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1일 (화)
(녹)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

성지순례ㅣ여행후기

"그분"이 불러주셔서 ....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수도원에서 (첫 번째 편지)

스크랩 인쇄

장기항 [vinchen10] 쪽지 캡슐

2004-10-20 ㅣ No.418



"그분"을 사랑함에

 

 
Homo est Viator 인간이란 걸어가고 있는 존재이다.
추방자인가 순례자인가, 아니면 도망가고 있는가 또는 걷고 있는가? 인간은 초조한 마음과 더불어 무엇인가 모를 향수에 쫓기고 있는 존재이다. 알 수 없는 불안이 그를 초조하게 하고 또 불현듯 찾아드는 고통이 그로 하여금 자신이 가야 할 궁극적인 본향으로 발걸음을 돌리게 한다.이 지상 어느 곳에서도 인간이 지닌 이러한 근원적인 열망과 향수를 잠재워줄 영원한 고국은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여정자이다.
‘순례’는 단순한 여행이 아니다. ‘순례’는 신자가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영적 여정 그 자체를 함축하고 있는 밀도 깊은 신앙의 행위이다. 무엇보다도 ‘순례’라고 하는 인간적 행위는 인간의 내밀한 본성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필연적인 요청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래적으로 ‘여정자’(viator)이기 때문이다.인간의 본성 자체가 이미 순례를 내포하고 있다는 말이다. 인간은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최종적으로 완성된 존재가 아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당신의 계획에 따라 당신과의 깊은 인격적인 사랑의 일치와 완성을 향해 부르셨다. 그러므로 인간이 터한 시공(時 空)은 우리 각자를 향한 하느님의 계획이 역사적으로 실현되는 장(場)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은 이미 그 존재의 시작에서부터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최
종목적’ 안에서 궁극적인 자기실현을 향해 걷는 ‘여정자’, 곧 ‘순례자’인 것이다. (까를로 마짜의 '순례영성')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를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년 성도 예루살렘을 순례합니다. 하느님의 돌보심 즉 '파스카 사건을 상기하며 야훼 하느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쇄신하기 위하서겠지요. 또한 중세 유럽에서는 예수님의 고난의 현장을 체험하기 위하여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기나긴 길을 떠났다합니다. 순례자들은 당시 예루살렘을 지배하고 있던 이슬람들이 순례길을 막고 방해하면서 그 유명한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다고 역사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자신이 신앙으로 굳게 무장되어 있다면 성지가 무슨 소용이 있으며 일부러 성지를 찾아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자신이 있는 곳이 바로 성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믿음이 확고하지 못한 저같은 사람은 역사의 현장에 가면 확실히 달라지거든요. 예수님은 보지않고도 믿는 사람을 칭찬하셨지만 저는 어림도 없어요. 보고 또 듣고도 금새 흔들리는 저같이 도를 통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성지순례가 아주 합당한 방법인 거 같아요. 

 가을이 무척 깊었네요, 곧 겨울이 오겠지요.
  모두 따뜻한 옷 준비하고 대림시기를 기다리시겠지요.

  대림(待臨)!  님을 기다리고 그리워하는 마음, 벌써 가슴이 울렁거리지 않으세요?   

 

  저를 보고 "복도 많아요" 하는 분들이 있어,  혹시 제가 장가 잘 들어서 복덩이 아내와 산다고 부러우신가요? 했는데 아~, 유럽 성지순례를 이쁜 아내와 다녀온 걸 부러워 하는 소리라고요? 

  어떡허죠, 각자 복은 타고난다던데...그렇다면, 음~ 제 이야기를 읽어보면서 함께 순례의 기쁨을 즐기기로 해요. 물론 직접 눈으로 보고 만져 본 저 보다야 못하겠지만 그래도 "그분"이 불러주신 그 길을 걸으면서 어깨에 손 얹어 주시고 함께 한 "그분"의 따스한 숨소리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한자한자 기도하듯이 써보았습니다. 모자라는 솜씨야 어쩌겠습니까만 성모님께 도움 청할래요, 교우님들이 만분지 일이라도 감동을 느끼실 수 있도록 말예요. 

