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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가르침] 자선과 단식 - 수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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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은 가난한 이와 그리스도를 동일시하면서 가난의 영성과 자선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라는 사실을 가장 잘 알 수 있도록 해주는 행위가 바로 자선이다. 따라서 자선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사랑의 실천인 것이다. 몇 차례 자선을 베풀었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자선의 의무와 권리가 끝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으로 알아보게 하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자선이다. 따라서 자선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증거하는 행위인 것이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우리는 굶주리신 예수님께 빵 한 조각 냉수 한 잔 건네지 않은 채 열두 광주리 가득 썩은 음식쓰레기만 채우며 살아가고 있다. '헐벗으신 예수님'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마저 내어주셨지만 여러분은 주님께 빵 한 조각 나누어 드리지 않습니다. 그런 여러분을 위하여 그분께서는 버림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가 남긴 수많은 강론에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연대가 가득 배어 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몸을 공경하고 싶다면 헐벗으신 주님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이곳 성전에서 그리스도께 비단옷을 입혀 공경하면서 저기 바깥에서 추위와 헐벗음에 떨고 계신 주님을 못 본 체하지 마십시오." 참으로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돌 제대' 위에 내려오시는 그리스도(성체)뿐 아니라 '살 제대' 위에 내려오시는 그리스도(가난한 사람)를 알아 뵙고 공경할 줄 아는 하느님의 사람이었다. 십자가 위에서 "목마르다!"고 절규하셨던 주님께서는 오늘도 여전히 가난한 형제들 안에서 목말라 울부짖고 계신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물을 주시는 분께서 우리더러 물을 달라고 외치시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도 우리 모두를 배불리 먹이시지만 우리는 굶주림과 목마름에 지치신 예수님께 빵 한 조각 냉수 한 잔 건네지 않은 채 열두 광주리 가득 썩은 음식쓰레기만 채우며 살아가고 있다. "가난한 이들에게 필수적인 물건들을 줄 때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의 것을 선물로 베풀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을 돌려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비의 행위를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정의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대 그레고리우스 '사목 규칙' 3권 21장 45절) 자선은 부유하고 풍족한 사람들만 행할 수 있는 특권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선한 의지요 따뜻한 마음이니 가난한 사람들이 훨씬 더 잘 실천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자선이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초상(肖像)이다. 가망 없어 보이는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를 무시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인간의 초상이 새겨진 돈은 하느님처럼 섬기면서도 하느님의 초상이 새겨진 형제들을 멸시하는 자가 어찌 그리스도인일 수 있는가! 황제가 누리는 세상 온갖 부귀영화는 언젠가는 허망하게 스러져버리고 만다. 그따위 황제의 것일랑 황제에게 몽땅 되돌려주고 하느님의 것만 찾을 일이다. 내가 지닌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것이니 하느님의 모습을 담고 있는 가난한 이웃과 힘닿는 대로 나누는 일이야말로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길이다. "성전을 장식하면서 고통받는 형제를 못 본체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을 공경하고 싶습니까? 그분이 헐벗은 것을 볼 때 못 본체하지 마십시오. 그분을 돌보지 않는 동안에는 이곳(성당)에서 비단옷으로 그분께 경의를 표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내 몸이다" 라고 말씀하신 분이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분과 같은 분입니다. 제대 위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는「비단으로 된」제대보가 아닌 깨끗한 마음을 필요로 하시며 많은 보살핌을 필요로 합니다. "성당을 장식할 때 고통 받는 형제를 못 본체하지 마십시오. 그는 돌로 된 다른 성당보다 훨씬 가치 있는 성전입니다."
