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5일 (월)
(녹)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예수님께서는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자유게시판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스크랩 인쇄

강점수 [sooyaka] 쪽지 캡슐

2008-07-04 ㅣ No.121919

연중 제14주일 2008년 7월 6일


마태 11, 25-30.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셔서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는 깨달음이 생기면서 흩어졌던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함께 회상하면서 그분이 그들에게 남긴 말씀들을 실천합니다. 그들은 그 실천 안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살아 계시다고 믿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제자들이 중심이 된 공동체의 수는 늘어나고, 예수님에 대한 회상도 다양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회상한 바가 글로 정착되어 교회 안에 전달된 것이 복음서들입니다. 제자들이 회상하여 복음서들 안에 남긴 기록은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사실 보도만이 아닙니다. 그들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은 그들을 통해 새롭게 말씀하신다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따라서 복음서들 안에는 그들이 회상하여 기억해 낸 예수님의 말씀이 있고, 또한 신앙인들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깨닫고 믿게 된 바를 표현한 내용들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예수님의 기도 내용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기도로 소개되었지만, 사실은 초기 교회가 예수님에 대해 회상하면서 그들이 바치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는 그리스도 신앙은 인간 지혜와 슬기의 산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초기 교회 신앙인들은 예수님에 대해 회상하면서 그분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일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고 죄를 용서하신 것은 모두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 당국은 예수님 안에 그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분을 거짓 예언자로 죽였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신다는 깨달음이 모세와 더불어 시작하였고, 그 체험을 중심으로 시작한 유대교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유대교의 실세들은 율법 준수와 제물 봉헌을 절대적이라 믿고, 기원의 신앙을 왜곡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지혜가 없거나 그들이 슬기롭지 못하여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성전의 제사의례를 절대적인 것으로 만든 나머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잃은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잃으면서 그들은 율법과 제사 의례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들을 모두 죄인으로 판단하였습니다. 그들의 지혜가 만들어낸 종교는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추방하고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드는 장치로 전락하였습니다.   


제물 봉헌은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사람이 얻은 산물(産物)을 먼저 하느님의 시선에 가져다 놓는 행위입니다. 그들은 맏자식, 농사의 맏물, 사육하는 동물의 맏배 등, 자기들이 얻은 것을 먼저 하느님 앞에 가져와서 봉헌합니다. 봉헌된 것은 하느님이 가져가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 바치면, 하느님의 시선이 그 위에 내려오고, 그때부터 사람은 하느님의 시선으로 자기가 얻은 것을 봅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시선은 인간의 이기적 시선을 교정해 줍니다. 따라서 제물 봉헌은 사람을 나눔으로 초대하고, 나눔을 거룩한 것으로 해 주는 의례입니다. 그것은 나눔의 성사라고 할 것입니다.


율사들은 인간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게 하기 위해 그들의 지식과 그들의 지혜를 동원하였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모든 상황을 가상하여 지켜야 하는 행동 지침을 율법으로 만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율법 조항은 많아지고 그것을 지키지 못하여 죄인이 되는 이들도 많아졌습니다. 제관들은 성전에 많이 바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들은 많이 바쳐야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주장은 우리의 관행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관행입니다. 그런 우리의 관행을 하느님에게 적용한 것입니다. 지혜롭고 슬기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지혜는 하느님을 사라지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하느님일 수는 있어도 예수님이 아버지라 부르신 자비하신 하느님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지혜롭고 슬기롭기를 원합니다. 그런 사람이 행세하는 세상입니다. 지혜와 슬기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깨달음은 우리의 지혜와 슬기의 결과가 아니라는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철부지들’을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셨다고 말합니다. ‘철부지’는 어린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이들의 것입니다...어린이처럼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여야 합니다.”(마르 10,14-15). “이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시오.”(마태 18,10). 예수님은 이렇게 철부지 어린이를 하느님의 나라와 연결해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물론 어린이와 같이 유치한 사람이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의 지혜와 슬기에 의존하여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철부지 어린이는 부모에 대해 판단하지 않고 부모와 함께 있어서 행복합니다. 그리고 어린이는 부모의 말을 듣고 따르며 부모로부터 배워서 사람 노릇을 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셨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배워서 그분의 뜻을 실천하며 살겠다는 결심이 담긴 호칭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신앙인도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의 생명이 하는 일, 곧 자비와 용서를 배워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살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신앙인의 그런 실천 안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의 지혜와 슬기가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 되게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빈틈없는 수행으로 하느님을 감동시키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많은 것을 하느님에게 봉헌하여 그분으로부터 그 대가를 얻어내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생명을 배우고 그 생명을 자기의 삶 안에 살아 있게 합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그 주제는 항상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실천 안에 살아계시면,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아니기에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단편적으로만 실천합니다. 우리는 어쩌다 한 번씩 이웃을 돕고 사랑하며 용서합니다. 오늘 복음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는 말씀으로 끝맺었습니다. 지혜와 슬기를 위해 ‘수고하고 짐을 진’ 우리는 예수님이 열어주신 하느님 나라의 실천을 배워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기심과 욕심을 벗어나는 자비의 길이고, 이웃을 돕고 사랑하고 용서하는 온유하고 겸손한 길입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는 구원의 길이기도 합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181 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