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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유게시판

[펌]수녀님들, 본당을 떠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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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규 [mugeoul] 쪽지 캡슐

2001-03-25 ㅣ No.18827

[1998년 공동선] 교회에 대한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박영대(베네딕도) / (사)우리신학연구소 사목조사컨설팅센터 실장

 

스스로 내 자신을 평가하자면, 나는 남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는 편이다. 언제나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끈질기게 주장하고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한다. 그 과정에서 곧잘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그때마다 반성하곤 한다. 나를 아끼는 분들이 이러한 나의 단점을 꼬집어 충고하곤 하는데, 그 충고가 백 번 지당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좀처럼 나 자신을 바꾸기 어렵다. 반성도 그때 잠시뿐이고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내 아집과 독선으로 다른 사람에게 생채기를 내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의 충고와 뼈저린 자기 반성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단점을 고치지 못하는 것은 나만의 경우가 아닌 듯싶다. 아마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다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이런 까닭에 마음 하나 바꾸면 만사형통 술술 풀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들이 굳은 마음과 생각 탓에 지지부진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다. 인간 관계에서도 이렇듯 어려우니 이미 굳을대로 굳어진 관행과 제도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나쁜 관행과 제도를 개혁하겠다는 소리가 높지만, 당장 변하는 게 별로 없는 것만 보아도 무언가를 바꾼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교회 안이라고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의 교회는 이게 문제이니 이렇게 달라져야 한다는 말이 아주 오래 전부터 들어 왔지만 달라지는 건 거의 없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다. 물론 나도 교회 쇄신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목청 돋구어 외쳤고 지금도 외치고 있는 사람의 하나이다. 지금도 교회 쇄신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조금의 의심도 없지만, 이제는 전에 비해 좀 신중해진 편이다. 무언가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거창한 방향 제시가 아니라 작은 구체 대안이, 화려한 말이나 글이 아니라 소박하지만 꾸준한 실천이 더 필요하다고 새록새록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을 쓰면서도 또 한번의 말 성찬으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다. 어쨌든 조심스런 마음으로 최근 내가 고민하고 있는 몇 가지를 나누고자 한다.

 

* 수녀님들, 본당을 떠나시죠

 

우리신학연구소는 지난 4월에 경제 위기와 관련된 자그마한 심포지엄을 열었는데, 이 자리에 논찬자로 참석했던 부산교구 조욱종 신부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성직자의 오만하고 비민주적인 태도를 부추기는 원인 제공은 바로 수녀회의 본당 진출이 하고 있다고 봅니다. 수녀회의 본당 진출은 ’성직자-수도자-평신도’의 계급 분화를 야기했습니다. 수녀회의 본당 진출은 성직자의 태만과 안정 희구를 유도했습니다. 수녀들이 본당의 궂은 일들을 다 맡아 함으로써 태만에 빠져들었고, 수녀들을 통해 평신도를 관리하면서 제도 구축이 얼마나 편리한가를 경험했기 때문에 본당이나 교구청이나 어디에나 수녀들을 두게 됩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평신도들의 권한과 일거리를 수녀들이 잠식함으로써 의사 소통이 장애를 받게 됩니다.

