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3일 (목)
(녹) 연중 제7주간 목요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따뜻한이야기 신앙생활과 영성생활에 도움이 되는 좋은 글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최창정 요아킴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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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철 [wiseycj] 쪽지 캡슐

2003-10-06 ㅣ No.9318

 

 

 내가 최신부님을 처음으로 만난것은 지금부터 40년이 다 되어가는 먼 옛날,1965년 9월의

 

어느날 이었습니다. 월남으로 향하는 맹호부대 용사를 가득싣은 미국 해군의 대형

 

병력수송선 <베이 릿지>호의 후미 갑판에서였습니다. 늦여름의 뜨거운 햇볕이 출렁이는

 

파도위에 금빛으로 춤을추고, 우현으로는 멀리 내나라 땅 제주섬의 아름다운 모습이 아득히

 

보이고 있었습니다. 울적한 마음과 슬픈 생각에 잠겨 나는 혼자 담배연기를 내뿜고

 

있었습니다.

 

"내가 살아서 다시 고국으로 돌아올수 있을까? 제대로 작별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겨두고온 아내와 두 아들이 지금쯤 무얼하고 있을까? 고향에 계신 부모님과 형제들도

 

모두 무사하신지? 한참이 지나고 누군가가 내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얼굴이 나처럼 까맣고

 

깡마른 체구에 작업복 깃에는 대위 계급장과 군종병과 벳지인 십자가가 붙어있었습니다.

 

눈빛이 유난히 빛나고 있었습니다. 내 곁에 덮석 앉으시며 그분이 자신을 먼저

 

소개하였습니다. "나, 사단 포사에 근무하는 최창정 신부입니다. 혼자서 무얼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고 계십니까?"

 

사실 그때까지만 하여도도 신부님을 그렇게 가깝게 혼자서 만나뵈온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어색하기도 하였고 웬지 수즙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다 나도 겨우

 

자기소개를하였습니다. 신부님도 작업복에서 담배갑을 꺼내시더니 나에게 라이타가 있는지

 

물으셨습니다. 갑판위가 되어서 불이 잘 붙지않았습니다. 두 손바닥을 웅크리고 바람을

 

막으며 신부님 담배에 불을 붙여드렸습니다. 평안도 억양이 강하게 남아있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그분은 나의 가족에 대하여 여러가지를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대화는 해가

 

서쪽 수평선을 넘어 물속에 빠지고 어두움이 깔리며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이 하나씩 둘씩

 

모습을 드러낼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함내에 크게 울리는 스피카에서 갑판에 나와있는

 

사람은 즉시 선실로 들어가라고 방송을 하자 우리는 어깨를 나란히하고 선실로

 

들어갔습니다. 마음이 편해지고 가족걱정이 사라젔습니다. 일주일이나 지루하게 계속된

 

항해기간동안 나는 저녁식사를 마치면 으레히 후갑판으로 나갔습니다. 몇번 내가 헛걸음을

 

하기도 하였지만 신부님도 자주 나오셔서 둘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나는 그

 

당시를 "매우 축복받은 시간"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당시에는 몰랐지만)

 

신부님이 근무하시는 사단포사는 우리 기갑연대가 주둔한 19번 도로상의 작은 마을

 

"빈케"라는 곳과는 멀리 떨어진 곳이어서 찦차로 달려와도 두시간이 넘어 걸리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먼 거리를 일주일이면 꼭 한번씩은 신부님은 찾아오셔서

 

미사집전도 하시고 고해성사도 치루셨습니다. 우리 연대에서 작전을 수행하게되면 이

 

정기적인 방문 외에도 꼭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신자도 아닌 저를 꼭 찾아주셨습니다.

