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9일 (수)
(홍)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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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1) - 그리스도의 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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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훈 [saint72] 쪽지 캡슐

1999-02-19 ㅣ No.127

 

-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1) -

 

 

 

그리스도의 신성

 

역사적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교리를 하나둘씩 부인해 온 결과, 요즈음에는 그

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는 이들도 그리스도교의 중심인 그리스도의 신성까지 배

척하게 되고 말았다. 이 그리스도교의 근본 교리에 대한 신앙이 부인되고 있는

현상은 평신도는 고사하고 사목자들 사이에서 더욱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시카고 대학 신학부의 케이스(Shirley Case) 교수는 저서 ’세기를 지난

예수’에서 그리스도를 단지 하나의 인간으로 묘사하고, 그의 도덕률은 당시의

팔레스티나의 단조로운 촌사람에게는 적합하였으나 현대의 복잡다단한 사회 생

활에는 맞지 않으며, 맞게 하려면 근본적으로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를 소크라테스나 간디에 비할 만한 사회 개혁가로 보는 것이 현대의

유행이다. 그래도 그리스도의 계시를 최고의 결정적인 것으로 여기는 전통적

관점에서 멀어지기를 꺼리는 눈치가 엿보이기는 한다. 이러한 현대식 유행은

크리스챤 세기’ 지(紙)에 실린 두 논문에 반영되어 있다. 하나는 그리스도인

협회 비서의 글이다. "나는 인생을 하나의 발전하는 과정으로, 또 우주는 본시

변화하는 것으로 여기는 만큼 종교의 본질도 성장한다고 주장하지 않을 수 없

다. 그리스도의 계시가 최후의 결정적인 것이라든가, 그리스도는 절대자요, 완

전자라는 등의 개념은 내가 보기에는 당치도 않은 소리이다. 이것이 크나큰 악

한 결과를 초래했음을 우리는 이제서야 깨달았다."

 

 또 하나는 대학 강사의 글이다.  "우리는 우연히 또는 노력의 결과로 예수의

인생 철학을 훨씬 능가하는 인생 철학과, 예수가 가르친 바에 어긋나는 인생규

범을 따라서 살 수 있고, 또 -우주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논리로 미루어-

그렇게 될 것이다."  

 

 

신성을 배척

 

 이러한 견해는 단지 몇몇 사람만의 주장이  아니라 실로 개신교에 널리 퍼져

있는 사상이다. 베츠(George Herbert Betts) 교수의 연구 ’7백명 목사의 신앙

을 읽으면 이 사실은 더욱 뚜렷해진다. 5백 명의 목사와 2백 명의 목사 지망

신학생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비교한 결과, 베츠 교수는 다음과 같은 견

해가 목사들 사이에서 점점 유력해지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여느 사람과 다름없이 잉태되고 탄생했다. 그는 이 지상 생활에 있어

도덕적인 악을 범할 수조차 없지는 않았다. 그는 남을 부활시키지 못했을뿐더

러 자신도 육체적으로 부활하지 못했다. 그는 지상 생활 초기에는 그 당대의

지식과 상식의 제한을 받았었다. 인류의 속죄는 오로지 그의 수난과 죽음으로

만 말미암은 것은 아니다. 그는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지상에 다시 나타나지는

않는다."

 

 

 이상의 연구를 바탕으로 하면 새로 목사가 되는 사람들 중 겨우 44퍼센트가

’예수는 권능이나 지식이나 권위에 있어 하느님과 동등하다’고 믿을 뿐이다.

이는 옛 목사의 76퍼센트에 비해 훨씬 낮은 비율이다. 젊은 목사의 42퍼센트,

나이 든 목사의 84퍼센트만이 ’예수는 죽고 묻혔다가 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

서 부활했다’는 것을 믿었다. 이상이 오늘날의 미국 개신교에서 현저하게 나타

나고 있는 ’그리스도교로부터 초자연적인 것, 신적(神的)인 것을 박탈해버리는

경향이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미국에서 개신교를 바로 들여온 나라들 대부분

이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탈(脫)그리스도화’ 경향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여기에 한국이 포함되는 것은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이 연구에서 명백히 드러난 바와 같이 역사적 그리스도교의 근본 교리, 특히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의 도덕률의 최후 결정성은 모모한 개신교에서 일제히 배

척되고 있다.

