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9일 (수)
(홍)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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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論戰]아래 개신교 목사의 글에 대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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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훈 [saint72] 쪽지 캡슐

1999-11-14 ㅣ No.526

 

 아래의 글을 보고 생각 끝에 한마디 하려고 합니다.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아래 갈라진 형제님의 글을 계속 보다 보니 자꾸 의구심

이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군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저의 심정은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다는 것을 우선

말씀드리며 갈라진 형제들이 가톨릭 동호회에 들어와서 자신의 의사를

표시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단 한가지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은 프로테스탄트들의 내면에

감춰진 의식의 일면을 언제나 드러내주는 언행은 이제 그만 했으면 합니

다. 그래도 혹시 이번에는 아니겠거니 하고 일말의 기대를 했었는데, 루

가복음의 내용이니 착한 사마리아인을 언급하면서 성서를 또 들먹이는군

요. 저도 님이 올리신 글을 보고서 인터넷으로 아름다운 교회인가 하는데

를 가보았습니다만 글쎄요 제가 보기엔 다른 수많은 개신교회 사이트와  

큰 차이점을 못 느끼겠더군요.

 

 뭐 개신교 사이트야 항상 그렇지만 담임 목사의 약력과 인간적인 면모

를 부각시키기 위한 상투적인 언사들이 처음 들어가는 이를 맞이하더군

요. 목사가 서울대 출신이라고 하는 것이 꽤 중요한가 보죠?  저는 전혀

그런 생각을 갖지 않습니다만 학교 간판이 꼭 지성인이라는 것을 보장하

는 무슨 증명서는 될 수 없다는 것쯤은 님께서도 잘 아실테니 긴 말 않

겠습니다.

 

 우리 나라만큼 종교의 왜곡현상이 두드러진 나라도 없을테지만 천주교

신자가 성서에 무지해서 그리고 신앙 체험이 개신교보다 덜하기에 침묵

하고 있는 것은 아니랍니다. 이것은 님이 무언가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

입니다. 이것은 가톨릭이 이 땅에서 그동안 혹독한 박해를 겪은 데 대한

일종의 피해 의식이 남아 있기 때문이지 가톨릭 신앙에 대한 회의가 들

어서거나 성서에 대한 자신만의 독특한(?) 느낌을 갖지 못해서가 아닙니

다.

 

 그리고  님의 글로 미루어 짐작컨대 님은 개신교의 믿음과 천주교의 행

위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개신교의 믿음이 천주교와 비교해서

그러니까 경제학적인 수사를 빌어 표현하자면 개신교는 믿음면에서 천주

교보다 비교우위에 있고 천주교는 행위 면에서 개신교보다 비교우위에 있

다고 생각하고 계시는 것으로 저는 알아들었습니다. 거기에 대한 저를 비

롯한 가톨릭 신자들의 한결같은 대답은 님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No’입

니다.

 

 가톨릭 신앙과 개신교 신앙은 비교의 대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신

앙의 내용은 완전히 판이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신앙’이라는 용어,

’믿음’이라는 용어를 같이 쓴다는 것 한 가지만 같을 뿐 그 내용은 천양

지차가 있기 때문입니다. 님의 그 개신교에서도 바오로 사도는 존경하겠

지요? 바오로 사도를(님의 개신교식 표현으로는 바울이라고 하던가요? 이

것도 개신교의 무수한 오류 중의 하나지만) 이방인의 사도라고 칭하는 것

을 님도 아시겠지요?

 

그럼 그 바오로 사도가 이스라엘을 떠나 그 당시 중근동 지방과 그리스,

로마, 갈라디아에 복음을 전할 때 가죽 장정으로 된 두꺼운 킹 제임스 버

전의 성경을 손에 들고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목청을 높여가며 예수 믿

으라고 소리치며 노상 가두 행진을 했다고 보시나요?

 

 

 이것이 바로 개신교인들의 가장 큰 넌센스입니다.

 

 

성서, 성서 들먹이지만 성서 이전에도 그리스도의 복음은 존재했습니다.

