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6일 (일)
(녹) 연중 제11주일 어떤 씨앗보다도 작으나 어떤 풀보다도 커진다.

자유게시판

제가 사는 곳은..

스크랩 인쇄

조승연 [communion] 쪽지 캡슐

2002-05-22 ㅣ No.33788

전 ’한국’시 ’종교’동에 삽니다.

그 중에도 ’천주’아파트에 사는데요.

제가 사는 ’천주’아파트는 탄탄한 역사와 축적된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건축업계 1위! ’예수’건축회사에서 시공한 아파트랍니다.

 

전 제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 그럭저럭 만족합니다.

지어진지 무척 오래되긴 했지만..

워낙 믿을 만한 건설회사에서 시공해서인지.. 아직까지는 꽤 탄탄하거든요.

다른 아파트는 건축 중에 건설회사가 부도를 내기도 하고, 날림공사로 대강 지어 나중에 주민들이 보통 애를 먹는 게 아니라는데..

저희 아파트는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나 봐요.

 

게다가 저희 아파트는 주거 환경이 썩 괜찮습니다.

교육 환경면으로도 만족할 만 하구요.

그리고 저희 아파트는.. 그런대로 수준이 좀 있어요.

그래서 아직까지도 제 값을 톡톡히 받는답니다.

인근 ’개신’연립이나 ’불’빌라에 비해 뒤지는 것이 전혀 없으니까요.

 

하긴.. 어디라더라..

여기서 버스 타고 한참 가면..

’예수’ 건설회사에서 특별 분양한 ’heaven’ 맨션이라는 데가 있는데요.

거기는 정말 끝내준다고 하더라구요.

절대 녹스는 법 없는 기자재에 최신 공법으로 지어서..

평생가도 보수공사가 필요없다죠.

게다가 마감재도 보통 고급스러운 게 아니구요.

 

하지만..

그 곳은 입주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래요.

청약 경쟁도 장난이 아니구요. 실입주금만 해도 입이 딱 벌어지는 금액이예요.

저 같은 일개 서민이 입주하려면..

그야말로 평생 각고의 노력으로 허리띠 졸라매지 않으면 불가능할 겁니다.

저도 그런 곳에서 살아보는 것이 평생 소원이지만..

워낙 평소 씀씀이가 헤퍼서 마음만 굴뚝같죠.

 

뭐...

하긴.. 어쩌면 전 행복한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저희 동네 바로 옆에 ’사이비’라고 일컬어지는 슬럼가가 있는데요.

여기는 대낮에도 지나가기 힘들 정도로 동네 분위기가 살벌하다네요.

불량 청소년들은 물론이고.. ’증인파’ ’통일파’ ’대순파’.. 온갖 조직 폭력배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는데요...

지나가는 사람 돈 빼앗고, 종종 으슥한 데로 끌고 가서 구타까지 한다나 봐요..

생각만 해도 오싹하지 않은가요?

 

저희 아파트 단지 중앙에는요..

’자유’ 공원이란 한적한 공원이 있어요.

저 역시 오고 가는 길에 종종 들르는데요.

아파트 주민들이 모여 이런 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낯익은 얼굴이 있으면 눈인사도 나누는..

정겨운 곳이죠.

 

공원 벤치에 앉아 있노라면..

귓결에 이런 저런 사는 이야기들이 들려온답니다.

- 그래.. 저녁밥은 해놓고 나오셨수?

- 그럼요.. 설거지까지 다 했죠..

- 하긴 보아하니 워낙 살림을 살뜰히 하더만.. 근데 아직도 바깥양반 약주 많이 해요?

- 아유. 요즘은 사람 됐어요.. 이제야 사는 맛이 난다니까요. 근데 집안은 평안하시죠?

- 난.. 우리 막내 이번에 여우살이 시켰다우.. 사위가 보통 마음에 드는 게 아냐..

- 어머~~ 잘 됐네요.. 축하드려요.. 다 아는 처지에 청첩장이라도 돌리지 그러셨어요..

 

이런 칭찬과 덕담이 오고가는 터에..

아는 사람 없이 혼자 앉아 있어도..

그런 이야기들 주워듣는 것 만으로도 적적하지 않답니다.

 

근데 며칠 전에요..

제가 수퍼에 라면을 사러 가던 도중에 보니까요.

자유 공원 한복판에 어떤 선글래스를 낀 남자가 유인물을 나눠주고 있더라구요.

