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과 함께 하는 '파견자' -주일복음 묵상
<요한복음 20,19-23>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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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복음의 위 말씀은, 성령강림대축일까지 '주일 복음' 만으로 3번을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1.
첫 번째 묵상은, '성령을 받음으로 해서, 당시로는 예수님의 제자들, 오늘날로는 교회 안의 그리스도인들의 (세상 사람들에 대한) 지위의 '즐거운 역전' 현상이 일어났다는 것이었습니다.
부활하여 현존하여 계시는 예수님께서 '성령'을 불어넣어 주심으로써, 제자들은(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 의한) 판정을 두려워하는 자에서, (성령의 기준에 의한) 세상 사람들을 판정할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당시로는 율법으로 사는 유다인들의 지위에 대해서, 성령으로 사는 제자들(그리스도인들)의 지위가 역전되어 우위에 서게 되었다는 '즐거운 말씀'으로의 묵상이었습니다.
('성령'으로 인하여, 영적으로 걱정해야 할 사람은 예수의 제자들이 아닌, 유다인을 포함하는 세상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이겠지요.)
2.
두 번째 묵상은, 성령께서 함께 하심으로 해서, 당시로는 예수님의 제자들, 오늘날로는 (보편)교회 안의 그리스도인들은, 온 세상으로 나가는 주님의 '파견자'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성령을 불어넣으심으로써, 주님의 '파견자'로써 온 세상에 보내신다는 뜻이니…
그리스도인에게는, (보편교회를 통하여), '파견자'로서의 의무와 권리가 함께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첫 번째 묵상에서의 즐거움보다는, 세속에 대한 각각의 '파견자'에게 각자 부여된 책무가 주는 걱정이, 훨씬 더 크게 다가오는 묵상이었습니다.
3.
세 번째 묵상은(성령강림대축일 묵상은), '파견자'들이 성령과 함께 하심은,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하는 고백…, 그리고 '믿음-희망-사랑은 영원함'을 공유하는 것으로… 알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세상에 '파견된 자'들 사이에서, 세상에서 보는 바와 같은 '파괴적인 분란'이 야기된다면(세상의 '파괴적인 분란'이 개입한다면),
그 때 '성령은 어디에 계시는가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보편) 교회공동체라 할지라도, 신앙-영성의 (파괴적인) 충돌 현상은 결코 드물지 않게 일어나고 있다고 보아야 하지요. 상당히 많은 교우님들이 겪고 계시는 '아픔'이기도 하지요. (특히 교회공동체, 교회 소속 기관 등지에서, 열심히 일을 해보신 분들이라면 더더욱…)
이러한 영성의 (파괴적인) 충돌 현상에 대해서,
이제까지는 설령 특별하게 '축성된 자'라 해도, 세속적 판단을 앞세워 교만해지면,
1) '하느님의 영'이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진다는 사무엘서의 '사울-다윗 관련 행적과 말씀'을 중심으로 묵상하기도 했습니다.
2) 또는 이 세상 사람들의 역사에, '소외' 현상이나 '배제' 현상을 불러내는 '공중의 권세자'들, 곧 악한 영들이 발현하는 상황이라는 방향에서 묵상하기도 했습니다.
3) 또는 '하늘나라에서는 큰 자가 작은 자 되고, 작은 자가 큰 자 된다'는 복음 말씀을 중심으로 묵상하기도 했습니다.
4) 그러나 바오로 사도의 코린토1서를 보니, '그리스도의 한 지체'라는 상황을 지키면서 묵상함이,
(힘들지만) 좋은 방향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곧, 모두 다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의 한 지체이므로,
그런 파괴적인 충돌 현상이 나타날 경우,
성령께서 각자에게 주시는 '은사'를 영적으로 분별해 보고,
은사로 인한 '직분'을 영적으로 분별해 보고,
직분으로 인한 '활동'을 영적으로 분별해 보는 과정을 거쳐서(은사→직분→활동)
필요할 경우, 성령으로 인한 은사-직분-활동들이 계속해서 쇄신되도록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그러한 묵상이었습니다.
코린토1서에 의하면,
은사는 지혜-지식-믿음, 치유-기적, 예언-분별, 방언-해석들이 열거되어 있고(이중 '지혜'는 '사도'급에 주어지는 특별한 은사…),
초대교회 당시의 직분은 사도-교사-예언자, 기적자-치유자, 협조자-지도자, 방언자-해석자들로 나타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로 판단한다면, 아마도 좋은 '사도' 계승자가 위에 계시다면,
영성의 충돌 현상들은 사전에 미리 걸러질테니, 드물게 나타나는 사태일텐데… 하는 생각도 많이 들었고…
지금 이 땅의 교우님들은, 교회공동체 안팎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영성의 충돌 현상들로 해서 정말로 많은 고통들을 받고 계시다는 생각들로 해서,
참으로 '지혜'의 특은을 받으신 '교부'님의 영성이 이 땅에 필요한 때가 아닐까 하는… 간절한 염원도 들었지만…
실제로는 당시 바오로 사도조차, 파견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영성의 '충돌'이라는 경험을 피하지 못하셨다는 사실도, 새삼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코린토 1서 12,3ㄴ-7. 12-13>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