 이러한 상태는 기뻐할 일이기는커녕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다. 왜냐하면 이것

은 점점 득세해가는 자연주의, 합리주의, 불가지론과의 전쟁에서 가톨릭이 동

맹국을 잃고 그 날카로운 공격을 혼자 견디어내야 하고, 결국에 가서는 - 적어

도 조직된 단체로는- 고립 분투(孤立奮鬪)를 면치 못할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타협할 여지가 없다

 

 가톨릭 교회는 전통적 교리에 대한 신앙이 이처럼 전반적으로 허물어져 가는

상황을 목도(目睹)하더라도 오늘도 지난 19세기 동안이나 마찬가지로 달리 알

아들을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쉽고도 분명한 가르침을 고수하기에 여전히

지칠 줄 모른다. 교회는 시대 정신과 타협할 것도 없고 갈피를 잡지 못할 새로

운 바람에 일일이 돛을 맞출 여지도 없다. 교회는 ’어제의 예수 그리스도,

오늘의 예수 그리스도, 영원히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할 뿐이다. 일

찍이 구세주가 당신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고 명한 그 가르침에 대해서 많은

유다인이 그를 배반하고 떠났을 때 그분은 사도들에게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

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 하고 물었다. 그 때 베드로가 사도들을 대표하여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라고 대답했다. 가톨릭 교회는 그 베드로의

대답을 곧 자기의 대답으로 삼고 있다.

 

 수백만 명이나 되는 자칭 그리스도교인들이 주께서 친히 쉽고도 똑똑하게 선

언하신 신성(神性)을 부인함으로써 주를 배반하고 있음에 비해, 교회는 첫 교

황이요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 편을 들어 그와 같은 대답을 한다.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

습니까?"

 

 그리스도의 모든 가르침 가운데 그 자신의 신성(神性)에 관한 가르침보다 더

중요하고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없다. 만일 그리스도가 하느님이 아니고

일개의 사람이라면, 그분이 세운 교회는 아무런 신적(神的) 바탕도, 권위도 없

을 것이다. 그 도덕률도 최후의 결정적인 것이 못 되며, 그 가르침도 별 다른

것이 못 되고, 그 종교도 불교나 이슬람교나 유교나 그 밖의 수많은 인조 종교

(人造宗敎)와 본질적으로 구별될 아무런 까닭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마디

로 그리스도교의 권위의 흥망은 그 창설자인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여하에 달

려 있다. 이 크나큰 진리가 내포하고 있는 무수한 의미에 대해서 가톨릭 신자

가 아니었던 시인 브라우닝(Robert Browning)조차 이렇게 읊었다.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을 인식하였으니

 

 당신이 지성으로 깨달았음이기에

 

 이는 당신을 위하여

 

 세상 안팎의 온갖 의문을

 

 술술 속시원히 풀어 주도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명백한 증거는 무엇인가? 여기서 가톨릭 교회

가 예수의 신성을 가르치니까 이를 믿으라고 강요하지는 않는다. 다만 복음에

기록된 구세주의 쉽고도 똑똑한 가르침을 음미해 보라고 권할 뿐이다. 그렇다고

복음을 신감(神感)된 것이라고 믿어야만 할 필요는 없다. 다만 진실된 말씀으로

만 여겨도 넉넉하다. 자칭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라도 복음 사가들이 예수의 신

성을 발명한 것이 아니고 다만 그리스도의 일생과 그 가르침을 성실하고 참되게

기록하였을 뿐임을 반드시 인정할 것이다.