"자, 읽어보세요. 한번 가지고 가셔서 읽어보시라니까요."

멋모르고 뭔가 싶어 저도 받아봤는데요.

거기에 큼지막한 활자로 이런 제목이 달려 있는 거예요.

"천주아파트 재건축 시급!"

 

응? 이게 뭔 소리람..

찬찬히 읽어보니 한 건축가가 건축 전문잡지, 월간 ’주교회의’에 기고한 글을 인용한 건데요.

천주아파트가 지어진지 워낙 오래되다 보니..

안전진단 결과 건물 자체가 노후해서 이상 징후가 여럿 보인다는 거예요.

지금 당장 재건축이 필요하다고 하더라구요.  

아.. 그랬던가.. 난 미처 몰랐었네..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보니까 그 유인물을 받아든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다음 날..

역시 전 그 ’자유’공원을 지나가게 됐어요.

근데 이번에는 고성이 들려오는 거예요.

왜 싸움구경이랑 불구경은 그냥 지나치기 어렵잖아요.

그래서.. 저도 둥그렇게 모여 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기웃거려봤죠.

 

그랬더니..

아파트 단지에 낯이 익을 만한 분들은 다 계시더군요.

그리고 그 선글래스 낀 낯선 남자와 말다툼을 벌이고 계신 거예요.

- 이봐! 당신 뭐하는 수작이야? 왜 잘 살고 있는 주민들 선동해서 분란을 일으키는 거야?

- 아니, 왜 이러십니까. 제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고..

- 그럼 틀린 말이지. 한번 근거를 대보란 말이야.

- 여기 보십쇼. 저명한 건축가께서 말씀하신 거 아닙니까?

- 나도 건축에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인데.. 이런 사람 이름은 듣도 보도 못했어, 이 사람아..

 

이렇게 해서 말다툼이 시작되더니..

곧 싸움이 일파만파로 번지더군요.

목소리가 커지니까.. 아파트 주민들은 물론, 지나가던 잡상인까지 몰려와 구경을 하더라구요.

구경하고 있는 주민들도 저마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옆사람들과 뭐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구요.

 

그래서 저도 옆에 서 있던 사람에게 물어봤죠.

- 재건축을 하면 어떤데요?

그러자 주위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하더군요.

- 재건축을 하면 좋지.. 여기에 새 아파트가 올라간다고 생각해봐.. 집값도 천정부지로 오를 걸..

- 이 사람이.. 큰일 낼 사람일세..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누만.. 원래 우리 아파트 자리가 노른자위 땅 아니요. 저거.. 분명 무슨 속셈이 있어서 하는 소리라니까..

- 근데.. 우리 아파트가 오래된 건 사실이잖아요. 누구네 집은.. 물도 좀 샌다고 하는 것 같던데..

- 무슨 소리예요. ’예수’건설회사가 어떤 회사인데.. 우리집은 여태 하자 하나 없습디다..

- 에이, 아니예요. 겉으로만 멀쩡했지 벽지랑 장판 뜯어보면 여기 저기 금간 데도 많다니까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 생각엔 재건축도 나쁠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긴.. 우리 아파트가 좀 오래 되긴 했지.. 처음 입주할 때랑은 다른 것 같아.. 난방도 예전만 못 하고.. 요즘 따라 관리비도 부쩍 오르고..

헌집 주고 새집 얻는다면.. 그거 참 괜찮은 거래인걸..

 

그렇게 혼자 갸웃거리며 생각을 하는 중에..

싸움은 점점 더 번지더군요.

보니까.. 502호 아저씨. 308호 아줌마. 104호 할아버지..

아유.. 무슨 일인가 싶어서 죄다 나오셨더라구요.

 

그러다 보니 서로 막말까지 퍼붓고 삿대질까지 하게 됐어요.

그러다가 누군가 팔을 걷고 나섰는데..

동네에 칭찬이 자자한 신혼부부였죠.

상냥하고, 인사성 바르고, 집에 경사 있을 때마다 공원에 떡도 돌리고..

남편도 그렇거니와 색시 역시 하는 말마다 귀여워서 공원에 오가는 사람들의 사랑을 톡톡히 받던 사람들이었어요.

공원에서 아침마다 조깅을 하다가 그게 인연이 돼서 결혼했다죠.

’자유’공원에 드나드는 사람 중에 그 신혼부부 모르면 간첩이예요.

