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9일 (수)
(홍)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유게시판

북한산을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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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선 [peterpan65] 쪽지 캡슐

2003-01-20 ㅣ No.46944

 어제, 그러니까 1월 19일은 제가 노총각 딱지를 떼고 장가를 간지 1년이 된날이었습니다.

 

장가를 갔다는것은 저의 입장에서 얘기한것이고 어차피 상대가 있어야 장가를 갈수 있으니 그냥 결혼 1주년이라고 거창하게 표현하겠습니다.

 

결혼기념일...남들에게만 있는 특별한 날이겠거니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어찌어찌 살아오다보니 저에게도 이런날이 오더군요.

 

정확히 1년전 이 자유게시판을 뜨겁게 달구어 놓았던(?)저의 나탈리아 낚아채가기를 보시며 축하해 주셨던 많은 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다시한번 깊이 고개숙여 감사를 올립니다.

 

흔히들 결혼전엔 많은 낭만적인 환상에 젖어 나는 이렇게 저렇게 해야지!를 꿈꾸고 살아갑니다.

 

저역시 별반 다르진 않았습니다.

 

프로포즈는 이렇게 받고 싶고 또 이렇게 해주고 싶고...

 

결혼 1주년땐 이러이러하게 해주고 싶고, 또 받고 싶고...등등

 

저도 총각시절엔 누구인지 모를 그녀를 위해 나름대로 낭만과 멋을 가미해서 비장하게 준비해놓은 것들이 있었지요.

 

그런데 이상하대요?

 

그 준비한것이 왜? 현실로 부딪히면 제대로 실행되는게 하나도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경포대...그 겨울바다 앞에서 멋진 프로포즈를 하리라! 마음먹고 그녀를 데리고 가서 깊어가는 겨울밤바다, 영화에서 본것처럼 버버리 깃을 세우고 머리는 바다바람에 날리며 목소리 저윽이 깔고 나름대로 어느 배우의 흉내를 내리라! 온갖 X폼을 잡았건만 자꾸 구두사이로 신경쓰이게 모래가 들어와 구두를 벗어 털었다 신었다 하기를 수십번...목소리 깔고 얘기를 할라치면 방금전 마셨던 소주기운에 딸국질은 자꾸 나오고...그러다 에~에~소리만 나오다 바다바람이 왜그리 찬지 추워서 덜덜덜 떨다가 겨울바다고 뭐고 결국 추위에 못이겨 도망치듯 그 모래사장을 벗어났던 일이 엊그제 같습니다.

 

결국 주위의 식당가, 소위 호객꾼에 이끌려 에라 모르것다! 소주 마시고 혀 꼬부라트리며 뭔 소리를 했는지도 모르게 그렇게 저의 프로포즈는 기억속에서 사라지고...

 

결혼 1주년땐 그녀가 좋아하는 선물을 안기며 방안에 촛불도 밝히고 와인한잔도 곁들여가며 1년간 믿고 살아준 그녀에게 감동의 대사 읊으리 마음 먹었건만 결국 현실에 와선 방안에서 삼겹살 구워 냄새 피워가며 상추쌈에 소주 한잔 곁들이며 우걱우걱 먹느라 정신없었으니...아~생각은 아무래도 생각일뿐이구나!

 

다음날, 그러니까 어제 드디어 결혼 1주년을 맞은 날은 전날밤 삼겹살에 소주마시고 드르렁~실컷 코골다 자다보니 여행간다며 끊어놓은 기차표 시간도 놓치고 뾰루퉁해 있는 그녀의 신경질적인 아침 깨우기에 왠 눈꼽은 그리 끼어서 눈도 제대로 못뜨고 목욕탕으로 끌려가다시피 변기에 앉아 또다시 자고 일어나보니 사태가 장난이 아니구나! 하는 살기를 느끼곤 슬며시 아침밥상머리에 앉아보니 미안한 마음이 하늘을 찌르지 뭡니까?

 

다음 2주년땐 내 정말 잘해주리라 마음먹고 그녀를 겨우 달래어 결국 가까운 근교의 산, 즉 북한산을 올라갔다 왔습니다.

 

북한산은 저에게 있어선 이번 등반이 약 20여번째가 아닌가 싶은데요.

 

약수터에서 약수나 마시고 와야지 하고 마음먹고 갔지만 나탈리아는 기어코 정상에 오르겠다며 고집을 피우길래 그럼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테니 다녀오라!는 저의 충정어린 대사를 이해 못하며 산에서 부부싸움을 하고마는 추태까지 부렸으니 아~어제 북한산에 계신 산신령께서 꽤나 어지러우셨을 겁니다.