 

  꿈만같이 다녀온 제 순례일정의 코스는 제일 먼저 이탈리아,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수도원이랍니다. 바티칸의 베드로 대성전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로마의 성지, 특히 까타콤베의 지하무덤성당을 다녀온 일은 너무 너무 감동적이었지요, 그리고 파리의 외방선교회, 가르멜 수도원신학교와 루브르 박물관....그리고는 루르드의 성모님 발현지는 어떻구요, 또한 벨기에의 바뇌 성모님 발현지는 대단한 떨림으로 잠겨들었는 걸요. 
  아무튼 저로서는 엄청난 감동 속에 다녀온 순례길이었구요, 내내 "그분"이 불러주시고 함께 해주신 추억은 오래 오래 잊을 수 없을거예요. 

  서툰 제 글따라 "그분"이 불러주신 그 길을 함께 떠나기로 해요. 

  제가 떠난 성지 순례는 지난 일 월이었구요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이 월 초순께여서 편지의 시작 부분의 계절은 지금 읽기에 어울리지 않아도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 * * *

  '예수님 다음으로 유명한 그리스도교인', '종파와 교파를 뛰어 넘어 존경받는 종교인', 이는 중세 이태리의 가톨릭 수도자 프란치스코 성인(1182~1226)을 가리키는 말로 소개되지요. 심지어 비오 11세 교황은 '또 하나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 라고 까지 칭송하였던 성인을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서 존경받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무엇보다 모든 종교의 공통 목적이자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청빈(淸貧)'과 '형제애'를 온몸으로 보여주셨기 때문이 아닐까요.  성인은 문자 그대로의 무소유(無所有)를 강조하시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고, 돈을 받지 말 것이며, 가난을 부끄러워 하지 말라"고 가르쳤고 자신이 먼저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을 형제로서 사랑하셨답니다. 그의 사랑은 나병환자 등 당시 차별 받던 사람들은 물론 동물과 무생물에까지 미쳐서 새들에게 설교하셨고 길가의 벌레가 발에 밟힐까 봐 옮겨 놓았으며 나무를 벨 때는 다시 싹이 틀 수 있도록 통째로 자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프란치스꼬회 회규 제7조는 "그대들에게 오는 이는, 그가 친구든 원수든 강도든 도둑이든 형제로 맞아들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답니다.

  프란치스코성인이 그를 따르던 사람들과 작은 형제회라는 수도원을 세웠는데 이것이 탁발수도원의 시작이 되었지요.

  프란치스꼬 성인이 태어나서 활동했고, 죽은 후 묻혀 있는 곳은 이태리의 중부 움브리아 지방의 농촌마을 아씨시, 인구 2만5천 명의 이 작은 고장은 800년 전 이곳에서 살다 간 한 위대한 인물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서 많은 순례자가 찾고 있답니다. 로마에서 북쪽으로 약 두 시간 반쯔음 버스를 타고 갔는데 인근에는 안정환 선수가 있던 페루자를 지나서 가지요.

멀리 산기슭에 중세 시대의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는 웅장한 대성당과 수도원이 가슴을 벅차게 하는군요. 그리고 이웃하여 반듯반듯 어깨를 나란히한 마을이 모여 있네요. 그 당시 유럽은 도시 국가가 많아서 도시끼리 침략 전쟁이 흔해 성곽을 산 위에 쌓아서 침략에 대비했다는군요. 그래서 아씨시의 요쇄가 수도원보다 더 높은 곳에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더이다.  부유한 주민들과 수도원, 교회 건물은 아씨시처럼 산기슭에 세워져 있답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달동네가 이곳에서는 정반대로 부자촌이 되나요? 넓다랗게 펼쳐진 들판에는 올리브 농원이, 수도원과 아씨시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기슭에는 삼나무가 울창한 아름다운 농촌 마을입니다.

  아씨시, 한가로운 기차역 앞에 자리한 '천사들의 성모 성당(뽀루지운꼴라)' 에서 제 순례는 시작됩니다.

* * * *

  어제가 입춘이어서인가 코끝에 스미는 봄 내음, 달콤한 피로함과 그리고...물밀듯 밀려오는 그리움,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류시화의 시를 빌려도 내 사랑은 어쩔 수 없어, 길고도 긴 내 연서(戀書)를 띄우고자 합니다.

  아마도 "그분"이 불러주셨는가?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수도원의 웅장한 자태를 바라 보면서 말할 수 없는 감동으로 순례의 길을 떠나는 가난한 순례자의 벅찬 가슴을 그대는 헤아릴 수 있을까?