 

 

베드로의 고백

 

 여기서 예수가 하나의 사절로서뿐만 아니라 당신의 이름과 권위로써 선언한

성서 구절 등 당신의 신성을 함축적으로 증명하는 구절은 너무나 많기에 이를

일일이 너절하게 나열할 것없이 간단히 한 마디로 줄이고자 한다. 그가 글자

그대로 하느님의 아들이며 성부와 같은 실체(實體)를 지니고 있다는 진리를 친

히 직접 밝힌 구절을 보기로 한다.

 

 첫 장면은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그리스도가 제자

들에게 물었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더냐?" 그들이 대답하기를 "어

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라 하고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예레미야

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대답에 만족하지

않은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재차 물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

하느냐?"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서 역사적 신앙 고백을 선언한 것은

바로 이 때였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의 고백을 칭찬하시다

 

 구세주는 베드로가 틀렸다든가, 열광되어 제정신이 아니라든가, 또는 스승이

실제로 지니고 있지 않은 신성(神性)을 함부로 갖다 붙였다고 책하였던가? 만

일 베드로가 틀렸다면, 이 잘못을 고쳐주어 베드로의 그릇된 인상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도- 정직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해야 될 의무였

으리라. 그리스도는 베드로가 틀렸다고 말하였던가? 그러기는커녕 베드로의 대

답은 계시를 받은 것임을 보증하고, 그의 신앙 고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놀

라운 보상을 주심으로써 베드로의 대답이 진실됨을 확인했다.

 

 "시몬 바르요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

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도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

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

 

 

 여기에 주께서 위대한 스승으로서 능숙한 솜씨로 주의 깊게 그 배경을 준비한

극적 광경이 있다. 이 배경은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에 대한 베드로의 솔직하고

명백한 고백을 마치 그믐밤에 번쩍이는 번갯불과 같이 빛나게 한다. 이것은 말

하자면 착한 그리스도교 신자는 하느님의 성총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양자가 된

다는 식으로 애매하게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이 말

은 명백히 그리스도는 이런 것과는 도무지 비교할 수 없이 무한히 높으신 분, 곧

그 본성으로 하느님의 아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한 실체(實體)인 분이라고 한

말이다. 따라서 요한은 그리스도를 ’은총과 진리가 충만한 하느님의 외아들’

이라고 선언했다.

 

 

가야파 앞에 선 그리스도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서 일어난 신성(神性)의 고백 광경 못지 않게 빛나

는 극적인 장면은 히브리인의 최고 재판소 산헤드린(Sanhedrin)에서 베드로가 아

니라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신 장면이다. 주께서는 하느님의 칭호를 주장한

탓으로,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아들임을 주장한 탓으로 고발되었다. 유다인에게

이 죄는 사형감이었다. 대사제(大司祭) 가야파가 엄숙한 말투로 그리스도께 물었

다.

 

"내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명령하니 분명히 대답하여라. 그대가 과연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인가?" 예수는 당신이 이 물음에 긍정적인 대답을 하는

것은 곧 죽음을 자처하는 것임을 알고도 남았다. 그분은 애매한 말이나 알쏭달

쏭한 대답을 해서 이 급박한 운명을 피하려 했는가? 당신의 신성(神性)을 부인

하기만 하면 만사가 해결되는 간단한 방편을 써서 죽음을 피하려 했던가?

 

 오히려 일초도 주저하지 않고 손톱만큼도 애매하지 않은 말투로 서슴치 않고

간단 명료하게 선언했다.

 

"그것은 너의 말이다." 이 말은 히브리어 말투로 "네가 말한 것은 참되다.

나는 바로 그렇다"는 뜻이다. 가야파는 이 대답을 듣기가 무섭게 자기 옷을

찢으며 부르짖었다. "이 사람이 이렇게 하느님을 모독했으니 이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하겠소?  여러분은 방금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듣지 않았소?  

자,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군중들이 대답하기를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

이 최고 재판소에서 그리스도께 신성 모독의 죄를 선언하였음은 그리스도가

참하느님의 아들임을 주장한 탓이며 단지 그가 메시아(구세주)임을 주장한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메시아라고만 주장하였다면 이는 그냥 거짓말이지 신

성 모독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글자 그대로 그리스도는 친히 당신의

신성을 부인하기는 고사하고 애매하게라도 말하려 하기보다도 차라리 골고타

십자가 형틀을 택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에 성서를 단지 역사적인 문헌

으로만 여길지라도 이를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더욱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해서 당신 친히 쉽고도 똑똑하게 가르치신 바를 의

심하거나 부인할 수가 있을 것인가?      