이러한 성서의 성립의 역사를 도외시하는 개신교의 주장은 도대체 무엇

이 먼저인지조차 구분 못하는 정신 박약을 양산해 내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신약 성서의 마지막 저술이 완성된 것은 서기 100년경입

니다. 요한 사도가 요한 묵시록을 쓴 것을 마지막으로 신약 성서의 정경

의 완성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이것에 덧붙여 서기 4세기까지는 수많은 가짜 성서가 횡행하던

시절이었고 이러한 신앙의 위협에 대항해서 신구약 성경의 정경, 위경

판별의  대역사를 가톨릭 교회는 4세기 교황 다마수스의 명으로 당대 최

고의 언어학자이며 성서학자였던 성 예로니모 성인을 통해 정경을 편찬

정리하여 오늘날의 성서 목록과 같은 성서를 편찬했습니다.

 

 이것이 간략한 성서의  역사이며 이러한 성서를  편찬하기까지 성서의

한 장 한 장이 순교자들의 피로 쓰여졌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셨나요? 그

순교자들이 도대체 누구일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네로 시대의 로마 대

박해부터 시작해서 카타콤바의 지하 묘소의 순교자  묘지에 써 있는 글

귀를 님은 보신적이 있습니까?  성서를 지키고 편찬하기까지 목숨을 바

쳤던 이들은 모두 다 가톨릭의  사제들이요, 신자들이었습니다. 그 중에

는 6살짜리 어린아이도  있었으며 나이든 노파에서부터  청춘 남녀까지

실로 가톨릭에서 편찬한 성서는 가톨릭 신자들의 피로써 이룩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당시 성서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렸던 성인들의 후예

들인 우리 가톨릭 신자들에게 성서에 대해 들먹인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까?

 

 

 그러나 이제 와서 개신교가 생긴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최초의 개신교

루터파라고 하더라도 480년입니다. 게다가 우리 나라의 개신교는 모두

다 19세기에 미국에서 생긴 신흥 종교가 수입된 것입니다. 이런 종교를

두고서 그리스도교라고 해도 되는지 역사책을 놓고서 살펴보면 참으로

민망하기 그지없으나 님을 비롯한 신자들이 별 생각없이 개신교 교회에

걸린 십자가 하나만 보고서 그리스도교일 것이라 생각하고서 찾아간 것

일 테니 신자 각 개인의 잘못은 아니겠지요.

 

그런데 가톨릭 신자들인 우리로서는 개신교의 오류에 대해서는 미워할지

언정 개신교 형제 자매들에 대해서는 인간적인 종교심과 아울러 그들의

선의를 의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한심한 것은 개신교가 성립되면서 가톨릭 교회에서 성

서를 가져갈 때 루터는 자신의 주장에 부합하지 않는 7권의 책을 전체

성서 73권에서 빼내어 버리고서 개신교의 성서 66권으로 삼았다는 것과

그 당시 루터는 말로만 외치는 믿음이 아니라 선행을 통한 진정한 믿음

의 증거를 강조한 야고보서를 밀짚보다 더 가치없는 서간이라 하여 대중

앞에서 성서에 붙어 있던 야고보서만을 떼어내어 불살라버렸다는 점 그리

고 자신의 마음에 안 든다고 하여 성서의 명현하고도 분명한 뜻을 개작,

위작을 통해 자기네 개신교에 유리하게 뜯어고쳤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

니까?

 

 그러한 위작과 개작이 무려 3천여 군데가 넘게 자행되었다고 후대의 개

신교 역사가들은 기록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폐해가 우리 나라에서 가톨

릭과 개신교가 함께 번역한 공동 번역 성서에까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공동번역 성서에까지 뻗친 개신교 측의 의도적인 위역은 가톨릭에 관

하여 방의 글을 참조하면 좋을 것입니다.) 자세한 구절 풀이는 여기서

하지 못합니다만 구구절절히 말하거니와 님으로부터 더 이상의 성서 이

야기는 듣고 싶지 않다는 것만 말해둡니다.

 

 님에게는 가톨릭 신자가 자기 교회에서 나온 경전 하나에도 쩔절매는  

어리숙한 이들로만 보이는 모양이나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전혀 그렇

게 생각하지 않으니 가톨릭 신자들이 성서를 잘 모를까봐 걱정하는 그

런 부질없는 일로 그만 에너지 낭비하고 자신의 영혼 구령을 위해 가장

좋은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기를 충고합니다.

