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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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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6주일 2008년 7월 20일.
마태 13, 24-30.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밀과 가라지에 비유하여 설명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좋은 씨를 뿌리셨습니다. 그러나 밀 사이에 가라지도 함께 자랐습니다. 이 이야기는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라는 말로써 가라지는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선하신 하느님이 악의 원인일 수는 없습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의 시선이 가라지의 운명에 가서 멈춰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추수 때에 뽑혀 불에 던져질 가라지의 운명을 말하기 위한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립니다. 가라지의 비극을 말하겠다는 복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하느님이 하시는 선한 일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옛날 사회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이들은 자기보다 낮은 사람들을 판단하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웠습니다. 집안에는 높은 사람, 곧 가장이 있었습니다. 가장은 가솔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였습니다. 로마제국 시대의 가장은 가솔들의 생사여탈(生死與奪)의 권한까지 가졌었습니다. 나라에는 왕이 있고, 왕이 임명한 관리들이 있었습니다. 백성은 그들이 만든 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들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자기의 생존권을 잃는 일이었습니다. 높은 사람들의 ‘통촉하심’으로 살아가는 백성이었습니다. ‘하늘’ 혹은 ‘하느님’은 이 세상의 높은 사람들보다 더 높은 존재로 생각되었습니다. 가뭄, 홍수, 태풍, 지진 등, 천재지변은 모두 하늘이 노하여서 주는 벌이라고 이해되었습니다. 황제나 왕은 백성을 대표하여 그 하늘에 제사를 바치면서, 하늘이 노여움을 풀고 혜택을 주도록 빌고 달래었습니다. 우리나라 강화도 마니산에는 임금이 하늘에 제물을 바치던 제단이 있습니다. 중국의 태산에도 황제가 제천(祭天)의례를 거행하던 제단이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만 불안을 안고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오늘도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성적이 좋지 않은 학생에게 선생님, 직장인에게 직장의 까다로운 상사, 운전하는 사람에게 교통순경, 진단 받으러 병원에 간 환자에게 의사, 사업하는 사람에게 세무서원, 이런 사람들은 오늘도 사람을 불안하게 합니다. 그들이 불안의 원인인 이유는 그들이 우리 의사와는 관계없이 우리에 대해 판단하고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하느님도 우리에 대해 임의로 판단할 높은 분으로 인식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우리의 시선이 쉽게 머무는 곳은 불에 던져지는 가라지의 종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비유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인물은 밀이삭과 더불어 가라지도 자라게 하는 주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살리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생명을 뿌려서 우리를 살게 하신 은혜로운 분입니다. 사람은 사람을 판단하고 버리는 데에 성급합니다.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라고 오늘 비유의 일꾼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가라지를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밀도, 가라지도 살리고 자라게 하는 분이십니다. 가라지가 추수 때 뽑혀서 불태워지는 것은 끝까지 가라지로 남았기 때문입니다. 가라지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면서 땅의 양분을 흡수하여 스스로 살고 자랄 궁리만 합니다. 주변의 다른 생명을 위한 기여가 전혀 없습니다.
이것이 선과 악의 차이입니다. 밀은 양식이 되어서 생명을 살게 합니다. 선은 주변의 생명에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하느님이 선하신 것은 그분이 세상 만물을 존재하게 또 성장 발전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서는 하느님을 생명이라 부르기도 하고, 하느님을 아버지 혹은 사랑이라고도 말합니다. 모두가 하느님이 생명을 아끼고 돕고 성장하게 한다는 것을 담아 전하는 단어들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생존을 받았지만, 주변의 생명을 위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피해를 주는 데에 악이 있습니다. 밀과 가라지는 우리의 생명이 지닌 양면성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밀과 같이 우리 스스로를 제공하여 주변의 생명을 살게 또 발전하게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자녀들이 태어나게 하고, 보살펴 키우며, 그들이 행복하게 살도록 하는 부모와 같은 이들이 있습니다. 그 반면에 우리는 가라지로 행세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불행을 외면하고, 그들을 돕는 데에 인색하면서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과소비도 횡포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뿌리신 생명입니다. 밀로 자라라고 뿌리신 생명입니다. 이웃을 위해 도움이 되어야 하는 우리의 생명입니다. 요한복음서는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던들 그들에게 죄가 없었을 것입니다.”(15,22).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은 다른 생명을 위해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아서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생명을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생활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미사 혹은 성체성사입니다. 우리는 매주일 미사에 참례합니다. 미사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으신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우리가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도 그렇게 내어주고 쏟는 삶을 살겠다는 마음다짐을 하는 것입니다. 가라지로 살지 않고 밀로 살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겠다는 마음다짐입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전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먹을까 혹은 무엇을 마실까 혹은 무엇을 입을까 하면서 걱정하지 마시오. 이런 것은 다 이방인들이 힘써 찾는 것입니다.”(6,31-32).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이 풍부하여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우리의 삶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것보다 더 소중한 일을 해야 하는 우리의 삶이라는 말씀입니다. 자기의 생명 하나가 잘 살아서 행복할 수 있는 가라지가 아니라, 주변의 생명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제공하는 밀이 되어 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쳤습니다. 생명을 뿌리고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을 시야에서 잃지 않고, 그분을 배워서 살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을 자기 한 사람 잘 되게 하는 길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염려하는 것은 가라지의 안전대책입니다. 공동체를 위해 섬긴다고 말하면서, 자기 한 사람 행세하는 길을 찾는 것도 밀로 위장한 가라지의 행태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그분의 생명을 살겠다는 약속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으면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자기 한 사람 더 잘 사는 길을 찾으면서 독야청청(獨也靑靑) 하는 가라지가 아니라, 주변의 생명들이 자라고 편안하도록 스스로를 내어주는 좋은 밀이 되어 살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