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5일 (월)
(녹)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예수님께서는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자유게시판

'제물의 힘'과 '사랑의 힘'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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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이수 [tpwkdygks624] 쪽지 캡슐

2008-06-05 ㅣ No.121068

제대 (제단) = 예수 그리스도, 제물 = 예수 그리스도, 제관 =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인간이 '제물의 신'이 되어 보려는 헛된 이기심과 질투심으로 하느님께 '불경스런 죄악'을 저지르는 유혹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너희는 또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무엇이 더 중요하냐? 예물이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신약성경 마태오 23, 18 - 19>
 
너희는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무방하지만
그 제단 위에 있는 제물을 두고 한 맹세는 꼭 지켜야 한다.' 하니,
어느 것이 더 중하냐? 제물이냐? 아니면 그 제물을 거룩하게 만드는 제단이냐?
<신약성서 마태오 23, 18 - 19>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동물 혹은 인간의 희생제물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께 대한 불신을 가지고 인간이 중심이 되어 인간을 '제물의 신'이 되려고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인간이 바치고자 하는 제물에 대해 카인이 다투어 아벨을 살인한 것은 '세상의 죄악'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유일하신 제물이 되셨습니다. 제물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제물과 동일하신 바로 그분 제단(제대)이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나에게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았더라면 너희는 무죄한 사람들을 죄인으로 단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태오복음서 12, 7>
 
인간이 '속죄의 제물'이 되신 하느님을 거역하고 제물(인간을 제물의 신으로)과 제단(그리스도 예수님)을 구별시키고자 하는 것은 더러운 소행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제물로 살아 계시는 것이 아니라 - 사랑으로 살아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제물 이전에 먼저 사랑이셨습니다. 십자가의 피는 '제물의 피' 보다도 '사랑의 피' (제단)가 먼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  항상 새겨두어야 하는 생명의 진리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로 일치(그리스도의 지체)되어 온전히 머물 때,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되어 천주 성부께 모든 영예와 영광을 드리는 거룩한 산 봉헌(그리스도 그분께 한 몸으로 결합되어 거룩함)이 됩니다.
 
율법 아래에서는 '죄의 힘'이 판을 쳤습니다.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 알려 줍니다. 사실 율법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율법의 정신인 사랑과 자선을 소홀히 하고 법의 형식만을 중시했던 것입니다. 법의 형식만을 오직 추구하다보니 백성들 모두가 '죄의 힘' 아래에 억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죄의 힘'은 '죽음의 힘'을 이루었습니다.
 
"죽음의 독침은 죄요
죄의 힘은 율법입니다"
<1고린토서 15, 56>
 
사람의 영혼을 '죄의 힘'에 가두어 놓고 그들은 '죄인의 힘'을 빌미로 자기의 뱃속을 채우기 위해 환전상과 장사꾼들과 타협을 했습니다. 그들은 '동물의 피'를 죄인들의 몸에 뿌릴 번제물과 속죄제물을 준비(구입)하도록 율법의 규정들을 아주 세밀하게 꾸몄습니다. 백성 모두를 심하게 '죄(인)의 힘' 안에 억눌리게 하여 그들은 환전상과 장사꾼들과 함께 검은 재물(돈)을 탐했습니다.
 
구원의 때가 차자 광야에서 세례자 요한이 나서서 '동물의 피'가 아닌 '회개의 물'을 사람들에게 부어줍니다. 동물(제물)을 구입할 수 없었든지 혹은 온갖 연유로 소외 되었던 많은 '가난한 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세례자 요한 때문에 돈을 끌어 모으지 못하게 되자 재물을 탐해 오던 속이 뒤집어 졌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물에 대해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러던 중, 마침내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성전'을 정화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오늘날에서도 그리스도 주님의 '십자가 피'를 조롱이나 하듯 사람들의 영혼을 현혹하여 그 후손들이 '죄의 힘'을 내세우고 '죄인의 힘'을 되살리며 '제물의 힘'으로 영혼들을 결박시키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죽음에서 구원 받도록 '피조물의 피'(제물)를 또다시 요구합니다.
 
