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5일 (월)
(녹)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예수님께서는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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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통하여 하느님을 바라보다 [가운데 오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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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이수 [tpwkdygks624] 쪽지 캡슐

2008-07-02 ㅣ No.12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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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을 통하여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통하여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다" (십자가 성 요한)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사물을 통하여 보는 사람은 자신이 중심이다. 자기 내적인 것들이 사물을 통해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고 하느님을 통하여 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중심에 계신다. 자기 내적인 것들이 하느님을 통해서 하느님이 드러나시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사람은 사물을 통하여 우상을 숭배하게 되지만 하느님 당신께서 드러나시는 사람은 사물(인간 포함)이 아닌 하느님을 통하여 하느님께 경배 드리게 된다. 다음의 말씀은 그리스도 주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바라보아라고 이르시는 말씀이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내가 매 주마다 가는 곳에 그릿 개울 처럼 작은 개울이 있다. 큰 저수지로부터 내려오는 작은 물길인데 물이 얕을 때이면 그릿 개울에는 수초들이 여기저기서 자라나 있다. 물 속에는 언덕이 있고 물 속에서는 바람도 분다. 물결이 흐르면 수초들이 흔들리는 것이다. 작은 초원같은 언덕들이 옹기종기 있으며 이 언덕에 나무도 홀로 서 있기도 한다. 작은 또 하나의 자연 세상이 물 속에 있는 것이다.

강물에 대해 며칠 전에 느낀 점이 있다. 하루 하루가 변함이 없이 반복되는 시간과 공간 안에 존재와 삶은 놓여 있다. 어떤 때는 정신없이 바쁘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한결같이 시간이 정지된 듯하다. 그릿 개울 옆 나뭇가지를 흔들며 지나가는 가느다란 바람결에 새들도 나무 잎 사이를 재빠르게 나른다.

지난 날 유심히 들여다 본 그릿 개울 속의 아련한 세상의 평화로운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왠지 모르는 촉박한 마음에 조용히 개울 물이 들어와 흐르고 있었다. 개울의 물은 결코 자기 순리를 거스리지 않는다. 앞의 물이 흘러가야만 뒤따라서 다음의 물이 흐르게 되는 것이다. 뒤의 물이 앞의 물을 앞지르지 못한다.

변함이 없는 일상사의 일 속에서 반복되는 시간과 공간은 뻔히 정해져 있다. 시간과 공간을 앞질러 갈 수 있는게 아니다. 사람의 마음이 조급해져 있는 것 뿐이다. 흐르는 물처럼 시간과 공간은 어김없이 다른 날과 같이 펼쳐져 가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사람도 움직이면 된다. 조급한 마음은 오히려 실수를 자아내게 한다.

물이 급하게 흐르면 그에따라 급하게 움직이면 되고 물이 느리게 흐르면 그에따라 느리게 살아가면 된다. 시간과 공간이 정지된 것 같이 보여지는 그릿 개울 같은 작은 소박한 삶에도 강물의 흐름에 따라 개울 물 속의 또 다른 세상이 진행 되어지고 있듯이 새로운 삶은 언제나 소리없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은수자같은 삶은 하느님의 숨결을 그 안에서 물처럼 느끼기 위함이 아닐까 한다.

하느님의 숨결을 자주 접하지 않고서는 인간의 말을 늘어 놓게 된다. 하느님의 숨결은 영혼이 하느님을 만져보게 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어떻게 사람이 만져 볼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지 하느님의 마음은 아니시다. 눈으로 보지 않고서도 하느님의 숨결을 느끼게 되는 영혼은 하느님을 바라보게 되는데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육신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을 초월하도록 그 영혼을 이끄시기 때문이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하느님의 정의는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야 한다. 인간은 인간의 생각에 따르다 보면 하느님의 시간과 공간을 거스리는 경우가 많아 진다. 강물처럼 흐르지 못하고 자기 뜻을 내세우며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하는 거짓의 공명심에 들뜨게 되면 하느님을 앞질러 거스리게 된다. 하느님의 말씀(마음)보다 자기 말(마음)을 세상에 알리고자 전전긍긍하게 되는데 하느님의 숨결이 그와 함께 있지 않은 이유에서 이다.