  화려한 대성당보다 나를 감동시킨 것은 예정되었던 프란치스꼬수도원 대성전에서 순례의 첫 미사를 드리지 못해서 낙담하고 있던 차에 친절한 수사님이 자기들의 경당을 소개시켜 준 일이겠지요. 영화에 보셨겠지요, 전설에 나오는 고성(古城)의 미로가? 수도원의 꾸불 꾸불한 지하 복도를 돌아서 몇 차례나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흡사 영화에 우리가 출연하는 듯 두근두근했다니까요.

  한참이나 걸려 당도한 수도자들의 성당 "작은평화의 경당" 그곳에서 첫 미사를 드렸다는 걸 꼭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성인 되십시요"  순례를 이끄는 요셉 신부님의 엄청난 화두(話頭), 우리가 짊어지고 걸어 가야 할 엄청난 삶의 무게를 오늘은 비겁하게 벗어 버리고픈 짐이라 생각하지 않을래요. 마땅하게 받아들여야 할  "그분" 의 부르심으로 알고 외려 마음은 편안해져 갑니다. 아득하게 느껴지던 경외의 맘을 담아 성인의 발자취를 맡아 보고 더듬어 보면서 순례의 걸음을 딛습니다.

  대성전에 걸려 있는 피렌체 출신 치마부에가 그린 그림을 봅니다. 성모님께 예수님의 삶과 가장 닮은 분이 누구인가 여쭙자 성모님의 답변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성모님께서 당신 바로 앞에 계신 요한 사도를 못본체 하고는 시선을 돌리지 않고 뒤편에 서 계신 왜소한 프란치스코 성인을 가르키셨는 데, 그 성모님의 엄지손가락, 장난꾸러기 소년처럼 뒤로 제친 모양이 너무도 유머스러워 한참을 웃었더랬습니다. 성모님 앞에 서 계신 사도 요한 성인이 민망해보였다는 것은 제 우려가 너무 심한 탓일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맺어 주신 모자의 인연으로 오랜 세월을 모신 요한사도의 공로가 헛 것이 될 정도로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이 치열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지요.

  무소유의 삶과 비둘기와 염소와 같은 동물에게도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려 했던 프란치스코 성인을 다시금 깊은 감동으로 뵙게 됩니다.
  그래요, 수많은 성인들이 계시지만 프란치스코 성인 만큼 예수님과 닮은 삶을 사신 분은 드물다는 표현이겠지요. 당시 이태리의 유명한 치마부에 화가가 가제는 게편이라고 자기나라 성인을 추켜세운 점도 있겠지만  가난하게 살면서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였을 뿐만 아니라 말 못하는 동물에게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였답니다. 염소와 망아지, 비둘기 심지어 늑대까지 성인 앞에서 먹이를 먹으면서 그렇게 성인의 말씀을 경청했답니다.

  타우 십자가(성인이 즐겨했던 영어로 티자형 십자가)를 목에 걸고 이웃해 있는 끼아라(글라라) 성녀의 모습을 뵈오러 끼아라 수도원 성당을 찾아 갑니다. 임종시의 모습으로 누워 계신 성녀를 뵙고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사랑과 헌신 앞에 고개를 숙입니다. 

  또 아씨시에 있는 성당 중에 다미안을 빼놓을 수 없지요. 다미안 성당은 성인과 참으로 인연이 깊은 곳이지요. 이곳에서 기도하는 중에 성당에 걸려있는 십자가(다미안 십자가는 독특한 모습으로 유명)로부터 "프란치스꼬야, 쓰러져 가는 나의 집을 수리하라" 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프란치스꼬 성인은 이를 당시 퇴락한 성 다미안 성당을 보수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했었지요. 하지만 하느님이 그에게 맡긴 일은 이보다 훨씬 큰 것이었어요. 당시 세속화와 비대화로 병들어 가면서 또 한 차례의 변화를 요구 받고 있던 성 교회를 갱신시키라는 사명이 프란치스꼬 성인에게 주어진 것이었지요.
  성인이 수도회를 만든 후 성 다미안 성당에 그를 따르던 귀족 출신의 처녀 끼아라(글라라)가 40 년간 살며 수녀원을 운영하게됩니다. 끼아라 성녀가 만든 '글라라 관상수녀회'는 프란치스꼬회의 자매 수도 단체로 지금도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함께 활동하고 있답니다.

