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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예수님께서는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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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탕속의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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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봉철 [skanenfl] 쪽지 캡슐

2008-06-15 ㅣ No.121288

 
 
친구 마리아나 

   마리아나를 처음 만난 것은 팔레스타인 행정수도 라말라 시립병원에서다. 분리장벽 건설 반대 시위에 참가했다가 이스라엘 군인들이 쏘는 공포탄을 피하려다 넘어져 오른손을 크게 다쳐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을 때, 나를 간호해 주던 간호사였다.
 그 후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이름에서 그리고 히잡(머리수건)을 쓰지 않은 모습에서 그녀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마리아나는 아버지가 병으로 일찍 돌아가신 후 홀로 된 어머니와 형제들을 돕기 위해 근무 시간이 끝난 이후에도 연장 근무를 자청했다. 해서 늘 피곤한 생활이었지만 불평하는 일이 없었다. 자기를 위한 지출은 어떤 지출도 자제하면서 가족을 만나러 갈 때는 언제나 커다란 선물 보따리를 준비하곤 했다.
 마리아나 고향이 나블러스와 제닌 사이에 있는 자바브다라는 토착 그리스도인 마을임을 알게 된 것은 성탄절 즈음에서다. 그 전에도 그녀는 자기 고향 이야기를 종종 했지만 자바브다라는 마을 이름이 너무 생소해서 나는 듣고도 곧장 잊어버렸다.
 그러다 한번은 나블러스에 있는 라휘디아 성당 주임 신부님을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는데, 신부님도 역시 자바브다 마을 출신이었다. 자바브다 마을이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에서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토착 그리스도인들이 사는 그리스도 마을로 유명하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래서 나는 성탄을 고향에서 자기 가족들과 함께 보내자는 마리아나 초대에 호기심을 갖고 기쁘게 응했다.

삼엄한 검문소들

 라말라에서 나블러스까지는 60km의 멀지 않은 거리로, 군사 점령 전에는 당일로 오고 갈 수 있었으나 지금은 많은 검문소를 통과해야 하기에 당일로 다녀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라말라에서 합승택시를 타고 산길을 달렸다. 굽이치는 산등성, 거칠고 메말라 보이는 높고 낮은 산, 수많은 올리브 밭으로 이어지는 독특한 팔레스타인 산야의 아름다움에 빠져들 무렵 무장한 이스라엘 군인들이 차를 세웠다. 검문이었다.
 검문이 시작되자, 이전까지 차안에서 시끌벅적 떠들던 사람들은 일시에 침묵과 무표정으로 익숙하게 신분증을 꺼내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건넸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고압적 태도로 차 안을 살피며 한 사람씩 신분증을 대조했다. 그리고는 한 청년을 차 밖으로 불러내 몸수색을 했다. 차 안에 앉아 이들의 움직임을 바라보는 사람들 사이에 긴장이 감돌고 침묵이 흘렀다. 모멸감과 분노도 감지됐다.
 이런 검문이 세 차례 더 있은 후 드디어 나블러스로 들어가는 관문 하와라 검문소에 도착했다. 라말라 택시는 나블러스로 들어갈 수 없어 모두 짐을 들고 차에서 내려 줄을 섰다. 한 사람씩 통과해야 하는 철문을 지나 보안대를 거쳐 이스라엘 군인들이 앉아 있는 창구에서 신분증을 들이밀고 그들의 허가를 지루하게 기다린 후 다시 합승 택시로 갈아타고 자바브다 마을에 도착했다.
 자바브다는 마을 주민이 5000명 쯤으로, 그 중 3500명이 토착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 1948년 이전까지는 마을 주민 전체가 그리스도인이었으나, 전쟁 이후 무슬림 난민들이 많이 이주해 왔다고 했다. 마을에는 4개의 교회와 2개의 모스크가 있었다.
 1800년대 까지는 모두 그리스 정교회에 속해 있었으나 1890년대 라틴(로마 가톨릭) 교회가 마을에 학교를 세운 후 졸업생들이 라틴 교회로 많이 옮겨가면서 현재는 마을의 400여 가족이 라틴교회에 속해 있다. 200여 가족은 그리스 정교회에, 50여 가족은 동방 가톨릭에, 나머지 50여 가족이 성공회에 속해 있다고 한다.

   "우리는 형제"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곳곳에 성탄 장식이 눈에 띄었다. 성탄절이 이 마을의 가장 큰 명절이라던 마리아나의 이야기가 실감났다. 골목마다 고향을 방문한 사람들의 반가운 만남과 인사로 떠들썩했다. 과거에는 주로 올리브 농사를 지었으나 지금은 많은 젊은이들이 타지에서 직업을 갖고 일하는 관계로 이렇게 성탄절에는 고향을 찾아 모인다고 했다.
 성탄절 전날 오후부터 다양한 행사가 진행됐다. 라틴 교회에서는 어린이잔치를, 성공회 교회에서는 가족 음악회를, 그리고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성극을, 동방 가톨릭교회 앞마당에서는 바자가 열렸다.
 모든 행사에 많은 주민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시간을 순차적으로 안배했다.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 뿐 아니라 마을의 무슬림들도 많았다. 저녁에는 마을광장에서 어린이와 청소년들로 구성된 악대가 앞장서고 네 교회의 신부님과 목사님들을 선두로 주민들이 그 뒤를 따르며 각 교회와 마을을 도는 행사도 이어졌다.
 이 마을 성탄절 전통 중 하나는 성탄절 미사 후에 가족들과 식사를 한 후 친척집을 방문하는 것이라고 한다. 점심식사를 마친 후 마리아나 할아버지와 큰 아버지, 사촌 동생들이 찾아와 이야기를 나눴다.
 전날 밤의 교파를 초월한 성탄 축제가 인상적이었다고 말하자 할아버지는 "내 부모님 세대는 글자를 읽을 줄 몰라 성경책을 읽지 못했던 분들이 많았지만 2000년 동안 공동체 속에 이어져온 그리스도 정신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며 사셨던 분들"이라며 "서구 그리스도교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수 세기에 걸쳐 우리는 아랍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일 뿐 우리를 교파로 구분하지 않는다. 예배 의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보편적 '믿음'을 실천하며 살아간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는 무슬림 이웃까지를 포함해 한 형제다."

   브르킨 성지

 마리아나 할아버지는 자바브다에서 멀지 않은 '브르킨'(broqeen) 성지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셨다.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예수님께서 한센병 환자를 치유했던 곳으로, 이를 기념해 그리스 정교회가 세운 성당은 서안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라고 했다.
 그 후, 제닌 난민촌에서 몇 주를 지내는 동안 제닌에서 멀지 않은 브르킨 성지를 여러 번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전체 주민이 6000명인 브르킨 마을 역시 1948년 이전 까지는 주민의 30~40%가 토착 그리스도인이었으나 현재는 16가족 100여 명 만이 그리스도인으로 성당을 중심으로 함께 살고 있었다.
 이 마을에서 만난 마제드씨는 초등학교 교사로, "소수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다"고 했다.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의 교사나 학생들, 마을 주민 모두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자신의 모든 행동이 곧 신앙이고 믿음의 증거가 된다는 이야기였다.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1-19).
 예수께 돌아온 한 명의 사마리아인, 예수님께 칭찬받았다는 그의 믿음은 2000년을 이어져 오늘날 그들 공동체 삶 속에서도 살아 있었다.

이 승 정(한국 카리타스 대북지원 실무책임자) --- 평화신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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