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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시복된 프라도회 창설자 슈브리에 신부는 가난한 이웃과 함께 하신 주님을 가까이 따르는 삶을 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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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선 1975년 김추기경에 의해 출발
서울 대구 광주 등서 80명 회원 활동
프라도회가 오는 예수성탄대축일로 탄생 150주년을 맞는다. 또 올해는 창설자 슈브리에 신부의 시복 20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하다. 프라도회의 역사와 정신, 한국 프라도 사제회 책임을 맡고 있는 주수욱 신부 인터뷰를 통해, 오늘날 수많은 도전을 받고 있는 교회가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해 묵상해 본다.
문) 그리스도는 이 땅에 왜 왔는가?
답) 인간이 파괴되었기에 그 인간성을 회복하고 구원을 주기 위해 오셨다. 오신 모습은 가장 가난한 모습 그 자체셨다.
문) 교회는 그리스도를 따르는가?
답) 그렇다.
문) 그럼 교회는 가난한 모습으로 오셔서 가난한 이들 속에 살으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하는가?
답) 그렇다. 교회는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강생의 신비를 정확히 인식하고 구체적 삶 속에서 구현해 나가야 한다. 가난한 이들이 스스로 은총 받은 존재임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프라도회 150년의 첫 출발은 이처럼 ‘당연한 문제’에 대한 자각 하나로 시작된다.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인 1856년 성탄 절 밤. 프랑스 리용의 앙트완느 슈브리에 신부는 두 손 모으고 강생의 신비를 묵상하고 있었다.
그 때 자신의 생애와 사제 활동의 방향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헌신하라는‘빛’을 받는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나를 회개시킨 것은 강생의 신비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또 죄인들을 회개 시키기 위해 땅위에 내려 오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더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 가까이 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여러분도 우리 주님을 더 가까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슈브리에 신부는 가난한 이웃과 함께하신 그 주님을 가까이 따르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철저한 가난을 실천했다. 이후 많은 사제들이 슈브리에의 정신을 따르기 시작했다.
150년 동안 이어 내려오며 프라도 사제회는 한 번도 이 원칙을 버리지 않았다. 이들은 ‘의식주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으로 만족하며 지상의 재화를 포기하고 버리는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가능한 대로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처럼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공동 재산으로 내 놓고, 가진 것을 우리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의 것으로 여기며 살아간다.
프라도 사제회의 특징은 재속회에 관한 교회법에 의해 지배를 받는 교황청 설립의 재속 사제회라는 점. 따라서 프라도 사제들은 수도회가 아닌 각 교구에 속해 살아가며 주교의 협력자로서 사제의 직분 안에서 교구 주교로부터 직접 교회법적인 사명을 받는다.
한국 프라도 사제회는 김수환 추기경에 의해 1975년 출발했으며 현재 정식 서약회원은 서울 대구 광주대교구 등 전국 교구에 80여명이 활동하고 있다. 공식 회원은 아니지만 프라도 사제회에 관심을 갖고 모임에 참석하는 사제들을 모두 포함하면 120여명에 이른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6년 10월 7일 프라도 사제회 창설자인 슈브리에 신부를 복자품에 올린 후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프라도 사제회가 아니라 이 시대 교회를 향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가난한 자들이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도록 가난한 사람들을 향해 가십시오. 그리고 프라도인으로서 여러분들의 특징은 늘 소박함과 가난함이어야 합니다. 강한 신앙심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십시오. 늘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에 기초를 두십시오.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먼저 가서 만나야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 우리는 늘 그리스도와 교회의 이름으로 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터뷰/프라도 사제회 한국 책임자 주수욱 신부, <우광호 기자, 기사입력일 : 2006-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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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브리에 신부의 생애>
19세기와 20세기의 수많은 공허한 환상들 속에서도 인간의 현실적 조건이 중요하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활을 통해서 현실이 관념론 이상의 것임을 보여 주었다. 앙트완느 슈브리에(Antoine Chevrier) 신부는 바로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19세기 중반 프랑스 제2의 도시 리용에서 사제가 된다는 것은 어느 특정 집단에 속함을 뜻했다. 그런데 온화하며 혁명적인 데라고는 전혀 없는 앙트완느 슈브리에는 성직자들의 모임에 들어가는 것을 차츰 기피하게 되었다.
