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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시절의 초록 추억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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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하 [domini0727] 쪽지 캡슐

2008-07-15 ㅣ No.122145

 
  늙으면 추억으로 산다더니 요즘 들어 옛날생각이 부쩍 더 난다.

간혹 앨범을 정리하다보면 남국의 색다른 경치가 배경이 되는 인도네시아에서 보낸 5년간의 흔적들이 자꾸만 눈에 밟혀서 그때마다 잠시 눈을 감고 아련한 그리움에 젖어보곤 한다.

돌이켜보면 38세에서 44세까지. 어쩌면 그때가 내 젊음의 열정을 마지막으로, 그것도 내 일생을 통해 가장 화려한 불꽃으로 불태웠던 황금시기였는지도 모른다.

집안대소사며 아이들 교육문제며 재산관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아내 손에 맡기고 먼 나라에 나 혼자 나가 있었던 그때가 아내가 들으면 좀 서운할지 몰라도 내 일생을 통해서 가장 행복했던 때였던 것도 같다.


다른 생각 없이 오로지 건강한 몸으로 내가 맡은 일만 열심히 하면 되었으니까 그랬을 것이다. 월급날이 되면 월급은 저절로 아내 구좌로 꼬박꼬박 송금이 되고 아내한테서는 3일에 한번씩 아이들 공부 잘한다. 집 샀다. 뭐 샀다하며 계속해서 재산이 불어난다는 좋은 소식만 날아올 때였다.

일생을 통해 만고강산에 걱정할 일이 없이 살았던 때였으니 세상 살며 그보다 더 행복한 일이 어디 또 있겠는가.


죽으라하면 죽는 시늉까지도 할 정도로 착하고 순한 인도네시아 부하들이 골치를 썩이는 일도 크게 없었고 한국처럼 자기는 놀면서 밑에 사람들만 들볶아대는 부류의 상관도 없었으니 하는 일 자체가 즐겁고 편하기만 했다.

아침 8시 반에 출근하면 12시에 점심식사, 그리고는 낮잠 자는 시간,(그 나라는 더운 나라여서 모든 업체가 12시부터 2시까지는 휴무였다) 2시에 다시 사무실에 나가서 5시 반까지 일하고, 6시에 저녁식사를 마치면 그때부터는 자유시간이었으니 한달에 서너 번 원목이나 합판 수출선적 때문에 패킹리스트나 인보이스, 은행 네고서류 등을 작성하노라 야근을 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맡은 일이 비교적 할랑한 편이었다.


제재소와 합판공장 기술자등 60여명의 한국인직원 들 중 본부지역 과장들은 그림에서 보는 전원주택 같은 사택을 한 채씩 배당 받았다. 방2칸에 거실, 그리고 샤워장이 있었고 픔반투라고 하는 현지여인들이 빨래며 청소 등 모든 일을 도맡아 해주었다.

식사는 서울본사에서 중국집주방장 출신 한국인 요리사를 채용하여 보내주어 한국인직원들만 이용하는 한식식당이 있었지만 나는 이른 아침 픔반투가 바닷가에 나가 사오는 금방 잡은 왕새우, 살아서 꿈틀거리는 커다란 새우나 바닷가재를 와사비에 찍어 먹거나 튀겨 먹고, 오토밀과 커피 한잔, 파파야나 망고 몇 조각으로 아침식사를 때우곤 했다. 점심과 저녁은 한국인직원들과 어울려 최 주방장 특기인 해삼탕. 왕게 게살 요리에 때로는 ‘비루빈땅’이란 맥주를 즐기기도 했다.



내가 5년간 기거했던 바뚜리찐 생산본부 한국인 숙소 전경이다. 전면 큰 집이 한국인 식당 나무다리 건너 오른쪽 당구장, 그 뒤 차도 위 오른쪽이 처음 내가 기거 했던 집이고 당구장 앞에 작은 집 2채는 픔반투들 숙소이었다, 그 후 왼쪽에 있는 더 큰집으로 옮겨서 3년을 보냈다. 

 
 

배교수님 사진 올려주셨던 우리회사 Kodeco 승아이아타 캠프 현지인 종업원 숙소 전경이다, 비가 와서 황톳물이지만  물은 맑고 맛있는 민물고기가 지천이었다. 오른쪽 하단에 현지인들이 타는 긴 카누 배가 보인다,
  사진배열이 잘 못 되었는데 내가 근무했던 생산본부 캠프 맞은 편 원주민촌 전경이 마치 그림처럼 아름답다. 