만일 수도자들이 본당에서 다 철수하여 세상의 그늘진 곳에서 일하게 되면 그야말로 빛의 역할을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직자들은 하루하루가 힘들고 바쁠 것입니다. 평신도들의 몫은 저절로 커져 평신도의 협조 없이는 교회를 제대로 운영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과연 그렇다고 관료주의가 청산될 수 있을 것인가 하고 미지수로 돌릴 수도 있겠지만 거꾸로 생각할 때 수도회의 진정한 수도자의 길을 걸어가는 모범을 통해서 성직자들은 자기 신원에 대한 위기 의식을 가지게 될 것임은 분명합니다. 교회의 역사에서 볼 때 끌뤼니수도원의 개혁이나 프란치스코회의 등장 등이 교회의 신원 되찾기에 큰 촉매제 역할을 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구조 조정의 목표는 원래의 있어야 할 자리에 있도록 하는 데에 있습니다. 수도회의 소임이 본당 사목에 있지 않음은 다 아는 일입니다. 교회의 쇄신은 교회의 지체들이 모두 떠맡아야 할 일입니다. 특히 수도자들은 교회 쇄신의 진정한 파수꾼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나는 조욱종 신부님의 말씀이 공감한다. 현재 수녀님들이 본당에서 하는 일로만 따지면 굳이 수녀님들이 본당에서 먹고 자고 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대부분의 본당에서 수녀님들이 담당하고 있는 제의방 관리와 전례 준비는 평신도들을 교육시켜 맡기면 될 일이고, 그도 아니면 다른 나라 교회처럼 신부님들이 직접 하면 될 일이다. 신부님들이 직접 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밖에 수녀님들이 하는 나머지 일들은 본당 가까운 곳에 집을 얻어 ’지역 공동체’를 이루어 살면서 출퇴근해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한밤중에 급한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느냐는 말도 하지만 요즘처럼 자가용이 흔한 때는 전혀 문제될 게 없다. 물론 지금보다 불편해지는 게 분명하지만, 수녀님들이 지역 공동체를 이루고 살 때의 좋은 점을 생각한다면 견딜만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수도회들이 지금처럼 본당마다 2명 이상의 수녀님들을 배치할 필요가 없게 된다. 예닐곱 명의 수녀님들이 팀을 이루어 서로 잘 협력하기만 하면 예닐곱 개 본당도 충분히 돌볼 수 있다. 그러면 본당에 수녀님들을 파견하느라 자기 수도회의 카리스마에 맞는 사도직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나아질 수 있을 것이다. 한 걸음 나아가 수녀님들이 모여 사는 집에서 수도회의 카리스마에 맞는 다양한 사업을 벌인다면 일거양득일 것이다. 또 수녀님들의 빈자리를 평신도 선교사와 같은 평신도 전문가로 채운다면 평신도 사도직의 활성화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걱정거리가 없는 건 아니다. 어떤 분들은 수녀님들이 본당을 떠날 경우 수녀회 입회 희망자가 줄어서 한국 교회도 결국 외국 수녀회처럼 할머니 수녀만 남게 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물론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하지만 반대로 지금처럼 수녀님들이 본당에 상주한다고 해서 지금까지처럼 수녀회 입회 희망자가 계속 나오리라는 보장도 없다. 요즘 아이들이 어떤 아이들인가. 제 싫은 일은 죽어도 안 하는 요즘 아이들이 그래 본당 신부님의 시중이나 들자고 수녀가 되고자 하겠는가. 천만에 말씀이다.

설사 각 교구장이 허락하더라도 수녀님들이 본당을 떠나 지역 공동체를 이루려면 미리 해결되어야 할 문제들이 많다. 우선 각 수녀회들이 맡고 있는 본당들을 서로 바꿔 가까운 몇 개의 본당들을 하나의 수녀회에서 맡도록 해야 한다. 이해 관계가 전혀 없을 수 없으니 재벌들의 빅딜만큼이나 어려운 일이고 시간도 제법 걸릴 것이다. 그러니 우선 제의방 관리와 전례 준비라도 평신도들에게 넘기는 일부터 했으면 한다. 이 또한 쉽지 않은데, 겁부터 내는 평신도도 문제이지만 평신도에게 안심하고 맡기지 못하는 신부님 수녀님들도 문제이다. 성체 분배도 평신도들이 하면 큰일나는 줄 알았지만 이제 자연스러워졌으니 제의방 관리와 전례 준비라고 다를 게 없다고 본다. 만일 누구라도 뜻있는 신부님이 각종 전례 준비에 대한 자세한 지침서를 써낸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이제 사목도 평가합시다

 

한국 200주년 기념을 기념한 사목회의에서 지적된 본당 운영상의 문제점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3) 본당 운영을 위한 계획이 거의 없거나 찰나적이었다. 현대사회에서는 모든 공동체의 운영은 반듯이 치밀한 계획을 전제로 해야 한다. 계획 없는 활동은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용두사미가 될 가능성이 많다. 계획을 수립하는 데는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의 유기적 협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특정인을 중심으로 계획을 수립하고 집행하였기 때문에 계획의 객관성과 일관성이 결여되었었다.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는 자기의 소명에 충실하면서 각자의 전문 지식과 체험을 동원하여 유기적으로 협력하면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4) 유기적 계획 수립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그 계획을 실천한 후에 반듯이 그에 대한 평가가 뒤따라야 한다. 사후 평가는 앞으로의 발전적 계획 수립에 큰 도움을 준다. 지금까지 한국 천주교회는 평가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하여 지나간 활동을 무조건 합리화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이것은 미래의 건전한 발전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공동체 안의 분열도 조장하는 요인이 되었다."

