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5일 (월)
(녹)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예수님께서는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자유게시판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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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점수 [sooyaka] 쪽지 캡슐

2008-06-13 ㅣ No.121250

연중 제11주일  2008년 6월 15일


마태 9, 36 - 10, 8.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열두 제자들을 파견하신 이야기입니다. 그 파견의 동기는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기’ 때문이었다고 복음은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백성을 가엾이 여기셨고 제자들을 파견하신 것은 그들을 위한 배려였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목자는 하느님이십니다.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목자와 양떼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말하는 비유였습니다. 목자는 양떼를 보호하고 인도합니다. 그리고 양떼는 목자를 신뢰하고 따릅니다. 우리가 부르는 “야훼는 나의 목자”라는 성가는 이스라엘이 애송하던 시편(23)입니다. 하느님이 목자로 곁에 계시기에 아쉬울 것도, 무서울 것도 없다는 신뢰를 노래하는 시편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이런 신뢰로써 시작된 신앙은 시간이 흐르면서 율법과 성전이라는 나무만 보여주고, 하느님이라는 숲을 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성전 일을 전담하는 제관들이 생기고, 율법을 가르치는 율사들이 나타나면서,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만을 소중히 생각한 나머지 하느님 없는 성전과 율법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신앙 초기에 깨달았던,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신뢰는 사라졌습니다. 하느님은 이제 바치고 지킬 것만 요구하며 인간을 불안하게 만드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아쉬울 것도, 무서울 것도 없는 이스라엘이 아니었습니다. 제관과 율사들이 기득권자로 행세하면서 그들은 하느님을 두려운 분으로 만들었습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행세하면, 하느님은 엄하고 두려운 대상이 되고 맙니다. 하느님이 사라지면, 오늘 복음의 말씀과 같이 군중은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고 허덕이게 됩니다.


법은 그것을 어기는 자에게 징벌을 준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통념입니다. 그러나 사실 법은 사람들을 위한 배려에서 생긴 것입니다. 도로교통법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그 법은 위반자를 잡아 벌금을 물리자고 있지 않습니다. 그 법은 사람들이 도로 위에서 모두 원활하게 또 안전하게 움직이면서 살게 하기 위해 있습니다. 때때로 그 법을 위반한 사람이 처벌을 받는 것은 모두가 그 법을 잘 지켜서 원활히 또 안전하게 도로를 이용하며 사는 데에 협조하라는 권고입니다. 모든 법은 처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을 위한 약속입니다. 잘 지켜서 우리 모두가 함께 건강하게 또 충만하게 살자는 약속입니다.


유대교에 율법이 있는 것은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모두가 그 사실을 자각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소신껏 살자는 약속입니다. 구약성서가 율법을 하느님이 주신 것으로 말하는 것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동기가 되어 발생한 법이라는 말입니다. 율법은 그것이 만들어진 시대 사람들의 의지와 약속이 담긴 행동지침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하겠다는 뜻과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시대에 따라서 하느님이 함께 계신 사실을 사는 방식과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다릅니다. 모세 시대에는 십계명으로 그 뜻과 약속을 요약하였습니다. 그 후 역사적 상황이 달라지면서, 그 함께 계심을 표현하는 양식도 달라졌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어느 시기가 흐른 다음 성전을 건립하였습니다. 성전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사람들에게 상기시키는 건물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알리는 율법이고 성전입니다.


예수님에게 하느님은 축복이었습니다. 그분에게는 율법도 성전도 축복하시는 하느님을 상기시키는 것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율법이나 성전을 구실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겁내지 마시오. 작은 양떼들! 그대들의 아버지께서는 그대들에게 기꺼이 그 나라를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루가 12,32). 같은 루가복음서는 이런 말씀도 전합니다. “사실 하느님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과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십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여러분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시오.”(6,35-36).


오늘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앓는 이, 죽은 이, 나병환자, 마귀 들린 이들은 유대교의 가르침에서는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벌 받은 이들입니다. 그들 자신의 죄 혹은 그들 부모의 죄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벌 받았다고 자타가 공인하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사람들을 고치고 살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선포되는 곳에 그런 불행은 하느님의 벌로 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심어놓은 죄의식에서 그들을 해방시키라는 말씀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도 불행은 있습니다. 병고와 실패와 죽음은 지상 인간운명 안에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그런 인간 운명의 한계를 넘어서는 길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초인(超人)적 삶의 조건을 얻는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유대교 당국의 미움을 받아 실패한 인물로 죽으셨지만, 하느님은 그를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하여, 초인적 능력을 과시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사람들을 고치고 살리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초인적 능력을 발휘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늘 제자들에게 권하신 것은 사람들이 그런 불행을 바로 보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은 낙원이 아닙니다. 인간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성숙합니다. 인간의 삶에 당연히 들어 있는 불행들입니다. 인간은 그런 불행을 극복하며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불행은 하느님이 주시는 벌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불행을 주셨다고 믿고 체념하는 것은 하느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자비하신 하느님을 믿습니다. 신앙인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힘으로 이 세상의 불행을 퇴치하고 넘어서기 위해 노력합니다. 바로 그런 노력 안에 하느님이 그 생명의 기원으로 살아계십니다. 그런 삶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신앙인은 그 노력을 하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실 것’을 빕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이 함께 계셔서 매일 새로운 노력을 하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바울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우리는 희망을 지향하도록 구원 되었습니다.”(8,24)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은 “절망을 거슬러서 희망하는”(로마 4,18) 길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절망은 사람을 체념하고 죽게 합니다. 절망을 거슬러서 희망하는 사람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신 것은 사람들이 자비하신 하느님을 희망하며 살도록 선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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