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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막달라 마리아 처제에 대한 그리움 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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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예수성심성월이 오면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아름다운 추억이 하나 있다.
50이 채 안 된 나이로 주님 품으로 가버린 처제 생각이 날 때 떠오르는 기억이다.
말기 암 환자인 그녀 막달라 마리아는 나를 형부라고 불렀다. 이웃에 사는 교우였을 뿐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사이었지만 내 집사람 데레사를 친언니처럼 따르면서 나는 그녀의 형부가 되었다. 멀리 사는 이종처제만 있을 뿐 내게 처제가 없어서 형부라는 칭호를 듣지 못하다가 그녀가 형부라고 해서 그랬을까 정말로 내 처제처럼 느껴졌고 암 투병으로 새카맣게 탄 그녀의 얼굴을 볼 때마다 늘 안쓰럽고 사랑스러웠다. 처제의 남편 베드로는 샷시 같은 철 구조물 기술자로 내가 다니는 성당에 항상 붙어살다시피 하며 많은 봉사를 했다.
아내와 그녀는 성령기도회 활동에 깊이 빠져 있었다. 특히 치유피정에 열성이었다. 그녀가 말기 암 환자였기에 어쩌면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마음이었으리라. 성령기도회에서 주관하는 피정만 있으면 아내와 그녀는 어디든지 달려갔다. 특히 꽃동네 오웅진 신부님, 고마리아 자매님이 오신다고 하면 5지구뿐만 아니라 수원이든 강원도 모곡기도원이든, 동성고등학교든 낮이며 밤, 밤샘하는 철야까지도 열심히 다녔다. 때때로 내가 승용차로 피정하는 데까지 태워다 주고 올 때도 여러 번 있었다.
성령기도회 피정이 대부분 공휴일이거나 주말에 일정이 잡혀 있어서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지만 그럴 때마다 찬밥을 상에 차려먹으면서도 나도, 우리 아이들까지도 불평하는 일은 없었다. 아이들 친구 엄마이기도한 막달라 마리아가 그렇게 해서라도 기적적으로 병이 빨리 나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두들 그런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러던 막달라 마리아가 더는 가망이 없다고 하며 성 바오로병원에 입원을 했을 때, 그때 내 마음이 얼마나 아프든지 ........... 나는 데레사가 집에서 성모상 앞에 촛불을 켜놓고 하는 9일기도에 함께 동참하면서 막달라마리아를 위한 9일기도가 끝날 때까지 우리부부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평일미사에 참례하기로 했다. 참으로 열심이었다. 새벽미사이든 저녁미사이든 눈이 오든 날씨가 춥든 개의치 않고 열심히 참례했다. 그렇게 하면 주님께서 우리 내외의 정성을 더 크게 받아주시리라 여겼다.
막달라 마리아의 회복을 지향하면서 매일미사에 참석하던 어느 날, 나는 언뜻 어떤 영감 같은 것을 느끼고 주임신부님의 강론말씀을 주보용지 여백이나 ‘오늘의 말씀’책 여백에 펜으로 받아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마치 일기를 쓰듯이 매일매일 미사노트를 만들었다.
신부님의 주옥같은 말씀을 병실에 누워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내가 만든 미사노트를 그녀가 읽는다면 그녀가 미사에 참례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오로지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신부님 강론말씀을 받아쓰기하여 정성을 다해 매일매일 미사노트를 만들었고, 10일치씩 대학노트에 깨끗한 글씨로 정서를 해서 그 노트를 아내 손에 들려 병실에 있는 그녀에게 전달했다.
그녀가 병실에 누워 그 노트를 읽으면서 미사에 참석한 것 같은 마음을 느낄 수 있는데 혹시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심지어 미사분위기까지 ( )속에 (신자들 웃음)이라는 부기를 하기도 했다.
0월 0일 성0000축일 (맑음) 제1독서; 시편 제112장 1절~ 제2독서; 요한1. 1;10~13, 15~17 오늘복음; 루가 3장4절~ 신부님 강론말씀; 오늘은.....
위와 같은 순서로 ‘오늘의 말씀’에 나오는 성서구절을 한 글자도 빼지 않고 그대로 적고, 대학 때 배운 속기실력으로 주임신부님 강론말씀을 받아썼다가 밤에 퇴근해 와서 신부님 강론에 내 나름대로 양념까지 넣어서 더 재미있게끔 이야기를 보태기도 했다.
매일 그렇게 하다보니 때로는 쉬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내 노트를 읽고 본인이 직접 미사에 참례한 것 같은 평안함을 느끼리라 상상하니(그녀가 아내에게 그런 말을 했다고 하였다) 그 일이 그저 즐겁기만 했다.
그렇게 만들어 보낸 대학노트가 1권 2권 3권 4권..... 어느 날부터 그 노트가 내가 다니던 답십리성당 교우들 사이에 서로 돌려보는 노트가 됐다. 레지오 활동이나 병문안을 갔던 신자들이 그녀 병실에 갔다가 읽어보고 돌려주마하며 가져나온 노트가 우리본당 신자들 사이에서 읽을거리로 돌아다닌 것이었다.
그렇게 약 70일분 정도를 썼을까 본당주임신부님이셨던 이기정 신부님께서 어느 날 나를 부르셨다. 그 노트가 결국은 주임신부님 손에까지 들어간 것이었다.
“내년이 은경축이 되는 해여서 안 그래도 내가 책을 한 권 내서 신자들에게 나눠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권 형제님의 이 노트를 좀 빌려서 썼으면 싶다”는 말씀이셨다. 강론을 하신 원주인께서 자기 글을 쓰시겠다는 데야 당연히 돌려드려야 하는 것이고 또한 나로서는 얼마나 영광스런 일인가! 흔쾌히 승낙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책이 바로 이기정 신부님의 “총각이 무슨 주례를 봐?”였다.
출판 과정에 내가 신부님께 소개한 중앙일보사 출판부(현 랜덤중앙M&B) 요청으로 신앙적인 글이 원래 강론노트에서 많이 빠지고 그 대신 신부님의 신변잡기가 많이 포함되는 식으로 약간 각색되었지만 그 책의 단초는 바로 내가 옮겨 쓴 신부님의 강론노트였다.
이기정 신부님께서는 그 책을 가톨릭출판사에서 내시고 싶어 하셨는데 내 요청으로 중앙일보사로 넘기시는 바람에 신앙적인 글들이 많이 빠진 데 대한 아쉬움이 남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 책이 4쇄까지 나가는 히트를 치고, 신부님께서는 중앙일보 출판사에서 받으신 인세 전액 천만 원에 가까운 거금을 당시 신축 중에 있었던 답십리성당 교육관 건축헌금으로 모두 봉헌하셨다.
내 처제 막달라 마리아가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기적이었고, 또한 사랑이 더 큰 사랑으로 메아리 친 결과였다.
그녀 막달라 마리아는 이제 저 세상에서 하느님 품에서 편히 쉬고 있을 테지만 지금도 답십리성당 앞을 지날 때마다, 특히 6월 예수성심성월 때는 더욱 더, 지난날 그녀 생각에 내 가슴 한 귀퉁이가 아리하게 아파오는 것은 지금도 어쩔 수가 없다.
50도 채 못돼 주님 품으로 떠난 그녀 내 처제, 막달라마리아. 이제는 고통이 없는 그곳에서 주님 품에 안겨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있으리라고 그때마다 스스로 위안은 하지만 고통으로 새까맣게 탄 얼굴에 뽀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하얀 박꽃처럼 쓸쓸히 웃던 그녀 모습이 문득문득 보고 싶을 때는 아직도 내 콧등이 시큰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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