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그래도 써 먹을 데가 있응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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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더러 “신앙이 무엇이냐?” 물으면서 딱 한 단어로만 대답을 하라고 한다면 나는 서슴없이 “굴레”라고 말할 정도로 신앙 때문에 내 자유를 많이 구속받고 산다. 내 마음대로 하라고 하면 아직도 해보고 싶은 일도 많고, 지을 죄도 많은데 신앙 때문에 내 마음대로 못하는 일이 다반사이니 신앙이 내게 '굴레'가 아니고 무엇인가.
나는 원래 어릴 때부터 말썽꾸러기였다. 모범생 하고는 사돈의 팔촌보다도 거리가 먼 싸움꾼이었고 서리꾼에다 거짓말선수에다 아슬아슬할 정도로 경찰서 문 앞에 근접해서 살았다고 할 정도로 망나니였다. 다행히 공부 하나는 그런대로 잘 해서 집안들이 원하는 기독교계통 학교에 들어갔고 忠孝를 제1덕목으로 치는 儒敎가문에서 자란 덕택에 늙어서 겨우 이 모양새나 갖추고 살지 A형 피에, 파르르하는 성질에, 예민한 감성, 별로 좋지 않은 외모까지 갖춘 내가 어려서 그런 인성교육까지 안 받았더라면 신앙을 가지려는 생각을 전혀 안 했을 것이고 만약에 그랬더라면 현재의 내 모습이 어떨까 생각하면 진짜로 눈앞이 아찔할 때가 많다. 다시 말해 굴레를 쓰고 살기를 백번 잘했다는 말이다.
졸업을 하고 또 결혼을 하고 나서도 몸에 밴 내 말썽부리기는 조금도 잦아지지 않았다. 기업은행이며 대한항공 그다 한진그룹의 본사 감사실파견까지 남은 못 들어가서 안달인직장을 걸핏하면 대안도 없이 차버리고 나와서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여자문제로, 돈 문제로, 걸핏하면 아내 속을 썩이다가, 다시 직장에 들어가 승승장구에 승진까지 하여서 이제는 거친 바람이 조용히 자나보다 하고 사람들이 안심을 하면 또 뚱딴지처럼 사업을 하겠다고 나서서 겨우겨우 모운 재산을 홀라당 날리고 덤으로 빚까지 안고 들어오니.......
지나고 나서 생각하면 내가 왜 그랬나 내 자신도 이해가 안 갈 정도였으니 집안사람들이나 내 아내가 이해할 수가 없는 게 당연했을 것이다. 내가 백말 띠라서 역마살이라고 했다. 생각해 보면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백수가 되어 놀면서 생각하면 별 문제도 아닌 것을 가지고 내가 왜 그때 그렇게 흥분해서 사표를 내던졌던가, 설령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그랬다 치더라도 회사에서 사람까지 집으로 보내서 몇번씩 회유했을 때 못 이기는 척하고 다시 사무실에 나갔으면 됐을 것을 내가 무슨 똥배짱으로 남들은 못 들어가서 환장하는 그 좋은 직장을 내 발로 찼나 하고 나중에는 꼭 후회가 되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내 힘으로도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 같은 그 무엇이 순간적으로 나를 본의가 아닌 쪽으로 움직이곤 했으니 그게 혹시 역마살이란 것인가 싶기도 하다.
그런 나를 결정적으로 돌려세운 것은 아내의 천주교영세 그리고 그 후 아내의 끊임없는 기도 덕분이었다고 나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내 역마살이 결국은 아내의 기도에 못 이기고 손을 들고 물러나면서 나를 놓아준 것이 아니겠나 싶으니 말이다. 묘한 것은 그 시점이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이다.
내가 인도네시아에 가던 해였다. TV드라마를 쓰면서 겨우 몇 푼 원고료 받아서 출연진들하고 쫑파티라나 뭐라나 그런데 따라가서 팁 몇 차례 주고나면 말짱 황인데 어느 세월에 집 사고 애들 교육시키고 생각만 해도 끔직해서 적도 밑에 전갈과 독충이 바글거리는 정글이라는 데를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고 생각하고 40을 바라보는 나이에 자원해 갔었다.
그러나 그곳은 정글이 아니라 내게는 낙원이나 다름없었다. 내게 맡겨진 회사 일만 잘 하면 나머지는 내하고 싶은 대로, 내 마음대로 뭐든지 할 수가 있었다. 내가 밤새도록 동료들과 어울려 고스톱을 치던, 하이 로를 하던, 아니면 배를 타고 나가서밤낚시를 하고 새벽에 들어오던, 누가 나를 말리거나 야단치는 사람조차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무한대의 자유 그것이 오히려 사람을 길들이는 방법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누가 간섭하지 않으니 내 할일은 나 혼자서 결정해야 하고 그 책임 또한 나 혼자 져야만 하는 것이니 자연히 신중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잘못 했다고 해서 어디 가서 하소연을 하거나 기댈 곳조차 없는데 정신 바짝 차려야 이 정글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 그리운 가족들과 함께 살 것이 아닌가?
