때, 비로소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의 계명이 무엇인지, 복음화가 무엇인지 교구장님이 그토록 소원하시는 2020복음화의 열정에 동참을 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순명의 복음화 주장에 변함이 없는 것이다. 지역민 대비 6%대의 복음화 율을 20%대로 올리는 지혜스러운 건축을 하면 안 되는 것인가 말이다. 기왕 신축도 아니고 증축으로서 지금까지 본당 실정의 복음화에 대한 개선점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냉철한 심사분석이 있었다면 적어도 30년, 50년, 100년 이상의 단기, 중기, 장기의 미래를 내다보는 동서울 중심축의 복음화 중심성당의 기획, 계획서를 완성하여 건축하면 어디 덧나는 것인가 말이다. 논리에서 벗어나는지 모르지만 이런 현실을 바라볼 때, 자신들도 모르게 교회가 현실의 세계인 물질만능주의시대에 빠져있는 정서의 시간들이 아닌가 하는 주장을 해본다. 요 몇 일간 성당 홈페이지가 검색이 안 된다는 글만 뜬단다. 홍보분과장에게 전화하면 정상이라고 하여 다시 열어보면 말짱 도루묵이란다. 도깨비 방망이가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 소인의 글들에 관심이 많아서 그랬는지 일부 회장단에서 성당홈페이지에 복사해 올라오는 소인의 글을 지우려는 작업들을 하려고 여론몰이를 한 적이 있다한다. 검색이 안 되는 일들이 요즈음에 와서 부척 늘어난 것이다. 아니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 하셨는데 말이다. 이런 시간이 있으면 그 시간에 대안과 계획서를 작성 토론하는 것이 더 현명한 지혜스러운 시간이 아닌가 말이다. 다시 한 번 감추려는 자들에게 경고한다. 이런 일이 발생되지 않도록 말이다. 요즈음 소통이라는 단어가 무성이 사용되고 있다. 이 소통은 다름 아닌 이 천주교에서부터 찾았으면 한다. 주님께서는 늘 현존하시며 비유법을 사용하여 쉬운 말씀으로 조건 없는 사랑과 배려로 소통의 진수를 가르쳐 주시건만 한참을 설명해도 자신의 주장만 옳다하시니 자신의 주장이 옳다면 상대방들이 못 알아듣고 있기에 소통 다시 말해서 과연 미래를 위한 선택이였는지 그 심오한 철학을 발표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강력한 주장이다. 공군사관학교에서 강의한 대한민국 최초의 우주인이자 KAIST 바이오시스템 박사인 이소연 씨가 한 시간여 동안 펼친 강연과 간담회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겸손’에 관한 부분이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남보다 나은 위치에 서 있게 될 때 자신이 최고라는 마음에 휩싸이곤 한다. 나보다 부족한 사람, 나에게 구부리는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구를 내려다보는 위치에서 나보다 높은 곳에 서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음에도 자신보다 더 높은 곳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하느님을 생각했다는 이씨의 말은 우리 자신을 늘 돌아봐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다시 한 번, 주님과 약속한 토론회개최를 요구하며, 각종서증들을 공개해 주기를 말이다. 그리고 목욕탕에 가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그런 기회를 가져줄 것을 말이다. 2008, 07, 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