그 당시 리용 교구의 사제들은 부르주아 집단을 추종했는데 그들에게 슈브리에 신부는 괴짜이기도 했으며 방해꾼이기도 했다. 자신들처럼 생활하지 않고, 리용 근교의 하층 프롤레타리아 비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또 집단적인 파견에 더 익숙한 선교사들에게도 그는 역시 상식을 벗어난 기인으로 보였다. 그 이유는 그가 남의 시선을 끄는 화려한 수단으로써가 아니라 일상의 단순한 복음 전도를 통해 사람들을 회개시키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성직자 집단들이 당연하게 강요한 틀을 거부하기 위하여 앙트완느 슈브리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싸움을 계속해야 했다. 그 무기는 이전에는 아씨시의 프란치스코가, 또 그 이후로는 요한 23세가 사용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 즉 인내, 화합, 친절, 자애, 온유 그리고 끈기 있는 부드러움이었다.
그 싸움에서 앙트완느 슈브리에를 지탱해준 것은, 그가 진실로 가난한 이라고 생각한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난한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에 대한 충실이었고, 또 모든 불행한 이들에 대한 조건 없는 충실이었다.
그는 그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 나머지 가정을 떠났고, 당시 사제들의 생활 조건도 버렸으며, 단순히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자선가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스스로 가난한 이를 섬기는 이가 되었다. 그가 섬기고자 했던 주인은 가난한 그리스도요, 그가 구현하고자 했던 세계는, ‘부자나 권력자의 세계가 아니라 약한 이, 비천한 이, 가난한 이의 세계이며, 지배 계층의 세계가 아니라 민중의 세계요, 증오와 지배의 세계가 아니라 형제애와 사랑의 세계’였다.
앙트완느 슈브리에는 자신이 속한 그룹의 쇠퇴와 경직된 상태를 알리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그룹 자체를 변화시키고자 노력했다. 그가 시도한 방법은 로욜라의 이냐시오가 처음부터 매우 잘 짜인 계획에 따라 창립하고자 했던 수도회, 즉 ‘예수회’ 란 확고한 조직을 만들었던 방법과는 다르다. 슈브리에 신부는 비범한 조직가가 아니라 단지 보잘 것 없는 일상적인 일의 힘을 믿는 끈질긴 장인이었다. 그래서 19년 동안 이 방법을, 더디기는 하지만 충실하게 실행했다.
그는 대단한 역량을 지닌 사람은 아니었으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자신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새로운 시대의 사제들은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통찰력을 항상 지니고 있었다. 그는 교회가 존재하는 한 이 세상 사람들, 특히 가난한 이들과 비그리스도교인들에 대하여 선교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슈브리에 신부는 대단한 정신력도 큰 이상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눈에 띄지 않는 존재,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는 사람, 그런 ‘특징’ 없는 사람이었다. 주교나 다른 사제들도 ‘그에게 수완이 있다.’ 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가 새로운 사제회를 창립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자신을 전혀 내세우지 않았던 그의 생애를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그가 그 시대와 오늘날에 어떤 점에서 예언자의 역할을 하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모방해야 할 모범은 아니다. 그 자신이 우선 모방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가르침이나 복음적인 가난의 권고에 따라 자기 자신을 뛰어넘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게 된 것이 아니다. 시 외곽에 있는 교회에 파견되어 가난한 이들의 세계를 발견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그 사람들을 알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새로이 알게 된 이 세계 앞에서 스스로 묻고 얻은 결과는, 훌륭한 해답도 사업도 아니었고, 날마다 복음을 전하고 복음에 따라 사는 것이었다.
슈브리에 신부는 ‘본다’는 것과 ‘산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는 그저 자신의 운명을 떠맡고 있는 비천한 이들의 세계에 속해 있었다. 그는 농민들로부터는 확고한 현실을 얻고자 하는 욕구를, 육체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일상 생활로부터는 진실한 행동을 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졌다. 결국 그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너무도 강한 일상적인 양식(良識)으로써 복음적인 생활을 진실하게 했던 것이다.
그의 생애는 사제들이나 평신도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오늘날의 삶에 어떤 빛을 던져 줄 수 있을 것이다. (장 프랑소아 식스 <<슈브리에 신부의 삶>> 머리말 중에서 일부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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