그 무렵 나는, 그곳 동료들의 권유에 의해 마지못해 나갔던 교회에서 한국인직원들끼리 예배당을 짓자는데 합의하고 예배당을 짓는 일을 떠맡아 몰두했다. 예배당을 지은 후에 다시 무료해졌을 때는 또 전자올갠을 하나 사서 그때부터는 또 찬송가반주연습이며 아이들 동요 가르치기 등에 재미를 붙이고... 또 우연히 일제 때, 조선인으로 징용을 가서 인도네시아 독립영웅이 된 양칠성씨가 창씨개명으로 인해 일본인 이름으로 돼 있는 것을 그 무렵에 알게 되어서 그의 이름과 국적을 한국이름 한국국적으로 되돌려놓기 위한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고......
그 모든 것이 역마살조차도 내게 관여할 수 없는 자유로움 속에서 내가 얻은 평화였다. 어쩌면 그 평화는 나 자신에 국한 된 강한 집착을 뛰어 넘어 나만의 내가 아닌 우리 속의 나란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면서 얻어진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내 힘으로만 된 것이 아니었다. 아내가 전혀 생각조차 안 했던 천주교 영세를 했다면서 미사포를 쓴 사진을 보내온 것이 정확하게 바로 그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뒤이어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까지 몽땅 영세를 받았다며 사진을 보내오니 해외근무 끝내고 본사로 오자마자 나도 아내 따라 천주교로 개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내 몰래 꼬불친 돈 때문에 귀국을 해서 개종을 한 후에도 나는 다시 도박에 빠지고 ...그러면서 다시 도루묵으로 역마살에 잡힐 뻔 했지만 그것조차도 아내의 9일기도 덕에 도박장에 가기만 하면 뒷골이 아파 시껍을 하는 바람에 결국 내 역마살은 거기서 끝이었다. 그 후로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직장문제나 여자문제 돈 문제 같은 것으로 아내 속을 끓인 적이 없다. 요새는 별로 다툴 일도 없고 담배 끊으라는 말 이외에는 잔소리조차도 들을 일도 없다. 오히려 지구 기도회 봉사를 하는 아내가 요새는 내 덕을 톡톡히 보는 편이다.
성령기도회 피정 때마다 우리집 안방 성가정상 앞에 촛불을 켜놓은 채 사람들 이름이 적힌 명단을 올려놓고 묵주기도를 무려 한 시간씩 바치고 있기에 하루는 내가 “당신 피정하는데 가서 뭘 하기에 이 사람들 명단을 여기에다 올려놓고 기도를 하는 거야? 이 사람들이 도대체 누구야? 내가 전혀 모르는 이름인데”하고 물었더니 “우리 팀원 명단인데 왜 그래요? 내가 팀장이어서 팀 대화도 하고 상담봉사도 하고 그러는데...피정 잘 받으라고 기도하고 있는데, 왜 와서 방해를 하고 그래요?” 한다. “뭐야? 상담봉사? 상담봉사라면 그거 고민이 있는 사람이 카운슬링 받는 거 그런 걸 말하는 거야?”하고 재차 물어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렇다고 했다. “아니! 그럼?. 당신 번번이 날 들먹거리지? 우리 남편도 예전에는 어쩌고 하면서 상담할 때 걸핏하면 날 찍어다가 붙일 거 아니냐고?” 하고 다시 또 물었더니 “돗자리 줄 테니까 종로에 가서 자리 갖다 깔지 그래요. 하하하하....” 하며 아내가 깔갈거리고 웃는다. 아니라고 안 하는 것을 보면 역시 그럴 것이다. 자기가 뼈아프게 겪은 내 이야기를 실감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사람, 내 아내뿐이니까..... 상담 받는 사람도 눈물 글썽이며 자기 이야기를 하는 카운슬러에게서 어쩌면 감동이 전해져 자기 마음에 치유가 될 수도 있으리라. “어쩐지 요새 화요일(피정하는 날)마다 내 귀가 간질거린다 했었다니까.....하하하하” 하며 나도 그만 웃고 만다.
참말로 내 굴레의 주인이신 하느님이라는 분은 생각할수록 오묘하신 분이시다. 나 같은 말썽장이 죄인도 그분께서는 써먹으실 데가 있으시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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