 

 

기적으로 확인되다

 

 주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선언했을 뿐 아니라 이를 여러 표징과 기적,

그중에서도 특히 당신의 부활로써 확증했다. 그분은 유다인들에게 당신 말을

빋지 못하겠으면 당신의 행하는 일을 믿으라고 말씀하신 적이 한두 번이 아니

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바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증거가 된다."   

"내가 그 일을 하고 있으니 나를 믿지 않더라도 내가 하는 일만은 믿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러면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베드로 역시 스승의 본을  따라 주께서 구세주시며  하느님의 아들임을 믿게

되는 증거로써 그분의 놀라운 업적을 들이댔다. 예컨대 첫 성령 강림의 아침,

사도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계를 정복한다는 숭고한 사명에 착수하려는 때,

베드로는 유다인에게 이렇게 말을 꺼냈다.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내 말을 들

으시오. 나자렛 예수는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분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것

을 분명히 보여 주시려고 여러분이 보는 앞에서  그분을 통하여 여러 가지 기

적과 놀라운 일과 표징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은 효과가 그 제자들에게뿐 아니라, 이를 목격한 모든

이에게 미쳤음을 니고데모의 말에서 볼 수 있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을 하

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고서야 누

가 선생님처럼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성 요한은 독자들이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믿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뚜렷

한 목적으로 예수의 기적을 기록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

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기적들도 수없이 행하셨다. 이 책을 쓴 목적

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

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비록 예수께서 행하신 무수한 기적을 목격하였지만 아직 제자들의 마음에 예

수의 신성에 대한 의심의 그림자가 남아 있었다 하자. 그렇더라도 이 흔적마저

부활이라는 가장 놀라운 기적으로 확실히 깨끗이 사라졌을 것이다. 부활의 사

실은 예수 부활 후에 함께 말한 사도들의 증언은 물론, 그 외에도 너무도 많은

증언으로부터 뒷받침되고 있다. 이 기적이야말로 제자들의 마음으로부터 예수

의 신성(神性)에 관한 의문을 그림자까지도 송두리째 깨끗이 씻어준 계기가 되

었다. 주를 십자가에 못 박은 집행관이었던 백인대장까지도 구세주의  임종 시

에 일어난 이상한 바람과 놀라운 사실을 보고서 예수의 신성(神性)을 절규하고

야 말았다.

 

"백인대장과 또 그와 함께 예수를 지키고 있던 사람들이 지진을 비롯하여 여

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

구나!’ 하며 몹시 두려워하였다" (마태 27, 54).

 

 이제까지 제시한 모든 증거-이는 복음에 가득히 실려 있는 것의 한 부스러기

에 불과하지만-에 비추어 보아 다음과 같이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

스도께서 하느님이 아니었던들 신약 성서는 신적  영감을 받은 책으로서는 말

할 나위도 없거니와 역사서로서도 가치가 없을 것이다. 이와 동시에 여기에 바

탕을 두고 있는 전통적 그리스도교 전체가 당장  땅 속에 거꾸로 곤두박질 칠

운명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않으려면 불

가불 복음의 역사적 진실성을 배척해야만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과학의 무

법천지에서나 할 수 있는 만행이다.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

 

 예수의 신성에 대한 너무도 명백한 성서의 증거를 결사적으로 피하려는 이른

바 몇몇 고등비평가(高等批評家)와 현대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초대  교회에서

는 이 점에 관해서 명백히 가르치지 않았다고 버티고 있다. 그들의 주장에 따

르면, 처음 3세기 동안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위격(位格)에 관해서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었다기보다 아직 꾸며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신자들은 그리스

