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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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현대사 - 산 자여 따르라 - 윤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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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길 [u90120] 쪽지 캡슐

2005-03-26 ㅣ No.52

"폭력이 모든 인간을 굴복시키는 것은 아니다. 때로 인간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면서 이에 저항한다."



민주화 항쟁 열기가 들불처럼 타 올랐던 80년 5월 광주,

80년 광주 민주항쟁은 국가폭력에 의한 무고한 희생자 발생의 가장
극적인 예다.

시위진압을 위한 무장계엄군 투입과 발포,그리고 그로 인한 수많은
무고한 죽음들.



5.18 시작된 광주민주항쟁,그 폭풍같은 10여일이 지난 시점인 80년
5월 27일 새벽,

당시 광주 민주항쟁의 상징이자 심장부였던 전남도청건물,

그 곳 민원실 2층에서 계엄군의 총에 맞아 사망한 불탄 시신 한 구가
발견되었다.

부당한 국가폭력에 맞서 끝까지 도청을 사수하다 장렬한 최후를 맞은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이 바로 그였다.

그는 죽음으로 '국가폭력의 부당함'에 정면으로 맞섰고,

끝까지 계엄군에 항전하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윤상원이 죽은 뒤 2년후,

82년 망월동 묘역에서는 윤상원과 78년 먼저 사망한 학교후배
박기순과의 영혼결혼식이 열렸다.



당국이 80년 광주와 관련한 어떠한 행사도 용납지 않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광주의 진실을 알리고자 기획된 이 행사에서 윤상원에게 한
곡의 노래가 헌정됐다.

당시 황석영이 작사한 이 노래가 80년대를 통틀어 시위현장에서 가장
널리 불려졌던 <님을 위한 행진곡>이다.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이 노래의 가사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앞서서 나간 윤상원과 광주
시민군의 죽음은 이후 민주화를 위한 산자의 참여를 촉발하는 대중
참여의 에너지로 승화된다.

80년 5월 27일, 전남도청에 마지막으로 남았던 이들은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



왜 이들은 죽음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는가?

이들의 죽음을 요구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무엇이었는가?

이들이 죽음으로써 지키려고 한 것은 무엇인가?



당시 시민군 대변인이었던 윤상원의 죽음을 통해 이에 대한
답을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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