-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 의안(10) <교회 운영> 49항

 

십 년이 훨씬 넘었지만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에서 꼬집은 문제들은 아직 나아지지 않았다. 알찬 본당 사목 계획을 세우는 경우도 찾아보기 어렵거니와, 더구나 계획의 실천 결과를 평가하는 경우는 더더욱 찾아보기 힘들다. 본당 사목 계획이라고 해 봐야 본당 사목회의 분과별 사업 계획이나 행사 일정들을 나열하는 수준이 대부분이다. 또 길게 내다보며 몇 년 동안의 계획을 세우는 경우가 거의 없고 1년 단위의 계획을 세우는 것이 보통이다. 이렇듯 계획 자체가 부실하고 막연하기 때문에, 막상 평가를 하려고 해도 평가하기 어렵고, 한다고 해도 평가 또한 막연하기 이를 데 없다. 평가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계획부터 짜임새 있고 구체성을 가져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예를 들어 주일학교를 활성화하려면 세부 계획을 세우기에 앞서 분명한 목표를 정해야 한다. 현재 대상자 가운데 주일학교에 출석하는 비율이 80%라면, 한 해 동안 90%로 높이겠다는 목표를 세운 다음에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계획해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계획을 세운다면, 나중에 결과를 평가할 때 목표를 이루었는지를 먼저 따지고, 만일 못 이루었다면 그 원인을 분석해 차츰 보완해 나갈 수 있다. 이럴 때만이 발전과 개선을 기대할 수 있다. 아주 상식 수준이 이야기이지만, 교회 안에서 이런 방식의 접근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처럼 본당 사목이 주먹구구식인 원인들 가운데 하나는 본당 사목의 최종 책임자라 할 수 있는 신부님들이 경영에 대한 기본 교육조차 받지 못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개신교 신학교에서는 목회 행정학, 경영학 등 교회 관리자인 목회자에게 필요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가톨릭 신학교에서 이런 교육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들은 바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근 들어 신부님들이나 평신도 가운데서 일반 대학원에서 경영학이나 행정학의 관점에서 교회 안의 문제를 정리해 보고자 하는 분들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어쨌든 이제라도 신학교에서 경영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더 나아가 평가가 객관성 있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평가 지표들이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각 사목 영역별로 무엇이 얼마나 잘 되고 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기준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주일학교 운영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학생들의 주일학교 등록률과 출석률은 어떤지, 교사 1인당 학생수는 몇 명인지, 교리교사의 평균 재임 기간은 몇 년인지, 학생 1인당 교육비는 얼마인지 등을 따져봐야 한다. 이러한 평가 지표를 공식화해서 본당마다 적용한다면, 자기 본당의 수준이 다른 본당에 비해 어떤지를 비교해 쉽게 개선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정부 기관에서 사회 지표들을 연구 개발하듯이, 우리 교회도 사목 평가 지표들을 연구 개발해야 할 것이다.

 

* 또다시 물량주의인가

 

최근 서울대교구장이 되신 정진석 대주교님께서 지금까지 사목 방침으로 내세우신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지구의 활성화이고, 다른 하나는 선교 강화이다. 지구장을 사제들이 직접 선출하도록 하고, 실질 권한을 넘겨준 일은 비대화로 말미암아 이미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서울대교구의 실정으로 보아 잘 하신 일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선교를 강화해 임기 동안에 신자수와 본당수를 지금의 두 배 수준으로 늘이시겠다는 생각은 좀 문제가 있어 보인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말년에 서울대교구에 소공동체운동을 정착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다. 눈부신 교세 성장으로 늘어난 신자들을 잘 관리하고 사목하려면, 과거의 본당 중심·사제 중심·전례 중심 사목으로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 추기경님은 각 본당에 정기 사목 방문을 하셨을 때도 소공동체운동의 추진 성과를 꼼꼼히 따지셨다고 들었다. 김 추기경님의 관심과 노력에도 아직 서울대교구의 소공동체운동은 걸음마 수준이라 평가할 수 있다. 그래서 걱정이다. 자칫 정 대주교님의 사목 방침에 따라 본당마다 선교에 매달릴 경우 그나마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소공동체운동이 실종될까 겁난다.