도를 이를테면 일종의 하위(下位)의 신(神), 곧 모든 인간보다는 높지만 성부보

다는 낮은 존재, 따라서 엄격한 뜻으로는 신이 아니라고 여겨도 무방했다는 것

이다. 이 교리는 3세기 동안 진화된 결과로 325년 니케아 공의회 때에 이르러

서야 비로소 결정되었고, 이 때에 그리스도의 절대적 신성(神性)에 대한 신앙

이 신자들이 반드시 믿어야만 되는 교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만일 이 생각이 참되다면 이는 이 세상에서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 곧 사도들과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믿었을 뿐 아니라

거의 전부가 이 신앙을 위해서 순교했으니 말이다. 이를 위해서 온갖 고문과

투옥은 물론이거니와 죽음까지도 자청하다시피 한 그들이 이 근본 교리를 개

종자들에게 전하지 않았다면 그야말로 알 수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어쨋든

이 당치도 않은 말을 이러쿵 저러쿵 말로만 따질 것 없이 직접 역사적 사실을

살피기로 한다.

 

 초대 교회의 가르침이 어떠하였는지는 그 당시 개종자들에게 요구된 신앙 고

백을 보면 가장 잘 알 수 있다. 개종자가 세례를 받으면 우선 신앙고백부터 해

야 되는 풍습은 처음부터 전해 내려온 관례였다. 통일성을 보존하기 위하여 일

정한 형식이 채택되었는데 이는 그 당시 교회가 가르친 가장 근본되는 교리를

반영한다. 처음 3세기 동안 사용된 이 신앙고백 형식은 적어도 그 일부분이 테

르툴리아노와 성 유스티노와 성 이레네오-이들은 모두 2세기 사람이다-로 말미

암아 지금까지 전승(傳承)되고 있다. 의심을 품고 있는 비평가들까지도 이 고백

형식의 기원이 적어도 1세기 이전까지 소급되며 당시에는 동방 교회도 서방 교회

와 통일되었음을 모두 인정하고 있다.

 

 이 고백 형식을 보면,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에 대한 신앙 고백이 입교(入敎)

의 필수 조건으로 명백히 규정되어 있다. "나 전능하신 천주 성부를 믿으며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 마리아에게서 나신 우리 주를

믿나이다." 이는 20세기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외는 사도신경의 그 상응되는

구절과 동일한 것이며, 이는 곧 우리가 제1, 제2 세기 때의 교우들과 동일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 후 19세기 동안 예수의 신성에 대한 우리

신앙이나 이를 밖으로 드러내는 표현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교부들의 증언

 

 초대 교회의 교부들의 글은 그들 신앙의 중심을 이루는 이 교리에 관한 것으

로 가득차 있다. 로마의 성 클레멘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순교자 성 유

스티노는 이 점을 유달리 강조했다. 아테네의 아테나고라스는 2세기 말에 로마

황제에게 다음과 같은 호교의 글을 썼다. "성부만이 하느님일  뿐 아니라 성자

도 성령도 그러하나이다. 하느님의 삼위는 한 하느님이며 이 한 하느님에게는

삼위가 있어 서로 구별되나이다."  거의 때를 같이하여 리옹의 성 이레네오는

이렇게 썼다. "그리스도가 죄를 용서하여 준다면, 그리스도가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라면 이는 곧 그가 참하느님의 위격이신 때문이다."

 

 성 폴리카르포는 2세기 중엽에 산 채로 화형을 당하는 마당에서 외친 말도

이 위대한 진리에 대한 초대 교회의 신자들의 신앙을 입증한다. "오 하느님,

당신이 사랑하시는 아들, 영원하시고 하늘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만

사에 대해서 당신께 감사하며 찬미하나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당신과 성령께

이제와 항상 영원히 영광이 있어지이다. 아멘."

 

 이 똑같은 진리를 로마의 성 히폴리토,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노, 알렉산드리

아의 오리게네스와 클레멘스, 티르의 성 메토디오, 사르디스의 멜라토 등이 또

한 강조했다. 실로 이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던 당시의 모든 저작자들의 글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으며, 이는 모두 한결같이 똑같은 교리를 가르쳐 주고 있

다.