 

본부에 있을 때는 본부지역과 40km 정도 떨어진 ‘승아이아타’ 지역에 자주 갔다. 한국인직원들의 부식을 재배하는 농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애마인 토요다 지프차로 50분 정도, 원목을 수송하기 위해 건설한 밀림 속 황톳길을 달리면 주위에 펼쳐지는 정글의 비경도 멋있었지만 도로 위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커다란 방울뱀을 본다거나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검은 표범 떼를 만나는 스릴도 맛볼 수 있었다.

본부지역이나 승아이 아타 캠프 모두 마찬가지로 현지인종업원들의 숙소는 방 두 칸과 부엌이 10여개씩 일자형태로 늘어서 지은 목조건물이라서 재미나는 에피소드가 많았다.

나무집이라 칸을 구분한 송판사이에 옹이구멍이 난 곳을 이용해 서로 남의 집안을 들여다보는 일도, 얇은 송판 넘어 밤중에 들려오는 야한 신음소리에 그만 10집이 거의 동시에 뭔 일이 난다는 둥......


회사에서는 비록 정글 속에 건설한 숙소였지만 개울물을 끌어올려 정수장에서 깨끗한 물로 만들어 수도파이프를 통해 각 가정에서 물을 충분히 쓸 수 있도록 공급해 주었고 발전기를 돌려서 전열기와 에어컨을 제외한 모든 전기기구를 사용할 수 있도록 전기를 공급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종업원자녀들을 위한 학교를 지어주었고, 인도네시아 정부에서 월급을 주기 이전까지 선생님들 급료를 회사 측에서 부담했다.

진출초기에는 본부지역에 한국인의사가 상주하는 병원도 있었고, 사업소나 캠프별로 회교사원을 지어 주어 그들이 종교생활을 하는데도 지장이 없게끔 해 주었다.


승아이아타 캠프 아래쪽에 큰 개울이 흘러 우기 철에는 흙탕물처럼 물이 뻘겋지만 며칠만 비가 오지 않으면 바닥에 자갈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물이 맑았다. 여인들은 이불보 같은 무명천을 휘감고 남자들이 보든 말든 상관치 않고 그 물속에서 앞가슴을 드러내 보이며 목욕을 하곤 했다.

허리가 날씬한 현지여인들은 특히 눈이 크고 아름다웠다. 길고 진한 속눈썹에 맑은 눈동자.....그러나 코하고 발은 정말로 밉상스럽게 볼품없이 생겼지만 죽으라면 죽는 시늉을 할 정도로 그녀들은 순종형이었다.



내 숙소 앞에서 와띠와 픔반투들이 모여 있기에 한 커트 찍으라고 했다.


그곳에서 5년 동안 내 빨래와 청소, 음식을 만들어주며 함께 지낸 ‘와띠’는 본래 우리회사직원으로 일을 하다가 첫 결혼에 실패한 후 픔반투로 들어온 날씬하고 예쁜 여인이었다. 적당하게 교양도 갖추었고 특히 머리가 좋아서 한국말을 금세 알아들어 나를 놀라게 했다.

그녀는 나보다 여덟 살이나 아래였는데 만 10년 만인 1995년에 내가 그곳을 다시 찾았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고 있었다.

1주일 전 인편을 통해 내가 그곳을 방문한다는 연락을 받은 후부터 잠을 자지 못하고 기다렸다는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남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내 품에 기대며 마스칼라의 먹물이 온 얼굴에 시커멓게 베이도록 한참동안 흐느껴 울었다.

피부색이 다르고 인종은 달라도 피는 똑같이 붉다더니 인정 또한 그런 것이리라.

나 또한 그곳에 갈 때 아내에게 부탁해서 그녀에게 가져다 줄 구두며 가방 등 선물을 잔뜩 사가지고 갔지만 그것으로는 뭔가 부족한 것 같은 그런 마음뿐이었다.


그리운 바뚜리친. 그곳은 이제 인도네시아정부와 계약기간 만료로 인해 모든 한국인이 철수를 해버린 후 인편이 닿지 않아 그녀가 그곳에 아직도 살고 있을지 아니면 딴 곳으로 이사를 갔을지 알 수가 없다. 더구나 그 나라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52세임을 생각하면 지금 58세가 되었을 그녀가 지금까지 세상에 살아 있는지 조차도 확인할 길이 없지만 추억에 젖다 보면 새삼 새록새록 그리워진다.   

 
10년 뒤인 1995년에  다시 그곳을 찾았을 때 예전의 부하(사진에서 오른쪽)는 그곳 책임자가 되어있었다. 중간에 잘 못 배열된 사진의 원주민 촌이 뒤편 貯木場 바다 건너로 보인다 수심이 깊어 1만톤급 배가 정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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