하느님의 숨결이 그 영혼의 생명으로 되지 못하면 항상 인간의 말(지식)을 중심으로 거짓 신을 만들어 내고 인간의 제사를 우선시 한다.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에 대해서 소홀히 여기며 온갖 거짓말로 하느님의 진실을 가리우게 된다. 하느님의 숨결이 그에게 없어 그 영혼의 어둠이 주위를 눈 멀게 한다.

그리스도 주님께서는 "피에 젖은 옷" (하느님의 말씀)을 입으시고 영혼들을 이끄시지만 인간은 항상 다른 신비적인 환상에 자꾸 사로잡혀 가기를 자주 바라며 자기 영혼들을 그런 유혹과 시험에 기꺼이 내어 주고자 한다. 말씀의 믿음(신덕)보다는 '다른 말'들에 신뢰를 얻고자 탐구한다.

신비적 환상에 쉽게 유혹받는 이유는 하느님의 숨결이 흐르는 진리의 말씀을 실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업신여기고 인간의 지식에서 나오는 말들에 더욱 매료되어 지는 까닭이다. 이같은 영적인 탐닉에 빠지면 예수님께서 가운데 서신 것을 그 영혼은 볼 수 없게 된다. 인간의 문이 닫혀있더라도 주님을 바라보고자 한다면 예수님께서 자신 안에 오시는 것이 하느님의 마음(사랑)이신 것이다. 

 

                   "이 곳을 떠나 그릿 개울에서 개울물을 마셔라. 음식은 까마귀들을 시켜 날라다 주도록 하리라"

수도자적, 예언자적 생활을 하며 엘리야의 삶과 정신을 따르는 가르침에 대해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여러분에게 간청합니다. 우리에게 이어져 내려온 거룩한 예언자들의 맥을 주시하십시오.”  (창립사 29, 33)라는 교훈을 남긴다. 하느님의 숨결, 하느님의 마음을 통하지 않고서는 사물(인간)을 통해 하느님을 지어내게 되는 것이다.

"가르멜과 사론처럼 아름다워져 사람들이 야훼의 영광 보리라. 우리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 늘어진 두 팔에 힘을 주어라. 휘청거리는 두 무릎을 꼿꼿이 세워라. 그 때에 소경은 눈을 뜨고 귀머거리는 귀가 열리리라. 그 때에 절름발이는 사슴처럼 기뻐 뛰며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리라. 사막에 샘이 터지고 황무지에 냇물이 흐르리라. 그 곳에 크고 정결한 길이 훤하게 트여 '거룩한 길' 이라 불리리라."  <이사야 35장>

인간은 나약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나약하지 않으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기에 당신의 힘을 내려 주신 것이다. 사물(인간 포함)을 통해서 하느님을 보고자 하는 사람은 하느님께 주시하지 않고 언제나 인간 자신을 응시한다. 따라서 인간의 타락됨에 우울해 지고 자신을 비워 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으로 가득히 채워 넣고야 만다.

그릿 개울에서 조용히 하느님의 숨결을 자주 느끼려 하지 않으며 가난한 삶으로 주님의 양식을 얻고자 기도드리지 않는다면 자신의 정신적인 생각으로 사물(인간 포함)을 통하여 하느님을 바라보려는 유혹의 시험에 빠지고 만다. 사물이 사물(인간)의 마음으로 하느님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들은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마음으로 사물을 창조해 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하시는 말씀은 오늘도 여전히 <하느님을 통하여 하느님을 바라보라>는 말씀이시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천사가 일러 준 하느님의 경륜인 것이다. 하느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인간(사물)은 하느님의 숨결을 느낄 수 없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옆구리에 넣어 보는' 그리스도 은총의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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