  이러한 두 분의 숭고한 동지적인 헌신과 사랑 때문에 부부간에 영세명을 정할 때 남편이 프란치스코 하면 부인은 글라라라고 이름을 정하는 거 같아요.

  성인은 평생 병마에 시달려서 계속되는 수도 생활과 전도 여행으로 건강이 몹시 좋지 않았답니다. 특히 결핵과 눈병에 시달렸고 만년에는 거의 실명 상태에 이르렀고 세상을 떠나기 두 해 전에는 예수님의 오상(五傷,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다섯 가지의 상처, 즉 두 손과 두 발, 옆구리의 상처)이 나타나는 기적으로 더욱 고통에 시달렸답니다. 더우기 프란치스꼬 수도회는 한 곳에 머물러 수도 생활에 전념하는 것이 아니라 이슬람 지역에서 아프리카와 스페인, 근동지역까지 찾아가서 전도 활동을 하는 순회수도회였으니 오죽 힘들었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보더라도 성인이 겪으신 고초와 순명은 후일에 이 작은 형제회가 세계에서 제일 큰 수도회로 발전하게 되는 밑거름이 되었을 거예요.
  우리나라에는 성인이 세우신 수도회의 세 갈래인 꼰벤뚜알, 카푸친 프란치스꼬회와 작은 형제회가 모두 들어와 있지요. 또한 봉쇄 수도회인 글라라 관상수녀회를 제 2회라고 하며, 평신도들로 조직된 재속 프란치스꼬회를 제 3회라고 한답니다. 또한 제 3회 소속평신도들을 프란체스칸이라고 부르지요.

  성인께서 태어나고 자랐던 좋은 집,아버지가 부유한 대 상인이었기에 산 위에 자리한 돌로 지어진 멋진 집을 마다하고 산 아래 가난한 소작인과 이웃하며 살았답니다. 그리고 다미아노 성당의 십자가상으로부터 "가서 무너져가는 나의 집을 일으켜 세우라" 고 주님께서 일러주신 사명을 완수하시기위해 바친 성인의 헌신과 일생이 새로워집니다.

  그 시대, 1,000년을 전후하며 오랫동안 유럽을 괴롭히던 바이킹의 침략과 도시들끼리의 전쟁에서 벗어난 유럽의 각 나라들은 평화를 구가하는 좋은 시절이었답니다.  동시에 자연환경도 순조로와 풍요를 누리면서 유럽은 인구가 늘어나고 도시와 농촌지역 모두 생활형편이 급격히 나아지게 되었지요. 유럽에 불어오는 대변혁의 바람은 시민사회뿐 아니라 교회와 수도원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수도원문화라고 해야 하나요? 뜻있는 젊은이들이 모여 들면서 수도원은 학교와 제대로 된 신앙 교육시설이 없던 당시, 문맹이던 시민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체계적인 신앙교육을 떠맏게 되면서 화려한 수도원문화를 꽃 피웠지요. 반면에 교회는 관료화 되어가고 시민들의 교육기관 역할을 하던 수도원도 차츰 세속화의 늪에 빠져들게 됩니다. 참으로 오묘한 세상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풍요롭고 화려하게 피어오르던 신앙의 꽃이 그 그늘 아래 어둡고 음습한 독버섯의 싹을 움티우다니요.

  드디어 성인에게 하느님의 지상명령이 떨어집니다. "내 교회를 일으켜 세우라" 는 하느님의 명령을 따라 침체해 가던 시대적 환경에 맞서 우뚝 선 성인의 헌신이야말로 오늘, 대형화의 폐해에 빠진 교회와 하느님을 잃어버린체 타인에 대한 따스한 눈길을 거두어 버린 우리 신앙생활에 꼭 필요한 그 무엇이 아닐까요?

  붉은 와인 한 잔과 파스타를 겯들인 점심을 즐기는 정갈한 레스토랑에서 비로서 제가 순례를 떠나온 게 실감나더이다. 정갈한 아씨시,깃털처럼 부드러운 싱그런 바람, 아무리 생각해봐도 겨울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참으로 여유로운 봄날처럼 한가로움을 즐깁니다.

