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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신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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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신부님
오늘처럼 꽃가루가 날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분이 계십니다. 내가 그분을 처음 만난 것이 이렇게 꽃가루가 날리던 봄날이었어요. 6년 전 어느 봄날 난 성소모임에 관심을 느끼고 그 길이 하느님께서 날 부르시는 길이라 생각하가고 있었습니다. 2년 정도 모임에 나가면서 다음해에는 꼭 입회하리라 맘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 해 봄에 내가 다닌 성소모임에서 성북동 피정의 집으로 피정을 가게 되었습니다.
건물은 오래 됐지만 마당에 흐드러지게 핀 라일락과, 꽃은 이미 졌지만 당당하게 서 있는 목련, 수줍은 듯 핀 민들레... 마치 서울시내를 멀리 벗어나 별장에 온 듯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습니다. 피정이라는 것에 익숙지 않았던 내게 그 피정의 집은 너무나도 포근하고 편했습니다. 그 집에서 가장 바삐 움직이는 분이 계셨습니다. 검은색 수도복을 입고 이리저리 빠른 걸음으로 다니시던 그분은 피정의 집 담당 신부님이었습니다. 그분의 강의는 참으로 재미있었습니다. 만화책을 꼭 봐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주셨고,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꿈이 뭐예요?"라는 질문을 받고 ’내게 꿈이 있었나?’ 하는 표정으로 앉아 있던 우리에게 신부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꿈이 있어야 해요. 어릴 때는 무척이나 큰 꿈을 가지고 있지요. 크면서 그 꿈은 점점 작아지고 어른이 되어서 사회 생활을 시작하면서는 거의 꿈에 대해서 잊어버리게 되죠." 정말 그랬습니다. 어릴 때는 크나큰 꿈을 가지고 시작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 꿈이 언제 있었나 하고 생활하고 있으니까요.
피정 후 전 후유증에 시달렸습니다. 그 예쁜 피정의 집이 보고 싶었던 거지요. 물론 그 신부님도 생각났지요. 하지만 그냥 불쑥 찾아가긴 쑥스러웠어요. 1년 후에 그 수도원에서 하는 행사에 참석했어요. 그 신부님이 참석하리라 생각했던 거지요. 재미있고 즐거운 행사를 다 마쳤는데도 신부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른 수사님께 여쭤보니 오늘 참석을 못했다시더군요.
그렇게 또 다시 1년이 지나 오늘처럼 이렇게 꽃가루가 날리던 날 저는 향이 가득한 프리지아 한다발을 손에 들고 신부님을 찾아갔습니다. 그 피정의 집은 예전처럼 라일락 향을 풍기고 있었고 신부님은 여전히 바삐 움직이시면서 청소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신부님께서는 화단을 청소하실 때도 방을 청소하실 때도 하물며 화장실을 청소하실 때도 고무장갑을 착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맨 손을 변기 깊숙이 넣고 청소를 하시는 게 낯설어서 신부님께 여쭸습니다. 왜 고무장갑을 쓰지 않으시냐고, 신부님께서는 청소하시다가 허리를 펴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장갑을 끼지 않는 이유는 별거 아니야. 피정의 집은 신자들의 봉헌금으로 운영하니만큼 정말 필요한 곳에 써야 하지 않겠니? 내가 장갑 한 켤레를 사서 사용하는 것보다 비누 한 장을 사서 사용하면 훨씬 더 오래 쓸 수 있잖아. 어차피 내 몸은 하느님이 주신 것이고 죽으면 다시 사용할 수도 없을 텐데 지금 이렇게 움직일 수 있을 때 날 만들어서 세상에 보내주신 그분께 작게나마 보답을 해야지.
이런다고 보답이 되는 건 아니겠지만 말이야. 하하, 이건 비밀인데, 나 화장실 청소한 후 가끔 음식도 만들어. 나물도 무치고, 김치도 버무려... 히히히, 음식이 맛있었지? 그 후에도 저는 신부님께 많은 걸 배웠습니다. 고민이 생기거나 힘든 일이 생기면 쪼르르 달려가서 한풀이를 합니다. 어느날 누군가가 너무나도 밉다고 말씀드렸더니 신부님은 기르시던 강아지를 보시면서 제게 물으셨어요.
개가 왜 사람보다 수명이 짧은 줄 아냐고. 전 사람보다 덜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했지요. 그분은 고개를 저으며 말씀하셨어요. "아니야, 사람보다 덜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고, 개들은 이미 사랑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배우는 데 우리 인간들처럼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아서래."
그 말씀에 전 코끝이 찡했습니다. 오늘처럼 이렇게 꽃가루가 날리는 날 조용히 눈을 감고 있으면 라일락 내음이 향기롭습니다. 그리고 그 라일락 향기에서 그분이 풍기시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김영지/서울교구 공덕동성당 가톨릭청년성서모임 대표봉사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