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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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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0주일 2008년 6월 8일
마태 9,9-13.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세리인 마태오를 당신의 제자로 삼으시고, 그의 집에서 식사하신 이야기입니다. 그 식탁에는 세리와 죄인들도 함께 있었고, 그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런 사람들과 어울린다고 불평합니다. 그 불평에 대해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은 병든 이와 죄인을 위해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라는 호세아 예언서(6,6)를 인용하셨습니다.
세리는 그 시대 유대인들이 증오하는 세금 징수원입니다. 세금은 팔레스티나를 지배하던 로마 제국을 위한 것이었고, 그 시대에는 오늘과 같은 합리적 세무 행정이 아니었습니다. 로마 정권은 임의로 세금을 부과하고, 세리는 자기가 맡은 지역에 부과된 세금을 선납하고 세금을 징수할 권한을 받습니다. 일종의 세금 징수 하청업자인 셈입니다. 세리는 자기가 납부한 만큼의 세금만 징수하는 것이 아니라, 주민을 착취하여 부자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주민은 세리를 합법적 도둑이라고 미워하였고, 유대교 당국도 세리를 죄인으로 분류하였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죄인으로 통하는 사람은 그 외에도 많았습니다. 율법, 특히 안식일 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과 성전에 십일조를 납부하지 않는 사람도 모두 죄인이었습니다. 세리를 포함하여 도둑과 강도는 말할 것도 없고, 목자와 선원도 죄인이었습니다. 목자는 양떼를 몰고 다니면서 사람들이 힘들여 가꾸어 놓은 농산물에 피해를 주기 때문이고, 선원은 안식일에도 항해하는 배에서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고 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체적 장애를 가진 이와 병든 이들도 모두 죄인이었습니다. 죄가 있어서 그런 불행을 대가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유대교에는 죄인이 많았습니다. 그들이 죄인이기에 하느님이 그런 불행을 주셨다는 논리입니다. 모든 일을 주재하시는 하느님이시기에 병고와 불행도 당연히 하느님이 주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 한 사람을 고치신 이야기가 마르코복음서(2,1-12)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대 죄가 용서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신 것은 하느님이 그런 고통과 불행의 원인이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은 용서하고 살리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죄인들과 세리들과 어울리셨다는 것도 하느님은 그런 사람들도 버리지 않고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인간을 버리고 단죄하고 소외시키지만, 하느님은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면서 함께 계신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 말합니다. 같은 사람들끼리 어울린다는 뜻입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 예수님도 같은 죄인이라고 바리사이들은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 불평을 지적하였습니다. 그 불평에 대해 예수님은 당신이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세리와 죄인들을 위해 하실 일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호세아 예언서를 인용하면서 하느님에게 소중한 것은 제사가 아니라, 이웃을 위한 자비라고 말씀하십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가르치는 사람이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율법이 절대적이라고 믿었습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만이 하느님을 인간이 할 일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이 상상하는 하느님은 이 세상의 통치자와 다르지 않습니다. 법을 주고, 그것을 지키고 제물을 바칠 것을 요구하며 기다리는 하느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해 전혀 달리 생각하셨습니다. 하느님에게는 율법 준수도, 제물 봉헌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은 이웃을 위한 우리의 배려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병든 이를 돌보는 의사와 같이 오셨다는 말씀으로 그 사실을 오늘의 복음에서 지적하셨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죄인으로 낙인찍히고 버려진 이들을 돌보기 위해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같은 마태오복음서는 최후심판 이야기(25, 31-46)에서 이웃을 위한 배려가 하느님이 인간을 보시는 최종적 기준이라고 말합니다. 굶주린 이, 목마른 이, 헐벗은 이를 위한 자비로운 배려를 하느님은 요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인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으로부터 자비를 배워서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병든 이를 그 병으로만 판단하지 않으시고, 죄인을 그 죄만으로 판단하지도 않으십니다. 모든 사람이 건강하고 당당하게 살면서 당신의 자비를 실천하여 당신의 생명을 사는 자녀가 될 것을 원하십니다. 대자연에는 시행착오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태어나는 장애인들이 있고, 그래서 발생하는 불치의 병들이 있습니다. 대자연이 일으키는 불행들도 있습니다. 최근 미얀마에는 사이클론, 중국 쓰촨성에는 대지진이 있어 많은 인명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세상에도 시행착오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각종 사고들이 있습니다. 대자연과 이 세상의 시행착오들은 항상 비극을 초래합니다. 인명을 희생시키고 많은 이들이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합니다. 인간이 만든 계획들이 시행착오를 일으켜 비극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각종 실패들이 있습니다. 한두 사람이 승리자가 되어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는 운동경기의 이면에는 각고(刻苦)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발생하는 패자들이 있습니다. 대자연의 시행착오와 인간이 발생시킨 각종의 재해와 실패를 하느님이 주신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불행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가난해도, 굶주려도, 병들어도 사람이 행복할 것을 원하신다고 예수님은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용서하고, 고치고 살리는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믿으셨습니다. 그 하느님의 생명을 사는 자녀가 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자기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고 지키고 바쳐서 자기 한 사람 잘 되는 길을 찾는 데에 신앙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노예가 주인 앞에서 가지는 자세이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녀의 자세가 아닙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의 자녀는 아버지의 자비를 시야에서 잃지 않고 그 자비를 자유롭게 실천합니다.
하느님에 대해 알아들은 사람은 그분의 일을 실천합니다. 그 실천을 하는 사람이 참으로 하느님을 알아들은 사람입니다. 유대교가 죄인이라고 매도하던 병자와 세리들도 하느님이 버리지 않으신다고 가르친 예수님입니다.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모든 사람이 행복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한 사람도 버리지 않으신다고 예수님은 선언하셨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도 사람을 버리지 않는 것이 하느님의 자녀가 할 일입니다. 자비하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주변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결단하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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