 

 아직 어린 교회가 이 문제에 관해서 명확히 규정된 교리를 가르쳤다는 사실

은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 신성을 부인하려던  당시의 이단자들을 교회에서

어떻게 처단했는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예컨대 체린투스가 1세기 말에 예수

는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일 뿐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며, 따라서 참하느님이 아

니라고 주장했을 때, 온 교회는 그를 거슬러 들고 일어나 그를 배교자로 파문

해 버렸다. 그노시스파와 조금 후의 아리우스파가 구세주를 하느님과  최고의

천사와의 중간 존재라 하여 그리스도를 일종의 하위의 신으로 여기려 했을 때

먼저 것과 마찬가지로 치열한 단죄의 부르짖음이 일어났다. 교회는 지체 없이

즉시 그들을 사도로부터의 신앙을 배반한 이단자로 처단해 버렸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 사이에서도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믿는 신앙이 참그리스

도인으로서의 뚜렷한 증거로 여겨질 정도로 보편적인 것이었다. 현대의 비(非)가

톨릭 작가인 리돈(Liddon)도 처음 3세기 교회의 신앙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절대적 신이라는 진리는 의심 없이 니케아 공의회 이전의 교회의

핵심이 되는 가르침이다. 그 당시 비록 교회의 스승들이 이 교리가 필연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모든 것을 인식하지 못했고 이것과 다른 교리와의 관계를 정확

히 설명하지는 못했을망정 위의 사실은 틀림없다."

 

 

오리게네스가 첼수스에게

 

처음 3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이 신앙을 실천에 옮겨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흠숭했다. 이 사실은 그들이 다

신교(多神敎)라든지 우상 숭배라는 비난을 받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예컨대, 3세기의 입이 지저분한 이교(異敎) 철학자 첼수스는 그리스도

인들이 그리스도를 흠숭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신교이니만큼 그들이 이교

의 다신교를 비난할 염치는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예

배하지 않는다. 물론 마귀도 아니다. 다만 죽은 사람을 흠숭하고 있다. 입으로

는 이교의 신들을 흠숭하지 않겠다고 주절대면서 하필이면 왜 유다인으로부터

사형당한 사나이를 예배하는가? 그러려면 차라리 다른 예언자 중의 어떤 이를

예배함이 낫지 않겠는가?"

 

 초대 그리스도인 중에서 최대의 저술가인 오리게네스는 첼수스의 공격을 막

아 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흠숭한다는 비난은 부정하지 않고 오

히려 그리스도는 하느님이니까 그렇게 흠숭함이 마땅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교의 잡신들은 흠숭받을 자격이 없다. 유다의 예언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는 하나의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로서, 곧

하느님으로서 흠숭된다. 만일 첼수스가 하느님의 아들이 기도 중에 말한 것

처럼 ’성부와 나는 하나이다’ 또 ’나와 당신은 하나이다’ 라는 뜻을 깨달았

다면 우리가 만물 위에 존재하시는 하느님 외에 다른 것을 흠숭한다고 착각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곧 그리스도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나도 아

버지 안에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의 피의 증언이 없었다면 예수의 신성

에 대한 초대 교회의 신앙은 아마 ’증거 불충분’이라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

다. 그 순교자들은 입술로만 외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무죄한 수난과 모진 죽

음이라는 더할 수 없는 웅변으로 외친 것이다. 그들은 살아 있는 몸에 콜타르

를 바른 채 로마인의 칼싸움 경기를 밝혀주는 횃불 노릇을 당했다. 그들은 모

래를 뿌린 원형 극장에서 굶주려 날뛰는 사자들에게 손발을 찢겨 그 배를 채

워 주었다. 그들은 참수대 위에 목을 내밀고 망나니들 칼춤의 노리개가 되었

다. 그들은 치욕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그들은 하느님이시며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를 부인함으로써 제 목숨을 구하고 약속된 부귀영화를 누리기보다는

차라리 이 무수한 혹독한 형벌을 즐겨 택했다.

