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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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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식 [big-llight] 쪽지 캡슐

2011-04-17 ㅣ No.5053

지금 성경 이해를 위한 용어 선택을 두고 몇몇 분이 갑론을박한다. 참 좋은 진지한 토론이다. 다시 한 번 더 말하지만 나는 이 토론을 질투심 담긴 아름다운 토론으로 보인다. 왜냐면 그 토론의 중심에 하느님 말씀이 있고 하느님 사랑이 있기에. 어쩜 토론의 내용 또한 너무 높기도 하다. 소생과 같은 보통의 평신도에게는 한편으로 어렵기도 하지만. 그렇지만 성경의 이해와 하느님 말씀을 묵상하기에 많은 도움이 되기에 깊은 관심으로 지켜본다.
 
[묵상 거리]
오늘 우리는 수난 복음을 통해서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라는 말을 듣게 된다. 수난과 부활을 세 번이나 예고하시고, 최후의 만찬을 드는 이 성전도 파괴될 것이라는 것을 예고하신 예수님의 마음은 심란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기에 유다 이스카리옷이 은돈 서른 닢에 자기를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리는 것을 익히 알고 계시는 입장에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그리고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도 이미 당신을 팔아넘길 자를 알고 계신 나머지 라자로의 무덤에서 우신 것처럼 한없이 한도 없이 우셨을 것이다. 그리고도 정말 억울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너희는 깨끗하다. 그러나 다 깨끗한 것은 아니다.”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제자들은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여 서로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묻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자신을 속이면서 까지 거짓말을 한다. 그 수법도 나이가 들수록 대담해지고 고차원적이다. 그리고는 후회와 반성을 하고 필요하면 사죄를 청한다. 이것이 우리네 삶의 일부이다. 그 옛날 베드로도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라고 예수님께 우겼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사실 이와 같은 잘못된 일에 대한 사전 경고를 많이 받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니라고 우긴다. 양심을 저버리면서 변명으로 일관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큰 낭패를 겪는 사례를 많이 보고 듣는다. 심지어는 패가망신을 당하는 꼴도 여러 번 보았다. 우리가 자주 이야기하는 ‘저는 아니겠지요?’라는 이 말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가 너무나 많이 사용하는 말이 되어 버렸다.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
 
 
[제언]
질투[嫉妬]와 시기[猜忌], 그 말이 그 말이라고 여기면 그만인 그 말을 굳이 따지려는 게 질투심의 발로일 게다. 지금의 이 코너에서 뜨겁게 불고 있는 이 논쟁은 나는 감히 시기가 아닌 질투라고 관련자에게 제언한다. ‘질투와 시기’, 아예 따지려면 우리말의 정의부터 다시 짚자. 여러 기준을 이리보고 저리보아도 그 기준이 그 기준이고 그게 그거다. 굳이 따지지 않는 게 맘 편하다. 우리말과 한자[漢字] 사이에 오는 문화적인 혼선이리라.
 
그렇지만 이 두 용어를 정의해 보자. 이것은 전적으로 소생의 판단이다. 첫째, 나와 직접 관련된 것이라면 질투이고 관련이 없다면 시기이다. 둘째, 사랑과 연결된다면 질투이고 미움과 관련되면 시기다. 셋째, 감정의 발로가 좋은 의미[사랑이 있기에]가 담긴 것이라면 질투이고 없다면 시기이다.
 
구체적 예를 들어 보자. 질투는 반드시 삼각관계이다. 상대방에게 주거나 받거나 하는 관계에 제 삼자가 끼어드는 것이 삼각이다. 상대방에게 주고 싶거나 상대로부터 받고 싶은데 제삼자의 개입으로 방해받는다. 무엇을 주거나 받고 싶을까? 사랑이다. 사랑이 없다면 무관심이다. 그리고 질투는 현재의 관계를 이전의 관계로 복원하려한다.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언젠가 증오로 바뀔지라도.
 
따라서 질투는 반드시 삼자의 개입이 있고, 직간접으로 사랑의 끈이 쌍방에 작용하고, 이 감정 이전의 사랑이 연결되는 곳으로 환원하려는 희망의 기대가 있는 감정을 이야기하는 게 아닐까! 이것이 아닌 미움과 증오, 무관심 등 모든 것이 시기이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둘만이 관계되는 것은 시기다. 사랑의 끈이 없어도 시기이다. 이전의 관계로 되돌릴 수 없는 없는 관계가 시기이다. 수없는 예를 각자가 만들어 보면 쉽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하느님에게는 질투뿐이지 시기는 없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이곳에서 하느님사랑의 말씀을 잘 다듬고자 진지한 갑론을박하는 분께 제안한다. 사랑이 담긴 질투는 좋다. 그러나 이 질투가 사랑이 없는 시기로 가는 것에는 반대한다. 이곳 토론장에는 변하지 않는 하느님 말씀의 진리가 있고 그 진리에는 버릴 수 없는 사랑이 가득하기에 감히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시기가 득실거리는 이곳에 들어 올리는 만무하다. 예수님도 산상 설교에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라고. 그때는 밤이었지만 이제 곧 새벽이 올 것이다.
 
두 분이 하느님 말씀을 두고 벌이는 사랑싸움에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사랑이 담긴 이전으로 복원하려는 피눈물 나는 질투에 용기를 드린다. 그렇지만 두 분 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우기는 것은 정말 아닌지.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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