 

 

 필자가 알기로는 어지간한 가톨릭 신자라면 물론 전부라고는 할 수 없

어도 대부분의 열심한 신자들은 성서 말씀대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

이 모르게 선행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그 개신교의 하나님 체

험인지 뭐니 하는 식의 지극히 허황되고 주관적인 자기 최면식의 죄사함

받았다고 우기는 마약 중독자적인 환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답

게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제를 통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느

님과 화해하는 하느님의 유일한 참백성들이라는 것을 말해두겠소.  

 

 

그리고 아래 이경용 수사님께서 운영진의 입장에서 하신 말씀에 대해서

무언가 곡해를 하고 있는 듯 하군요. 수사님보고도 성서를 잘 읽어보면

느끼는 것이 있을 것이라구요? 정말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오는군요.

님이 성서 성서 하시는 것은 자유입니다만 제발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

는 식의 그런 몰상식한 언동은 삼가시기를 바랍니다. 앞에서 이미 말했

지만 님이 얼마나 성서를 보고서 그런지 모르나 님이 보는 그 성서가

도대체 누가 만든 것인지 알고서 하는 이야기입니까? 성서의 역사에 대

해서 자세히 공부나 해보고서 이것을 가톨릭 신자들에게 와서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순전히 님의 지적 수준을 의심해 볼 수

밖에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하긴 개신교 근본주의자들 중에는 택시 운전을 하면서 신부님이나 수녀

님이 타시면 자기 교회의 목사, 전도사의 성서에 대한 설교를 한번만 들

어보면 믿음에 대한 확실한 확신이 생긴다고 자기 교회에 와서 목사님한

테 와서 성서 공부해보라고 권한다니까 님의 그런 발상이 새로울 것도 없

습니다만 왜 그리도 무지하고 어이없는 발언으로 일관하는지 정말 한마디

로 답답할 뿐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이것이 님의 인격에 대한 비난은 아닙니

다. 단지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오염시키는 개신교라는 종교가 혐오스러

울 뿐입니다. 사람들의 정신을 타락시키고 좀먹게 하는 단체가 종교의

이름으로 오류를 진리라는 가면을 씌워 포장 판매하는 곳에서 길들여진

가련한 이들을 생각하면 하느님께서 어떤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먼저 님의 종교를 이렇게 거론한 것이 님의 인격에 대한 비난은 아니라

는 점을 거듭 밝히며  이것은 진리는 오직 하나이며 진리 그 자체이신

하느님에 의하여 언제나 진리는 오류를 물리칠 권한을 부여받았기에 하

느님의 유일한 진리를 말하고 있는 가톨릭에 대한 그 어떤 반대도 의혹

도 진리의 이름으로 반대하며 그 오류를 철저히 검증해 뿌리채 뽑아 버

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남용도 아니요, 더더욱 광신적인

행위로 오해받을 수도 없는 하느님께로부터 부여받은 가톨릭 신자의 신

성한 의무인 것입니다.

 

 

 아무튼 님의 글에 대한 우리 가톨릭의 입장은 간단 명료합니다. 진정으

로 도움을 원한다면 개신교인들 가운데에서 도움을 청하시오 그러고 나

서 형제애적인 차원에서 도움을 가톨릭 신자에게서 구한다면 그것은 용

납될 수 있는 일이오.

 

 단, 만의 하나라도 그러한 빌미로 가톨릭  신자를 유인해서 성경을 같이

공부하자거나 가톨릭 신앙에  대해 어떤 의심을 불러일으켜 개신교로의 개

종을 하게 할 불순한 의도라면 아예 처음부터 단념하는 게 님의 영혼 사정

을 위해서도 좋을 것이오.

 

 개신교야 아무 개신 교회나 가도 상관이 없겠지만 또 목사나 교인들이 마

음에 안 들면 교파를 자기 마음대로 이리 저리 바꿔서 다녀도 그것이 오히

려 당연한 것이지만 가톨릭에서 세례받은 신자들이 개신교 교회에 가서 예

배에 참석한다든지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대죄이기 때문이오. 더구나 가

톨릭 신자를 유혹해서 개신교로 끌어들이는 일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용서받

을 수 없는 가장 큰 죄악이라는 것을 명심하기를 바라오.