 

그 양반이 나서니..

젊은 양반이 원체 말도 잘하고 아는 것도 많아서..

그 선글래스 낀 정체 모를 남자가 조금씩 몰리더라구요.

그리고 그 집 새댁은 남편에게 물도 떠다주고 땀도 닦아주면서..

’자기 최고야’를 연신 거듭하고 있었죠.

그 신혼부부와 친분이 있었던 동네 사람들이 하나 둘씩 그 신혼부부 역성을 들구요.

 

근데 싸움이라는 것이 그렇잖아요.

어디 고운 말로 하면 싸움인가요..

가만히 구경을 하다보니.. 듣기 민망한 말들이 오가더라구요.

그리고 좀 있다 보니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오더니 앞장서서 그 선글래스 낀 남자를 편들더군요.

개중엔 육두문자를 내뱉으면서 연신 상소리를 해대는 사람도 있구요.

또 이마에 꿰맨 자국이 선명한, 마치 ’어깨’같은 사람이 금방이라도 한 대 칠 듯한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구요.

하도 싸움이 격렬해서 옆에서 보기가 무서워지는 거 있죠..

 

그리고 누군가의 입에서..

그 정체 모를 선글래스 낀 남자가 알고 보니 우리 ’천주’아파트를 날로 먹으려는, ’예수’건축회사의 경쟁사인 ’사탄’건설에서 사주한 사람이라는 말이 나왔어요.

그 ’사탄’건설은 정당하게 수주를 따내는 게 아니라 용역깡패를 동원해서 가난한 서민 등쳐먹는 회사인데.. ’사탄’건설에서 지은 아파트는 허울만 좋았지 몇년도 못가 부실시공임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그런 회사래요.

 

그러던 중에 전 집에 돌아왔어요.

밤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며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쳤죠.

만약 재건축이 돼서.. ’heaven’맨션 못지 않은 아파트가 된다면.. 새집이 생기는 건 그렇다 쳐도.. 집값도 무지 오르겠지.. 꿩먹고 알먹고, 도랑치고 가재잡고, 마당쓸고 돈줍고.. 흐흐흐..

 

그리고 다음 날..

어떻게 됐나 내심 궁금해지더군요.

그래서 공원 쪽으로 발길을 돌렸어요.

근데 아직도 그 싸움이 그치지 않았더라구요.

오히려 그 싸움이 더 크게 번져서..

누가 누구랑 싸우는 건지 모르게, 주민들 간에도 서로서로 고성이 오가고 있었죠.

 

- 재건축이란 건 사탕발림이야. 우리가 농락당하고 있는 거라고. 재건축은 무슨.. 멀쩡한 아파트를 두고..

- 그런 구닥다리 생각을 하시면 안되죠.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 정 당신 집이 못마땅하면 당신 집만 리모델링을 하면 되잖소.

- 저 혼자 사는 집이라면 그렇게 하고도 남았죠. 하지만 여기가 어디 저 혼자 사는 곳입니까? 모두 함께 사는 곳이잖아요..

- 여러 소리 필요없어요. 여하튼 관리사무소에 말하면 ’시노드’ 하자 보수반이 와서 손봐준다니까..

그러던 중에 핀잔도 날아들었어요.

- 꼭 자기 집은 개판으로 해놓는 사람들이 이러쿵 저러쿵 하는 법이야! 그럴 시간 있으면 집안 대청소나 해요! 이꼴 저꼴 보기 싫으면 아예 이사를 가든지..

 

이런 저런 구경을 하다 눈을 돌리니까..

아직도 그 선글래스 낀 남자와 그 신혼부부는 격렬한 말다툼을 벌이고 있더군요.

주민들 중에도 이젠 싸움이 너무 심하게 번졌다 싶었는지..

점잖게 한마디 하시는 아줌마도 계셨어요.

- 색시가 지나치게 신랑 편을 드네.. 어지간하면 좀 참지 그래요..

 

그러자 그 새댁이 평소의 모습답지 않게 한마디 톡 쏘더군요.

- 우리 남편이 백번 옳은 소리를 하는 걸 가지고 왜 그러세요. 그럼 이런 자리에서 가만히 있는 게 잘하는 짓인가요?

그리고 그 신혼부부와 친구인 듯한 사람들도 한마디씩 하구요.