  참, 성인의 집을 둘러 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유럽을 무대로 활동하던 대포목상이었던 아버지와 신심이 깊은 프랑스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성인은 25세 무렵 환시를 통해 하느님을 따르는 수도자의 길을 가게 되지요.  먼저 아버지의 재물을 퍼내 가난한 이에게 내주자 아버지는 달래고 말려 보아도 말을 듣지 않는 성인을 수갑까지 채워 집안에 가두었답니다 세상에...,

  이 것을 보다 못한 어머니가 아버지 몰래 아들을 풀어 주었다는 성인의 집과 진열되어 있는 수갑을 둘러 보면서 프란치스코성인을 뜨겁게 넘치게 했던 그 무엇을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보잘것없는 저도 그 사랑으로 넘치게 해주십사고...

  돌아오는 길, 아씨시의 높은 성벽에 서서 저멀리 야트막하게 펼처진 들녘을 내려다 봅니다. 지금이라도 구부정하고 왜소한 모습의 성인께서 새 모이를 뿌리는 모양이 정겹네요. 강아지,염소,망아지와 성인의 어깨에 올라 지저귀는 비둘기가 맛있게 먹이를 먹으면서 성인이 들려주는 하느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황혼에 물드는 아씨시, 이 고즈녁하고 평화로운 성인의 고향에서 멀리 있는 그대에게 인사를 전합니다,

  이렇듯 붉고 아름답게 저녁 하늘을 수 놓은 황혼에 물든 프란치스코 성당의 둥근 돔을 바라보며

  "오! 하느님, 저를 이 자리에 불러 주시다니요..."

  외로운 순례자의 순례의 길은 이렇게 크나큰 축복 속에 시작됩니다. 그럼...

* * * *

  사실 이번 순례에는 대성전의 곳곳이 시멘트로 때워져 있고 보수공사 중인 터라 각종 자재가 널려있어 제대로 볼 수 없었어서 참 안타까웠습니다. 지난 1,997년 아씨시를 강타했던 대지진으로 대성전을 비롯하여 아씨시 전체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네요. 특히 프란치스꼬 성인의 일생을 28장의 프래스코화에 담은 유명한 조또의 벽화는 산산조각이 났다가 컴퓨터의 도움으로 간신히 복원되었지만 상당 부분이 시멘트로 때워져 있어 안타까웠습니다.

 

  사족(蛇足)으로 말씀드린다면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의 건축양식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평소 청빈을 강조하신 분이고 또한 스스로 가난하게 사셨던 분인지라 극히 검소하게 지었답니다.  예술적인 건축양식과 치장을 거부하고 지극히 절제된 선과 면으로 이루어진 건축은 후일 시토회수도원에 영향을 끼쳤다합니다. 유럽의 많은 수도원이 보여주는 화려한 조각과 장식으로 돋보이는 고딕양식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오히려 그런 점에서 담백한 건축미를 통해 하느님께로 향한 외경심을 발견할 수 있지요. 

  그렇습니다, 프란치스꼬 수도원이 보여주는 그 무엇은 우리의 닫힌 눈을 하느님의 영광을 향해 눈 뜨게 하는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극한 단순함이 보여주는 담백함이야말로 우리에게 아름답다는 게 무언지 자신의 몸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화장을 거부한 수녀님이 풍기는 아름다움과 짙은 화장을 한 여인들의 천박함을 비교할 필요는 없겠지요?  이런 면에서 우리나라의 청자가 좋은 비교가 될 것같아요. 

  저의 눈높이가 그렇고 그렇지만 아씨시의 장중한 수도원 돌회랑을 돌아나오며 하느님을 향한 열정과 그리움으로 쌓아올린 중세 수사들이 보여주는 엄격함과 절제된 기도의 울림을 가만히 듣고 있었습니다.  

  혹시, 들어보셨나요? 청자를 좋아하는 분들은 지금도 청자 표면에 갈라지는 무수한 작은 금들이 울리는 청량한 울림을 들을 수 있답니다. 천년을 두고 갈라지는 그 미세한 울림을... 득음의 경지라나요?

*       *            *      *

 

  저희 본당 홈피에 올렸던 글이지만 용서하신다면 계속 올리고자 합니다. 모자란  글 솜씨와 믿음, 어느 한 가지 자랑할 게 없지만 너그러운 마음으로 읽어주시면....

 

주님 안에 한 형제 




1,450 0

추천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