 

결국, 그녀의 날이니 그녀의 뜻에 따르기로 정하고 산에 오르는데 여기서 잠시...근데 왜? 결혼기념일은 아내의 날이지요?...그럼 남편은 뭔가요? 머슴인가???

 

어쨌든 그런 불만도 토로할 새도 없이 우리는 약수터에서 위문까지 오르는 그 가파른 길을 네발로 기다시피 오를수 밖에 없었습니다.

 

약수터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위문까지 오르는 길은 그야말로 온통 꽁꽁 얼어있어서 산길이라고는 할수없을 정도로 말 그대로 빙판길이었습니다.

 

겁도 났던것이 만일 이 가파르고 바위험한 빙판길에서 자칫 낙상이라도 하는날엔 그냥 단순한 찰과상이나 타박상이 아닌, 지금 경상도 합천에서 구조작업 펼치고 계시는 119대원 아저씨들까지 부르게 생겼으니 우리의 그 등반은 다소 무모하다고까지 표현할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쩝니까?...마님이 우기시는데 머슴인 제가 빙판길이 아닌 지옥길인들 거부하겠습니까?

 

나탈리아는 겁이난다며 아예 네발로 기는 짐승마냥 오르길래 뒤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왔던 골롬족 괴물 스미골이 연상되어서 제가 뒤따라가며 내내 스미골이라며 놀려댔지요.

 

그렇게 무섭다면서도 끝까지 기어오르는 그녀를 보면서 이세상 여자들의 심리가 다시한번 궁금해지지 않을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오르면서 성호는 또 왜그리 몇번씩 그어대는지...그렇게 믿음이 강하면 그냥 뛰어가지 왜? 가면서 소리는 꺄악! 꺄악! 질러대서 사람 쪽팔리게 만드는지...

 

정상에 있던 사람들이 오죽하면 "무슨일입니까?" 하고 소리쳐 물으니 그순간 쪽팔림에 "이여자 내여자 아니요!"라고 나도 베드로 사도처럼 딱 3번만 배신할까? 하다가 어느 정신나간 새벽닭이 대낮에 울어 줄것인가? 하는 궁금증에 효과음이 없을것 같아 차마 배신하지 못하고 저도 얼떨결에 목숨걸고 정상을 밟고 왔습니다.

 

내려올때는 더 가관이었지만 너무 얘기가 길어질것 같아 여기서 막을 내리기로 하고요.

 

그렇게해서 우여곡절 끝에 내려오니 아침까지 뾰루퉁해있던 그녀의 얼굴에 환한 생기가 돌고 해외여행을 갔다온것 보다 훨씬 좋았다며 아이처럼 기뻐하는 모습에 아! 역시 충복의 기쁨이란 이런데 있는것이구나! 함을 느끼면서 때는 바로 이때다 싶어 노을빛 도는 북한산 자락에서 대사 한구절 읊어주었습니다.

 

그동안 우리 1년간 살아오면서 내가 너무 모자름이 많았소! 어쩌구 저쩌구...

 

어느새 그녀의 눈가엔 촉촉히 이슬이 비치더니 이내 내손을 꼭 잡으며 사랑해! 어쩌구...하는 닭살돋는 대사가 튀어나오니 아! 남성동지 여러분~

 

결혼기념일이란게 뭐, 별거 있습니까?

 

아무리 사고쳐도 막판 마무리만 잘하면 이렇게 도찐개찐 된다는 사실...이 평범한 진리를 깨우친 하루였습니다.*^^*

 

산행을 오랜만에 하고 돌아오니 저야 남자니까 괜찮다치지만 혹시나 나탈리아가 내일 다리에 알이 배겨 걸음이 불편할까싶어 다리 안마를 해주니 저는 그야말로 그녀에게 왕자님의 모습으로 비추어졌을겁니다.

 

어제 저희 부부 북한산 정상에서 두손 꼭 잡고 말없이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1년간 서로를 신뢰할수 있고 변함없이 사랑할수 있게 해주신 감사의 기도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물론, 저희 결혼을 축복해주었던 게시판 여러 가족 여러분께도 감사하다는 말, 잊지 않았고 말이죠.

 

다시한번 여러분께 고개숙여 감사의 인사 전하며 이제 2주년때는 딸린 식구하나 더 데리고 어디 여행이나 다녀올 계획인데 모르겠습니다.

 

그럼 다시한번 감사드리며 저희 부부 결혼 1주년 북한산 등반기를 마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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