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반이야기/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6번
박창호(음악평론가) 일년 내내 아꼈던, 손으로 수를 놓은 백색 테이블보가 덮인 98년 파리 의 마지막 날의 저녁 식탁. 그것은 그 옆의 조그만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하고 있는 꼬마등과 가물거리는 2개의 장식용 초에 의해 밝혀져 있었다.
냉장고에는 벌써 며칠 동안인가를 식혀 놓았던 값비싼 샴페인이 얼음 으로 채워진 유리 그릇에 담겨 자정의 ‘폭발’을 다소곳이 기다리고 있었다. 식탁 한편에는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아프리카 원산의 새끼 칠면조(pintade : 뺑따드)의 노랗게 구워진 몸통이 작은 식탁을 벌써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연말연시의 희생양인 새끼 칠면조의 얄궂은 운명을 위로하기 위 하여, 한편으로는 모차르트의 식사 반주용 음악을 기대하면서 ‘라디 오 클래식’ 방송 채널에 리시버의 튜닝을 맞추었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아나운서가 틀어주는 곡은 바로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6번 의 느린 악장이었다.
‘Adagio molto espressivo’(느리게 그렇지만 충분한 표현력을 가지 고)라는 연주 지시구가 붙어 있는 이 악장을 마지막으로 들었던 때가 6년 전이었던가? 낭만주의 음악의 화신이었던 베토벤의 음악세계 속 에 어떻게 이와 같은 곡진(曲盡)한 서정을 지닌 악장이 숨어 있을 수 있는가?
작품번호 30인 이 곡이 속하는 문예사조적 시기가 그가 아직 모차르 트의 영향 하에 있던 후기 고전주의임에 틀림없다 하더라도 이 악장 이 지니는 서정성은 고전주의의 형식적 서정성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 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속에 낭만적인 싹을 암암리에 품고 있는 자유 의 서정성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정이 빨리 다가오기만을 기다리면서 긴장감에 의해 건조 해진 목젖을 땅콩과 포르토(porto)의 적포도주로 야금야금 달래고 있 었다. 이윽고 자정이 다 되었음에도 약 7분여의 연주 시간을 갖는 이 악장은 아직도 그 서정의 끈질긴 여운을 깨끗하게 끝내지 못하고 있 었다.
이웃집에서는 벌써 샴페인이 폭발하는 소리가 나고 동시에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데도 나의 집에 온 손님들은 모두가 이 서정의 잠에 취해 샴페인을 폭발시킬 엄두도 못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자 정에 도달한 시간이 더 이상 진행하지 않고 거기서 그냥 멈추어버린 것 같은 순간이었다. 지노 프란체스카티의 연주는 이 서정의 아름다운 여운을 더욱 더 길게 끌어가는 느낌이었다.
이윽고 여운이 꼬리를 감추고 아나운서가 새로운 곡목을 알리려는 순 간 모두는 하나같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라디오는 이제 그만!”이라 고 외쳤다. 아름다운 여운을 몇 분이라도 더 음미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자정이 10여분 지나서야 우리는 샴페인의 ‘폭발’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것도 누군가 나의 서가에서 발견한 하이페츠의 연주로 이 악장을 다시 들으면서 말이다.
〈RCA-VICTOR Gold Seal〉 바이올린 야샤 하이페츠, 피아노 엠마 누엘 베이. 〈CBS- SONY Masterworks Portrait〉 바이올린 지노 프란체스카티, 피아노 로베르 카자드쉬.
아름다운 이웃은 참마음 참이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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