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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7] '교황의 세계제국' 달성한 인노첸시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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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훈 [saint72] 쪽지 캡슐

1999-08-29 ㅣ No.368

 

[7] ’교황의 세계제국’ 달성한 인노첸시오 3세

 

■ ’교황의 세계제국’ 달성한 인노첸시오 3세

 

교황권과 제권(帝權), 교권과 속권간의 대결은 교황 성 그레고리오

7세(1073-1085) 때 소위 임직권 논쟁에서 일단 교황측의 승리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양자간의 격투는 대립교황. 전쟁, 유혈사건 등을 통해 계속되었다.

 

이런 권력투쟁은 오늘날 우리에게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는 거의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는 그리스도가 그리스도교 세계의

유일한 주인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복음의 주님의 말씀(루가22,38)에 근거하여,

그리스도가 세계지배를 위해 두 칼자루를 준 것으로 이해했다. 하나는 세속적인

것으로 황제에게 맡겨졌고, 또 하나는 영적인 것으로 교황에게 맡겨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성 그레고리오 7세 시대의 교회법 학자들은 이러한 이론을

교황에게 전적으로 적응시킴으로서 새로운 해석을 내리게 된다.

 

즉 두 칼자루는 모두 교회를 위해 준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로 돌아간다. 즉

영적인 것은 교회가 직접 행사하고, 세속적인 것은 황제에게 위촉하여 교회의

이름으로, 또 교회를 위해 행사하게 한다는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교회의

파문을 영적인 칼자루로 생각했다.

 

어쨌든 성 그레고리오 7세와 더불어 시작된 교황의 세계지배는 인노첸시오

3세(1198-1216)때 그 절정에 도달했다. 한 역사가는 이 정점을 "교황직이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로 극도에 도달했다"고 표현했다. 분명히 그리스도교

국제사회의 우두머리는 이미 황제가 아니라 교황이었다.

 

인노첸시오 3세는 37세 때 교황직위에 올랐다. 그는 당시 추기경 중에서

최연소자였고, 또한 당시 최고의 지성인으로서 신학자인 동시에 뛰어난

법률가였다. 그는 교황위에 오르던 날 이런 연설을 했다.

 

"일찌기 예언자들은 본인에 대해 본인을 민족들과 왕국들 위에 세울 것이라고

말했다. 또 그리스도는 사도를 통해 본인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본인은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다. 본인은 비록 하느님보다는 낮을지라도

사람보다는 높다" 인노첸시오는 그때까지 교황들이 사용해온 ’성 베드로의

대리자’란 칭호를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바꾸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베드로도

그와 같이 그리스도의 대리역을 맡은, 같은 교황에 불과했다.

 

인노첸시오 교황의 연설에서 우리는 아우구스티노의 신국이념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세계 지배의 이념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종교적

이념에서였으니, 서구의 그리스도교계의 백성은 초자연적 공동체였고, 따라서

그것은 교회의 모든 백성으로 구성된 초국가적 공동체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계의 우두머리인 교황은 자연히 많은 민족들로 구성된,

그러나 같은 신앙에서 일치된 서구 국제사회의 지도자가 되어야 했다.

 

인노첸시오 3세는 이러한 세계제국의 이념에서 전체 서구를, 교황의 봉건국가

체제를 바탕으로 한, 세계제국으로 건설하려 했고 또한 그것을 실현시켰다.

시칠리아를 위시하여 영국. 아라곤. 포르투칼. 덴마크. 폴란드. 보하미아.

헝가리 등이 교황의 봉토주권을 시인함으로써 그들의 국토를 교황으로부터

봉토로 받은 셈이 되었다.

 

이렇게 교황이 봉건국가를 건설해 나가는 과정에서 슈타우렌 왕자는 완전히

패배하게 되었다.

 

교황직이 인노첸시오 3세에게 가장 강력하고 정력적인 교황을 맞이했을 때,

이와는 대조적으로 독일의 왕권은 아주 약화되어 붕괴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2중 선거로 왕권은 계승투쟁으로 확대되었다.

 

이때 교황은 독일의 왕위 계승 문제에 간섭하여 2명을 파문하고 폐위시켰다.

교황은 선거 자체의 승인이 아니라, 왕의 후보자들의 윤리면에서의 자격 여부를

판단할 권리에서, 왕군투쟁에 개입하는 것임을 밝혔다. 이와 같이 왕권의

우위성에서 교황은 비단 왕위계승 문제만이 아니라 모든 속사에서 관여했다.

 

즉 교황이 속사에 관여하는 것은 세상사도 하느님이 세운 질서를 따라야 하고,

왕과 제후들도 하느님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책임과 확신 때문이었다.

 

인노첸시오에게 있어서 세상은 하나의 거룩한 질서였다. 이 질서가 죄에 얽매인

사람과 사람과의 문제로 인해 교란될 때 교황은 언제나 여기에 간섭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권력의 남용되고 오용될 위험은 컸고,

실제로 교회는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교회의 영적 임무에

축복을 갖다 주지는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인노첸시오 3세의 가장 큰 관심사는 성지를 미신자들의 손에서 해방시키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십자군 원정을 계획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제4차

십자군(1022-1204)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가장 큰 손실을 겪어야 했다.

십자군들은 교황이 지시한 성지로 가지 않고, 엉뚱하게도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후 희랍 신자들을 쫓아내고, 거기에 라틴제국을

건설했다. 교황은 그것을 묵인했을뿐더러 "동방이 좀더 빨리 희랍인의 통치에서

라틴 사람들의 통치로 넘어왔더라면 성지를 잃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며,

도리어 그것을 하느님의 섭리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로써 동서교회 간의

긴장은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인노첸시오 3세는 그의 치세 말년에 죽음이 가까웠음을 짐작하고, 교회의

내실화를 위해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것이 바로 1215년에 개최된 제4차 라테란 공의회였으니, 그것은 교회사상 가장

큰 공의회의 하나가 되었다. 5백명의 주교와 8백명의 대수도원장들이

참석함으로써 그의 치세의 절정을 보였다. 그것은 서구 그리스도교 국제 사회의

위압적인 열병과도 같았고, 동시에 중세 전성기의 교회생활의 절정을 나타내는

광경이기도 했다. 공의회는 여러 개혁 규정을 통해 교회를 내적으로 쇄신하고

심화하는데 크게 기여했고, 이때 결의된 부활절의 고해. 영성체 규정은 오늘까지

유효하다. 인노첸시오 3세는 공의회 개회식에서 "나는 여러분과 헤어지기 전에

여러분과 이별식사를 같이 하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주님의 말씀을 간접적으로

인용하기까지 했다. 그로부터 반년 후 즉 1216년 7월에 그는 56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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