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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안의 광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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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가 [하느님의 산 호렙에] 있는
동굴에 이르러 그곳에서 밤을 지내는데
주님의 말씀이 그에게 내렸다.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바로 그때에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주님 앞에 있는 바위를 부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야는 그 소리를 듣고 겉옷 자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동굴 어귀로 나와 섰다.
그러자 그에게 한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야야,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당신의 계약을 저버리고 당신의 제단들을 헐었을 뿐 아니라
당신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이제 저 혼자 남았는데, 저들은 제 목숨마저 없애려고 저를 찾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광야로 가거라
...기름을 부어 아람의 임금으로 세우고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워라
...기름을 부어 네 뒤를 이을 예언자로 세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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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는 기도의 능력으로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는 예언자였다. 엘리야는 거짓 예언자와 싸우는 하느님의 참 예언자로서 하느님의 권능은 그를 통해서 드러났다. 하지만 엘리야는 임금과 그들에게 위협을 당하자 하느님의 산으로 숨어 들어가서는 동굴 속에 자신을 감추고자 하였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그런 엘리야에게 '산 위(사람들의 눈에 띄는), 주님 앞에 서라' 고 독려하신다.
엘리야를 심하게 질책하시는 엄위하신 모습으로 드러내시지 않으시고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로 엘리야에게 사정을 되물으시면서 그의 처지를 배려하며 그를 위로하신다. 그리고는 엘리야에게 다른 임금과 후계 예언자를 세우라고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는 뜻하시는 바를 새롭게 펼쳐 가시려고 그렇게 정하신 것이다.
엘리사의 등장은 새로운 하느님 예언자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례자 요한은 엘리야의 정신과 능력을 지니고 주 예수님의 오심에 앞서 광야에서 소리를 외친다. 광야의 외침은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이를 전하는 소리이다. 광야에 존재하는 '직접적인 유혹'을 물리치고 하느님의 목소리를 '올곧게 듣는' 곳이 광야이다. 광야는 악의 유혹과 세상의 시련을 거치고 성령의 인도를 준비하는 장소이다고 말할 수 있다.
<다음은 야곱의 우물에서 참조>
사막(광야)에서는 사방 어디에서나 늘 똑같은 그림만 보일 뿐이고 정적이다. 그런데도 광할한 사막은 숨을 쉬고 말을 하고 빛을 발한다. 무한성과 영원성에 대한 예감이 사막(광야)에서는 우리 자신의 제한성과 연약성을 만난다. 이런 긴장 속에서 자기 안에 있는 사막(광야)을 발견한다.
각 개인이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세상은 부조리와 불평등으로 가득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자기 중심적 (혹은 인간 중심주의) 사고는 정당한 시각이 아니며 그 근거는 세상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진리에 함축되어 있다. 곧 세상은 하느님의 질서에 맞추어 돌아가지 내 질서에 맞추어 돌아가지 않는다는 자명한 진리가 설파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 삶의 해방과 자유가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한 진정한 관계성'에 숨어 있음을 그리고 '하느님과의 만남'이야말로 삶의 모든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근원적 체험인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깊이 생각하기 위해 사막(광야)으로 갔다. 사막(광야)에서는 사방 어디에서나 늘 똑같은 그림만 보일 뿐이고 정적이다. 그런데도 광할한 사막은 숨을 쉬고 말을 하고 빛을 발한다. 무한성과 영원성에 대한 예감이 사막에서는 우리 자신의 제한성과 연약성을 만난다. 이런 긴장 속에서 자기 안에 있는 사막(광야)을 발견한다.
안토니오 성인을 포함하여 초기의 수도승들은 단지 물질적 쾌락을 상대하지 않기 위하여 또 자신들의 '세상' 도피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사회적 기대치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더 깊고 풍요로운("버려라") 실존에 '깨어 있기 위하여' 사막으로 간 것이다. 토머스 머턴은 이렇게 말하였다. "사막의 교부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다운 자아를 추구했다. 그리하여 교부들은 세상 속에서 만들어진 자아를 완전히 거부하였다. 그들은 알려져 있지 않은 또한 자유롭게 선택하는 하느님의 길을 찾았다. 그 길은 사람들이 앞서 그려놓은 길, 다른 이들로부터 전해 받은 길이 아니었다. 교부들은 다른 사람이 고정시켜 놓은 '주어진 하느님' (귀로만 들어왔던 하느님)이 아니라 그들 홀로 발견할 수 있는 하느님을 추구했다" 고비 사막을 넘었던 메스너 역시 사막에서 숨처럼 단조롭고 너무나 고요하여 물을 마시거나 귀를 기울이기 위해 멈출 때마다 그 소리에 놀라곤 하였다. 그곳에선 고요와 드넒은 대지가 마치 시간을 삼켜 버린 것같았고 귀청을 통해 들리는 소리를 통해서만 대지의 살아 있는 움직임을 느끼게 했다. 우리는 예전보다 더 나은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지만 정작 마음 속에 도사린 사막(광야)은 무덤과 같다. 무감각한 삶은 온갖 소비주의 문화에 길들여진 채 번잡하다. 참된 행복에 이르는 길은 미로에 가로막힌 채 우리 영혼은 방황한다. 충만한 삶이란 그저 먹고 마시며 들떠 있는 소란스러움이 아니다. 충만하게 살아 있다는 것은 자아의 깊은 부분을 살아내는 것이다. 욥에게 있어서도 자신이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받고 있으니 세상과 하느님은 정의롭지 못하다고 고발한다. 그러나 하느님과 만남을 통해 이러한 태도는 인간의 경험과 이성만을 앞세운 이기적인 판단이요 오만이었음을 깨닫고 자신이 지금까지 믿어온 '귀로만 들어 왔던 분'이었음을 고백한다. '귀로만 들어 왔던 하느님'은 '내'가 아닌 '그들'에 의해 간접적으로 (직접 체험이 아닌) 체험된 하느님일 뿐 실상 내 실존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존재일 수 있다. 아무리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실제의 삶이 행복과 구원으로 충만되지 않는 이유는 그저 남들의 신앙과 화려한 이론에 의해 소문으로만 전달된 하느님을 알고 있을 뿐 자신의 내면에서 체험되고 살아 계시는 하느님을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자신을 사랑의 시발점으로 삼았지만 이제부터는 죽기까지 사람을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