선교도 잘 하고 소공동체운동도 잘 하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도 할 수 있으나 어디까지나 생각일 뿐이다. 현재의 교회 현실에 비추어 어림없는 이야기이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다가 다 놓치느니 먼저 소공동체운동을 정착시킨 다음에 소공동체 중심의 선교에 나서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현재 규모의 신자도 제대로 관리하고 사목하지 못해 냉담자가 늘어나는 등 각종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게 현실이지 않은가. 아울러 우리 교회가 선교에 적극 나선 것이 다른 종교들을 자극해 서로 선교에 열을 올리느라 종교간 대화와 협력에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도 걱정된다. 주교님들이 올 가을 정기 주교회의에서 앞으로 선교에 더욱 적극 나서자고 의견을 모으셨다고 하니 더욱 걱정이다.

 

* 교구마다 사목연구소와 사목대학원을 세웁시다

 

미래 교회는 평신도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믿고 평신도 사도직의 활성화를 위해 애쓰시는 신부님들도 자주 평신도의 자질을 문제삼는다. 맞는 말이다. 자질과 능력을 갖춘 평신도 지도자가 아주 드문 게 현실이다. 천주교 신자들이 다른 종교인들에 비해 학력 수준이나 경제 수준이 높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니, 이러한 현상은 그 동안 우리 교회가 지도자를 양성하는 데 소홀했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다. 평신도에게 신학교 입학을 허가하는 것만으로 턱없이 부족하고, 신학교 부설로 개방 대학원 형식의 사목대학원을 설립한다면 훌륭한 평신도 지도자의 도량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럴 때 신학교에 막대한 예산을 투자하고 있는 교회의 명분도 살 것이다. 그리고 교육 과정은 사제가 되고자 하는 신학생들에게 하는 교육과 다르게 평신도 사도직의 특성에 맞는 것으로 구성했으면 한다.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은 사목연구소를 세우는 일이다. 아무리 뛰어난 목수라도 연장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듯이, 아무리 훌륭한 평신도 지도자라도 활용할 수 있는 각종 사목 자료와 프로그램이 제공되지 않는다면 제 역량을 다 발휘할 수 없다. 나 자신도 본당 사목회 활동을 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것이 참고하고 활용할만한 사목 자료나 프로그램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전국 모든 본당마다 있는 본당 사목회 활동에 관한 지침서 하나 없는 실정이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본당 사목회 운영에 대한 제대로 된 지침서만 있어도 현재 본당신부님들이 본당 사목에서 신경 써야 할 일의 상당 부분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전문가들이 모여 꾸준히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하는데, 사목연구소가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현재 서울대교구가 편역해 잘 써먹고 있는 소공동체운동 관련 교재와 지침서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룸코사목연구소에서 만든 것이다. 남의 것을 잘 써먹는 것도 좋지만, 이제는 한국 천주교회도 이런 일에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이 일을 위해서는 사목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져야 하는데, 가능하면 사목 일선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평신도들에게 공부할 기회를 준다면 현장 감각과 전문성을 고루 갖춘 인재를 양성할 수 있을 것이다.

 

글을 마감하며 다시 일어보니 역시 공허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거듭날 시늉도 하지 않는 교회의 완고함에 이제 지친 탓일까. 하지만 어쩌겠는가. 스승 예수에 의지해 힘껏 노력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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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수녀님의 본당 파견에 대한 소견

 

우선 저는 본당에서 마치 아들 예수님 곁에서 묵묵히 구원 사업을 도와주시는 성모님처럼 신자들의 어머니 역할을 다하며 온갖 궂은 일을 마다하시는 수녀님들의 노고에 언제나 저는 감동을 느끼며 가슴 깊이 감사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 사실로도 우리 신자들에게는 신부님보단 수녀님들이 감성적으로 더 친근하게 여겨지는 것이 인지상정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재정적인 문제와 같은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본당에 수도자들을 파견할 수밖에 없는 수도회의 고충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앞 글에서도 언급되었듯, 그것은 수도자의 삶에 있어 그 본질적 요소는 분명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수도자의 신원 그 정체성 확립이라는 차원에서는 분명 손실을 가져다 줄 수밖에 없을 그런 차원의 활동이 아닐까 여겨지는 것입니다.

 

수도회는 지난 2천년 교회 역사에서 분명 ’교회의 혼(魂)’으로서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는’ 역할을 다해 왔으며, 그들만의 고유한 카리스마 그 ’영성의 빛’으로 교회와 세상에다 크나큰 도움을 주어왔습니다.