 

 

한 가지 더 이야기 할 것은 이곳에 오는 이가 개신교인들만은 아닌만큼

개신교의 주관적인 성서 해석을 가지고 가톨릭의 진리를 혼동하게 하지

마시오. 더 이상 개신교의 얼토당토 않은 성서 해석과  주장으로 가톨릭

동호회에서 여러 사람 피곤하게 하지 말기를 바라오.

 

 

마지막으로 님의 착한 사마리아인의 해석에 대해서 말하면 개신교인들

에게는 가톨릭 신자가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는 것이 아니겠소, 물론 가

톨릭 신자에게는 그 반대로 개신교 신자가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도

있겠지요. 단 개신교 신자가 성서를 가톨릭 신자에게 들이밀지만 않는다

면 말이오.

 

 

항상 말해두는 이야기지만 개신교의 교리나 주장, 성서해석에 가톨릭 신

자들은 관심이 아예 없다오. 왜냐하면 모두 다 우리 가톨릭에 원래 있던

것이니까 님은 애석하게 생각하겠지만  그렇소.

 

 

 한 가지 간단한  비유를 들어볼까요?

 

 누군가 님에게서 빌려간 책을  님이 보는 가운데 장황하게 떠들며 자랑하

면 님은 그를 뭐라고 생각하겠소?  

 

 

 

그러니 가톨릭 신자가 왜 그토록 행동과 실천을 하는 데 있어 개신교인들

보다 나은지 조금은 궁금증이 풀렸으리라 생각하오.

 

 

 

 개신교의 오류를 자꾸 지적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요. 옳은 길로 가라는

것이오. 왜냐하면 그 종교의 신조가 올바르지 않다면 결국 그 피해는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그 믿는 사람들과 이웃하고 있는 사람들의 몫이 될

것이고 그 대상에서 가톨릭 신자들도 예외는 될 수 없기 때문이오.  

 

개신교의 신조가 개인의 주관적 체험만을 유독 강조하기에 일어나는 문제

점은 신앙의 바탕으로서 객관적으로 건전하고 참된 신조(信條)의 중요성을

너무나 소홀히 여긴다는 점이오.

 

 이는 행위가 사상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탓이오.  

만일 생각이 틀렸다면 그의 행위도 다 옳을 수는 없으며, 그 생각의 결

점을 어느 모로든지 꼭 드러내고 만다는 영원 불변의 진리를 깨닫게 되

기를 바랄 뿐이오.

 

 

마지막으로 성서를 유난히 들먹이기 좋아하는 개신교 신자들이 이곳에

자꾸 들어오는 이유가 필자로서는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일이기에 다

음의 성서 구절을 들어 한 마디하는 것으로 필자의 두서없는 넋두리를

마칠까 하오.

 

 

개신교에서는 성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누구나 동의하는 것이오. 신비

가 없는 대표적 계시 종교는 이 세상에 두 가지가  있소. 하나는 이슬람

이고 다른 하나는 개신교가 그렇소.

 

 사람들을 어디로 인도해야 될 지 모르거나  ’신비’에 대한 개념이 아예

없는 ’눈먼 인도자’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다음의 말씀을 상기해 보기 바

라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하늘나라의 문을  닫아 놓고는 사람들을 가로막아  서서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못 들어가게 한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겨우 한 사람을 개종시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

 

다가 개종시킨 다음에는 그 사람을 너희보다  갑절이나 더 악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고 있다. 너희 같은 눈먼 인도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대해서는 십분의 일을  바치라는

 

율법을 지키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대수롭

 

지 않게 여긴다. 십분의 일세를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실천해야 하지 않겠느냐? 이 눈먼 인도자들아, 하

 

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그대로 삼키는 것이 바로 너희들이다."   

 

 (마태 23, 13-16, 23-24)

 

 

 

 주님은 ’눈먼 인도자’들에게 다시 한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소경이 어떻게 소경의 길잡이가 될 수 있겠느냐? 그러면 둘 다 구덩

 

 

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루가 6, 39)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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