 

 

순교자들의 소리

 

 그들은 우리의 귀에 벼락처럼 소리치고 있다. 그들의 영웅다운 죽음은 그리스

도교의 창설자이신 하느님을 하나의 인간으로 치부해 버리려는 20세기의 고등

비평가와 현대주의자 목사등의 낯간지러운 비웃음을 거슬러 절규하고 있다. 그

들의 붉은 피는 시간도 영원도 부술 수 없는 확신의 인호(印號)를 그들의 신앙

위에 새겨 놓았다. 그들의 부르짖음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줄어들기는커녕 귀

청이 터질 지경으로 커져 가고 있다. "우리가 수난하고 죽었음은 하나의 인간

을 위함이 아니었다. 우리의 하느님이시오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

다." 조금만 지각있고 조금만 재치있는 사람이면 그들의 이 외침 속에 사도들

의 목소리가, 그리스도 자신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그리스도를 참하느님으로 믿고 이 신앙을 목숨으로 증거한다는 것이 순교자

들에게 무엇을 뜻하는가를 깨달으려면 목격자들이 전하는 그들의 형벌 실화를

좀더 읽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실화는 무수하게 많다. 그 한 예

로 여기에 앙심을 품은 비평가들도 사실 그대로임을 인정하고 있는 실화를 소

개하려 한다. 칼비시아누스 총독의 법정 앞에 카타니아 교회의 부제(副祭)인

유플리오가 그리스도인이라 하여 끌려 왔다. 통례에 따라 총독은 그 죄수에게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이교의 잡신에게 향을 피우라고 타이르면서 그렇게 하면

자유를 준다고 약속했다. 이것이 헛수고가 되자 형틀 위에 눕혀 놓게 했다. 목

격자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그렇게 고문을 당하면서 유플리오는 말했다. ’그리스도님, 감사하나이다.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을 위하여 이 고통을 받나이다.’ 총독이 말참견을 했다. ’그따

위 바보짓은 그만두라. 신들을 공경해라. 그러면 포승을 풀어주마.’ 유플리오가

대꾸했다. ’나는 그리스도를 공경한다. 나는 마귀를 온전히 미워한다. 네 맘대

로 하라.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다른 고문이라도 해 보라. 나는 그리스도인이

다.’ 한참동안 고문받은 후 형리들은 잠깐 손을 멈추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리

고 총독이 말했다. ’이 불쌍한 자야, 신들을 공경하라. 마르스와 아폴로와 에스

쿨라피우스를 흠숭하라.’ 유플리오가 대꾸했다.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흠

숭한다. 성삼위를 공경한다. 그 외에는 하느님이 없다. 하늘과 땅을 만들지 않

은 저 신들과 그들에게 속하는 모든 것을 없애 버려라.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총독은 또다시 말했다. ’자유를 누리고 싶으면 제사를 올려라.’ 유플리오가 대

답했다. ’나는 오직 내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

뿐이다. 네 노력은 헛될 뿐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러자 재차 고문 명령

이 내렸다. 뼈가 마디마디 퉁겨져 나왔다. 그 때 그는 부르짖었다. ’그리스도님,

감사하나이다. 그리스도님, 저를 도우소서. 그리스도님, 당신을 위하여 이 고통

을 받나이다.’ 온갖 힘이 다하고 목소리가 꺼졌을 때도 그의 입술은 여전히 이

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죽어 가는 유플리오의 말 속에는 수백 수천의 순교자들의 입술에서 터져 나온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신앙 고백이 메아리치고 있다. 그들은 마지막 숨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숨쉬었다. 총독들의 간교한 유혹과 형리들의 매몰찬

치도곤 아래서 구세주를 위해 전 재산과 전 생명을 헌신짝처럼 버린 이 수많은

남녀 노소 순교자들의 행렬은 우리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이 지극히 명백하고 똑똑

하게 초대 교회의 신앙을 되살려 주고 있다. 굶주림과 추위와 죽음을 무릅쓴 그

들의 신앙 고백은 불멸의 영웅적 행위라는 영원한 글씨로 아로새겨져 있다.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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