 

지하 벙커에 자리한 어두컴컴한 작전지휘소 안으로 터벅 터벅 걸어들어와 네 어깨를 툭

 

치시며 "아직 멀쩡하구만!"하시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로 모두를 웃기셨습니다. 나는 예하

 

대대에서 작전이 있을 경우에도 그들과 함께 출동하여 미군의 포사격, 항공지원,

 

헬기지원등을 통제하고 의사전달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자주 이렇게 작전을 마치고

 

돌아올 때이면 으레히 신부님이 연병장 한가운데에 서서 헬기의 거센 폭풍도 마다않고

 

열심히 손을 흔들며 우리들을 반갑게 마저주셨습니다. 모두들 죽지않고 무사히 돌아온 것이

 

너무 기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으레히 내 곁으로 다가오셔서 하시는 말씀은 "오, 정대위

 

이번에도 안죽고 돌아왔구먼. 이 베트콩놈들 사격솜씨가 영 엉망이구먼."하고 껄껄

 

웃으셨습니다. 40년이 지난 지금, 내가 군복을 벗은지도 삼십여년이 지난 지금도 신부님의

 

그 웃음과 사랑이 넘치는 그 눈빛을 나는 잊을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나와 신부님의 인연은

 

월남에서 다 끝난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귀국후 전방사단에서 근무하던 어느날 육사

 

영어교관으로 발령이나서 부임케 되었습니다. 그런데 화랑대에는 신부님이 먼저와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4년동안을 다시 같은 곳에서 근무를 하게된 것입니다. 신부님은 단

 

한번도 나에게 성당에 나와라, 가톨릭 신자가 되어라고 말씀을 하신적이 없습니다. 만나면

 

다정한 친구로 마저주셨고 당신이 "월남근무수당을 다 털어서 마련하셨다"는 오토바이를

 

가끔 태워주시며 화랑대를 누비고 청량리 로타리를 함깨 누비고 다녔습니다. 육사에서 내가

 

진급을 하게 되었는데 진급을 축하해주시는 신부님께 내가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최대위, 이제부터는 나를 보면 반드시 경례를 하도록 하라구." 이말에 신부님이 응답하신

 

말씀; "긴대말이야, 이런 이야기 들어본적 있어? 그 옛날에 시골을 다스리던 사또가

 

부임하면 웃줄대고 싶어서 백성들이 많이 모이는 거리를 당나귀를 타고 출동을 허거든.

 

사또가 나타나면 모두 코를 땅에 처박고 흙땅위에 엎드려 절을 하지. 긴대말이야 그

 

백성들이 절을 한것은 그 사또가 아니였단 말이야. 잘 처먹어서 살이찐 사또를 무겁게

 

태우고 다니는 그 당나귀에게 절을 했던거지." 나는 지금도 이 이야기를 가끔 생각합니다.

 

나의 성씨가 정씨(당나귀 정가?)여서 그랬던지 아니면 이리 저리 일만하고 다니는 내가

 

당나귀신세 같아서였던지 알수없습니다. 나는 환갑이 훨씬 지나서야 뒤늦게 정신이 들어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던 날, 나는 막 달려가서 신부님께 절을 올리고 싶었습니다.

 

정대위나 정소령, 신부님이 별명으로 부르시던 당나귀가 아니라 이제는 요한 입니다- 하고

 

신부님 앞에서 웨치고 싶었습니다. 신부님은 그러나 먼저 가셨습니다. 아마 지금쯤  나를

 

기다리고 계실것입니다.  "오- 당나귀 왔구나! 긴데 멀하느라 이제온거야? 그리구 거 뭐야

 

담배 가저온것 있으면 한 대 주려무나."하시면서 나를 마지할 때를 기다리고 계실것입니다.

 

신부님, 다시 뵈올때까지 안녕히 계세요.

 

*추신: 오늘은 군인주일입니다. 신부님, 그 옛날 신부님처럼 작업복에 대위

 

      계급장을 단 신부님이 강원도 철원 동송리에서 오셔서 강론을 해주셨어요. 열심히

 

      들었습니다. 신부님이 보고싶어서였어요.

 

2003년 10월 5일 "군인주일"저녁에  정영철 요한, 일산 집에서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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