 

참으로 본당에 파견되어 교계제도 조직 안에서 소진하고 있는 그 역량을 수도회 각자 그 고유의 복음적 영성을 되살리고 실천하는데 힘을 쏟는다면, 그것은 단순히 본당을 원활하게 관리하고 유지시키는데 보탬을 주는 것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크나큰 그 무엇을-그야말로 ’천상의 양식’을 교회와 세상에다 가져다 줄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사실 무엇보다 서글프고 가슴 아픈 사실은 각 수도회에서 파견된 수녀님들이 본당에서 거의 비슷한 일들에만 매여 활동하다 보니, 끝내는 모든 수도회가 비슷한 모습을 띠게 되면서 각자의 고유한 얼굴을 거의 잃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관상수도회나 활동수도회조차도 도체 구별이 잘 안될 정도까지 되어버린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본당이라는 획일적 조직에 매몰되면서 빚어진 결과일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 우리 교회로 봐서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단순히 눈 앞의 편리와 사소한 이익만을 쫓다, 보다 근본적인 것을 크게 잃고 있지는 않은가 싶어 염려스럽기만 합니다.

 

수도회의 그 영성을 헤아릴 때 우리는 이른바 ’활동의 환상’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갈멜의 봉쇄 수녀원 그 깊은 곳에 숨어 기도드리는 수녀의 가슴에서 울려나오는 침묵의 종소리 하나가, 요란하게 떠들며 전교하는 이들보다 온 세상의 구원에 있어 더 큰 힘을 발휘하게 됨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사실로도 현대에 와 모든 전교자의 수호자는 갈멜 봉쇄 수녀회의 소화 데레사 성녀이십니다.

 

그렇게 수도회들이 각자의 영성을 지키고서 깊음과 높음과 넓음의 그 혼(魂)을 온전히 지니고 있게 된다면, 오히려 수도회의 그러한 재정적 문제조차도 충분히 극복될 수 있을 것이고, 거기엔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풍성한 은총의 열매들이 거듭 거듭 맺어질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는 자에겐 그 모든 것도 곁들어 받게 될 것’이 분명한 까닭입니다.

 

따라서 수도회의 신원과 정체성 회복이야말로 이 시대의 우리 교회, 특히 한국 교회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왜냐면 그것은 바로 우리 한국 ’교회의 혼(魂)’을 되살리는 작업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교회에서 빚어지는 병폐들은 다름 아닌 그 혼(魂) 곧 근본 정신을 잃었기 때문에 파생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본에 서는 자는 그 어떤 상황이 닥칠지라도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어려운 시대일수록 근본에 서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근본의 중심엔 분명 수도회가 놓여 있습니다.

 

다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며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만일 네 마음의 빛이 빛이 아니라 어둠이라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

 

과연 수도회는 교회의 눈입니다. 지나간 2천년 교회 역사를 보면, 수도회가 성하면 교회도 밝았으며, 수도회가 성하지 못하면 교회도 어두웠습니다. 그러기에 그 시대 수도회를 보면 그 시대 교회의 현실을 파악할 수 있다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 교회 자체가 창립기에 유대 사회의 수도공동체였던 꿈란 공동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고, 로마제국의 국교로 공인받고 거꾸로 활력을 잃어가자 사막수도회를 위시로 한 수도회 운동에 의해 다시 교회는 활력을 되찾았으며, 또한 중세 교회의 타락은 수도회의 부패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중세적 타락에서 교회가 건짐을 받게 된 것도 수도회가 중심이 된 쇄신운동 덕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근대로 넘어오며 유럽 교회가 위기에 처하자 다양한 영성을 발견해낸 수도회들이 수없이 창설되어 교회의 현대화 작업을 뒷받침했습니다. 무엇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조차 20세기 초부터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전세계적으로 창설된 수도회들이 교회의 움직임에 앞서 다양하게 펼친 쇄신에의 활발한 노력에 힘입은 바가 큽니다.

 

그러기에 저는 우리 수도회가 올바르게 서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수녀의 본당 파견 문제’는 충분히 깊이 있게 생각해 볼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어쩌면 거기에 우리 수도회들이 자신의 자리에 올바르게 서게 만들 길이 숨겨져 있는 지도 아닐까 여겨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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