막시무스
"자선은 영혼을 씻는 또 다른 방법이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죄사함을 받습니다. 죄사함을 받는 세 가지 중요한 종교적인 행위는 기도와 단식과 자선입니다. 영혼을 씻는 또 다른 방법은 자선입니다. 만일 세례를 받고 나서 인간적인 나약함 때문에 죄를 지었다면 자선행위를 통해서 그 죄를 깨끗하게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선을 베풀어라. 너의 모든 죄가 깨끗이 사해졌다.'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죄를 더 자주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바로 자선입니다. 왜냐하면 세례는 단 한 번만 받을 수 있고 세례를 통해서 받을 수 있는 용서도 단 한 번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선을 베풀 때마다 우리는 그 자선 행위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세례와 자선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죄를 용서해주는 자비의 두 원천입니다. 세례와 자선 이 두 기둥을 꼭 붙잡고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늘나라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비록 세례를 받고 나서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자선의 강물에 몸을 담그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비를 얻을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너희가 이 지극히 작은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마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가난한 사람이 곧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은 곧 그리스도에게 자선을 베푼 것이 된다고 교부들은 가르쳐왔다. 아우구스티누스도 말한다. "비록 그 분은 우리가 가진 것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진정한 주님이심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우리가 당신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시기를 바라시면서 황송하게도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몸소 굶주리셨습니다. '진실히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너희가 이 지극히 작은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마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배고프신 그리스도를 조롱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가 되는지 잘 생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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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대 교황
레오 교황은 "사실 우리가 하는 단식의 핵심은 음식의 절제에 국한되어 있지 않습니다. 마음이 불의에서 되돌아서지 않고 혀가 악담을 끊어버리지 않는다면 육체에 음식을 줄이더라도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합니다" 라고 말하면서 단식의 참된 의미를 단순히 음식을 절제하는 것 뿐 아니라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악과의 투쟁으로 보고 있습니다. 히에로니무스는 단식하면서 "노여움에 사로잡혀 하루를 보낸다면 그러한 단식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질책한다 ('에우스토키움에게 보낸 편지' 22 37). 단식은 자신 안에 있는 악마를 내쫓고 죄를 극복하는 무기로 죄에 대한 참회와 마음의 정화 수단이었다. 고대 그리스도교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단식의 실천으로 절약하여 남은 것은 가난한 이들 과부 고아들의 몫이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바라시고 좋아하시는 단식이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하신다. 단식의 실천은 사랑과 정의를 실천함으로써 자신 안에서 이웃을 만나는 구체적 행위였다. 또한 단식은 자신의 삶을 영적으로 살고자 하는 선택이며 인간의 모든 욕망에서 해방되어 자신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었다. 곧 단식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생활 방식을 전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단식의 경기장에서 음식만 절제하면 만족스런 결과를 얻으리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육체에 음식을 줄이면 영혼은 강해집니다. 사람이 외적으로 약간 고통을 당하겠지만 내적으로는 영양을 섭취하게 됩니다. 육체에게는 육적 풍만이 줄어들지만 정신은 영적 즐거움으로 강인해질 것입니다." 레오 대 교황은 박해시대의 영성과 단식의 영성을 연결지어 설명함으로써 단식의 의미와 가치를 발전시켰다. 박해시대에 순교가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는 것이었다면 박해가 끝난 평화시대에 하는 단식도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짊어지듯이 단식을 통해서 주님의 수난에 동참해야 한다. 레오 대 교황은 그리스도인의 단식에는 반드시 영적 단식과 자선과 선행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영적 단식이란 죄와 악행을 끊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병자나 육체적으로 단식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영적 단식은 반드시 해야 한다. "육신이 음식을 단식하듯이 영혼도 악행을 단식하게 됩니다." 마지못해 하는 단식이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단식한 것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 쓴다면 형식주의적이고 율법주의적인 단식이 될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단식하여 절제한 것을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에게 베풀라고 가르쳐왔다. "단식에는 자선과 선행이 뒤따라야 한다" 슬프고 괴로운 시기(사순)가 아니라 빠스카의 신비에 동참하는 것으로 빠스카의 기쁨을 앞당겨 누리는 기쁨의 시기인 것이다. 단식과 자선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단식의 완성은 자선의 실천에 있다. 단식한 금액을 가난한 이들에게 되돌려 주는 자선 행위야말로 단식을 완성하는 행위이며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본받는 것이다. 자선은 그리스도교의 오래된 아름다운 전통이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세례성사 ('세례의 물')와 참회의 성사 ('참회의 눈물')와 더불어 자선을 가장 적절한 행위라고 강조하였다. "물이 불을 끄는 것처럼 자선은 죄를 없앤다"(집회 3 30)라는 말씀을 근거로 레오 대 교황은 "세례의 물과 참회의 눈물이 죄를 씻어주지만 자선도 죄를 없애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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