- 평소에 이들 부부가 얼마나 평판이 좋았는데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아줌마 말 조심 하세요.

그러자 그 아줌마는 얼굴이 벌개져서 입속말로 중얼거리시더니 자리를 떠나시더군요..

- 얌전한 줄만 알았더니 보통내기가 아니네그려.. 괜히 끼어들었다가 망신만 당했구먼.. 에휴.. 공원 분위기가 예전같지 않아. 이제 다른 곳으로 산책 다니던지 해야지, 원..  

 

저도 어지러운 분위기에 휩쓸려 어줍잖게 한마디 했어요.

- 보니까 재건축하자는 말도 일리는 있네. 그리고 교양 있는 분들이 왜 이렇게 싸움을 하실까...

물론.. 뭐.. 저도 본전도 못 건졌죠..

그래서 집으로 덜렁덜렁 돌아왔답니다.

 

근데 그 날 저녁이었어요.

난데 없이 안내방송이 나오더군요.

- 에~~ 관리사무소에서 알려드립니다. ’자유’공원에서 소란을 벌이며 ’천주’아파트 재건축에 대한 유언비어를 유포한 자들에 대해 신원조회를 해달라는 주민들의 요청이 있었습니다. 그 요청에 저희 관리사무소에서 자체조사를 해 본 결과.. ’천주아파트 교란 결사대’에 소속된 자들이 상당수 있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착오 없으시길 바랍니다.

 

엥..

순간 낭패감이 들더군요.

괜히 한마디 했다가 망신만 당했네.. 뭐, 그래도 이쯤에서 그 사실을 알게 된 게 어디야..

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어딘가 씁쓸했죠.

참.. 알고 보니 정말 몹쓸 사람이었네.. 그게 무슨 해괴하고 고약한 버릇이람..   

 

그리고 다음날..

비디오를 빌리러 그 공원을 또 지나치는데요.

그 신혼부부를 비롯한 여러분이 모여 음료수를 주거니 받거니 하고 계시더라구요.

- 허허.. 참으로 수고하셨습니다.

- 뭘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는데요. 오히려 아저씨가 더 수고하셨어요.

- 거 보십쇼.. 사람들이 원 지각머리가 있어야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래, 그런 사람같지 않는 자 말에 흔들린답디까. 그렇게 시원찮아서야 ’천주’아파트에 살 자격이나 있는지....

- 그러니까 우리 같은 사람들이 소신있게 주장해야지요. 하마터면 ’천주’아파트를 공중분해시키려는 자들의 간교한 획책에 넘어갈 뻔 하지 않았습니까..

- 어제 관리사무소에서 방송을 하는데.. 속이 다 뚫리더라구요. 어찌나 통쾌하던지..

- 재건축하자는 말에 솔깃했던 사람들, 그 방송 나왔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호호호..

 

그러다가 그 분들 중 한분과 눈이 마주쳤는데요..

나무래는 듯한 그 분 눈초리에 절로 찔끔하더군요.

그래서 머리를 긁적이며 땅만 쳐다보고 걸었죠.

참 나.. 사람 꼴이 말이 아니었죠.

 

이번 소동이 일단락되긴 했지만...

아직은 ’자유’공원이 좀 시끄러워요..

아무래도 주민들 간에 주고 받았던 언짢은 소리들이 약간은 마음에 남아있을테니까요.

이번 소동을 보고 아파트 주민들 수준에 실망했다며 다시는 공원에 발걸음을 안 하겠다는 분들도 계시고..

그런 걸 생각하면 참 가슴이 아프지요.

근처에는 변변한 공원도 없는데.. 정든 공원을 떠나시면.. 그 분들은 저녁 먹고 산책하는 여유를 어느 곳에 가셔서 찾으실런지..

 

어휴. 그건 그렇구요..

솔직히 말하자면..

괜히 멋모르고 한마디 했다 망신을 톡톡히 당하고 나니..

이제는 재건축의 ’재’자만 들어도 화들짝 놀란다니까요.

생각만 해도 머리가 복잡해지네요..

 

사람 사는 곳이니 여기라고 이런 저런 일들이 없으련만..

생각이 달라 얼굴 붉히는 일이 다소 있었더라도..

이왕 지나간 거니.. 툭툭 털고..

김씨 아줌마, 이씨 아저씨..

예전처럼 모두 모여 여러 이야기 나누고 허허허 웃음도 지을 수 있는..

그런 공원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822 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