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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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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통일 기원 미사 2008년 6월 22일.
마태 18, 19-22.
오늘 복음은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말씀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한 마음으로 청하면 하느님은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몇 사람이 모여서 초라하게 시작된 초기 교회는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살아 계시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이 믿던 바를 표현한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오늘도 같은 믿음으로 모인 공동체 안에 예수님은 살아 계십니다.
‘마음을 모아 청하라’는 말씀은 하느님이 이루어주실 것만 기대하고 기도만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마음을 모은 사람들은 함께 노력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이들은 그분의 일을 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이루어주실 것만 기대하고 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지도자들의 완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치고, 그것을 실천하는 데에 혼신의 힘을 쏟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자비와 선하심을 실천하셨습니다. 그 실천으로 하느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실현된다고 믿으셨습니다.
오늘은 남북통일을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모두 알고 있듯이 우리나라는 일제 점령기를 벗어나면서 타의에 의하여 남북으로 분단되었습니다. 그리고 남북이 각자 독립 정부를 수립하였고, 6.25 전쟁을 겪으면서 남과 북의 적대적 관계는 많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 동안 어쩌다 한 번씩 선심성의 이산가족 만남이 있었고,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개발, 최근 6.15 기념 상봉행사 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개운치도 시원치도 않은 일들이었습니다. 이산가족들이 자유롭게 서로 방문하지 못할 뿐 아니라, 핵무기를 비롯한 대량살상 무기들의 위협은 아직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며칠 전에도 북한은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며 한국을 포함한 주변 국가들을 긴장시켰습니다. 남북의 통일과 민족의 장래를 위한 우호적 대화는 아직 요원한 일로 보입니다. 인권의 문제, 기근, 어린이들의 질병감염 등 우리 앞에는 시급을 요하는 문제들이 있지만, 그런 것을 진지하게 해결하겠다는 의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체제 유지를 위한 편법들만 있습니다.
한반도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의 비극이 지속되고 있는 지역입니다. 우리 민족에게는 치욕적인 사실입니다. 북한은 중국과 비슷한 시기에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도입하여 공산주의 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중국이 그 동안 공산주의가 지닌 약점을 보완하여 14억의 인구가 기근을 극복하고, 경제 대국을 꿈꾸면서 약진하고 있는 반면, 북한은 근본주의적 공산주의를 고집하면서, 인민을 굶주리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무릅쓰고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이 중국 땅을 배회하면서 겪는 참상에 대해서도 때때로 듣습니다. 북한을 탈출하여 중국을 배회하는 여성들이 인신매매되고 있다는 언론보도도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제3국으로 가기 위해 노력하던 북한 사람들이 중국 공안 당국에 체포되어 강제 북송되어 공개 처형되었다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북한에는 아직도 공개 처형이 있고 그 사실을 외국 인권 단체들이 비난하는 보도들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빙산의 일각이겠지만, 이북 동포들이 인간답게 살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로 인정해야 합니다.
이런 비극 앞에 우리 국민의 여론은 분열되어 있습니다. 이북의 참상이나 인권 문제를 덮어두고 경제적으로 이북을 무조건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고, 눈 감고 퍼주기 식 정책으로는 이북의 현실이 개선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분열은 6.25를 겪은 세대와 겪지 않은 세대의 차이에서 오기도 하고, 개인의 입지와 정치적 이해의 차이에서 생기기도 합니다. 우리가 통일을 기원하는 오늘의 미사를 드리는 것은 통일 정책을 논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을 알고 배워서 행복하게 살 것을 바랍니다. 이북의 형제자매들도 하느님이 주신 생명을 자유롭게 살아서 생명의 은혜로움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절망적 현실 앞에 “희망이 없는데도 희망하면서”(로마 4,19) 우리는 오늘 남북의 통일을 위해 기도합니다.
인류역사는 인간 횡포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강자가 약자를 짓누르고 학대하면서 지배한 역사입니다. 기득권자들이 선량한 민초들 위에 군림하고 횡포한 역사입니다. 남과 북의 분단이 지속되고 있는 것도, 이산가족이 아직도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안고 살아야 하는 것도, 그런 기득권자들의 횡포가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비극들 앞에 무력합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단어는 있지만,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예사로 구축(驅逐)하는 세상입니다. 이북동포들은 도와야 하지만 대량 살상 무기의 개발을 돕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한국 전쟁이 발발한 날인 6월 25일에 가까운 주일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정하고 통일 기원 미사를 바치는 것은 우리 민족이 안고 있는 아픔을 우리 모두 함께 바라보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도하자는 뜻입니다. 우리의 절망적 현실을 넘어서 새로운 민족의 미래가 오도록 하자는 우리의 염원을 담은 기도의 날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새로운 미래를 믿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과 같이 우리 모두 예수님의 이름으로 합심하여 기도하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아생전에 하셨듯이, 하느님 아버지를 부르면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실 것을...그러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실 것”(마르 14,36)을 함께 빌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은 현실을 외면하고 이상주의적 낙관론에 빠지지 않습니다. 이북 동포들의 참상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은 그런 참상을 만들고 있는 사람들을 비호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 참상을 이용하여 자기의 정치적 야망을 이루겠다는 것은 악한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그분이 보여주신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을 배워 실천하겠다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우리는 북한의 참상만 생각하고, 속수무책인 현실에 절망만 하지는 않습니다. 멀리 있는 형제의 아픔에 진심으로 참여하는 사람은 가까이 있는 형제자매들의 아픔을 자기 것으로 합니다. 가까이 있는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멀리 있는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못합니다. 북한 동포들의 참상을 바라보고 아파하는 마음은 자기 옆에 있는 아픔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이 우리의 시선과 우리의 실천 안에 살아 있게 합니다. 굶주리고 학대 받는 형제자매들이 같은 하늘 아래 휴전선 너머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북녘 형제자매들을 잊지 않고 그들의 고통에 동참한다면, 우리의 삶이 조금 더 검소할 것이고, 우리가 누리는 것들을 더 은혜롭게 생각할 것입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