이들은 율법 아래에서의 물적인 재물을 탐하였던 것과는 달리 성령의 법(은총) 아래에서 영적인 재물을 탐하게 됩니다. 또다른 회개의 구원, 또다른 성령의 믿음, 또다른 주님의 복음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바로 영적인 감흥(제물의 신)을 맛보고자 하는 탐욕(탐닉)에서 났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사랑하라"는 계명을 남겨 주셨지만 이를 소홀히 하고 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만나게 해 주신 것은 주님께서 친히 하신 일입니다. 사랑으로써 그것을 품어 안으려 하지 않고 피하기 위해 여러가지 과오를 범하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을 너무 사랑합니다. 평판이 두렵고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두려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성 마르가리타)
 
율법 시대에서 '죄의 힘'이 설치고 오늘날에도 '죄의 힘'이 설쳐댑니다. '사랑의 힘'은 소수의 부르심을 입은 이들에 의해 유지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 시대서도 올바로 회개하여야 '자신의 성전'은 정화되어 집니다. 이 성전은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오늘의 성전 정화는 예수님의 말씀과 성체로 이루시는 정화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모두 순결한 창녀가 됩니다. 비록 창녀일지라도 순결한 것입니다. 거룩한 것은 바쳐지는 제물이 아니라 제단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고 하느님께 자기만을 위해 드려지는 제물(카인의 제물)은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이 제물은 존재하지 않으며 죽은 것입니다. 성령의 힘으로 '자기'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안에서 서로 하나 되어 (자기가 아닌 그리스도로 온전히 하나이다) 사람 사이에서 사랑으로 서로 용서하고 서로 축복하는 영혼으로서 예수님의 제단에 정결하게 놓을 수 있는 살아있는 자신의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실천하는 이들은 실천하는 힘의 근원을 하느님(은총)으로 인식하는데 비하여 말(무화과 잎)만 무성한 이들은 머리의 지식에 의존되어 있습니다. 내 안에 내가 산다면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내가 주인이다면 자신을 섬기게 될 것이지만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면(영성체) 주인이신 그리스도 주님을 섬기게 됩니다.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실제적인 체험의 부족에서 머리로서만 '개념들'을 지어 만들어 내게 되면 자기 계절(철)이 아니다며 하느님께 드릴 열매는 맺지 않고 잎사귀(개념들)만 무성하게 달아 놓을 것입니다. 살아계시는 예수님의 이행을 체험하지 않고 하느님의 현존을 자기 땅(속)에 파묻어 둔다면 자신의 뿌리(자아 정체성)는 썩어질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인 자기 몸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성전이 아니라면 자기 몸은 기도하는 집이 아닙니다. (성령의 성전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예수 삶의 실천이 없다면 아버지의 집이 아니라 강도의 소굴로 자기 정체성의 뿌리는 썩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내 몸은 주님의 것(하느님의 성전)입니다.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으로 자기 목숨을 얻고자 한다면 (자신이 주인이 되고자 한다면) 주님께서는 떠나실 것이고 주님께서는 섬김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신 성전은 이미 성전이 아닙니다. 폐하여진 자신의 성전(몸)에 성체를 모시는 일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살아 계시지 않는 성전(성령의 성전)인 그 몸도 결국 폐하여지고 맙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주님께서 사람 가운데 거닐 수 있도록 하느님의 살아계신 성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의지이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버지를 찬양” 합니다. 여기서 찬양은 입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로 사는 내 삶(전부) 입니다. 자신의 예수의 삶이 될 때, 봉헌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며, 봉헌되시는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거룩한 산 예물이 되는 것입니다.

내 삶은 그분의 사랑의 도구일 뿐입니다. 내가 나를 버릴 때, 나는 나를 얻게 됩니다. 하느님 안에서 나는 내(사랑)가 되는 하느님의 강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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