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1일 (화)
(녹)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

성지순례ㅣ여행후기

여우목 성지의 붉은 감홍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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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태무 [cheonhabubu] 쪽지 캡슐

2008-11-22 ㅣ No.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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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11.21 금요일

 

 여우목 교우촌:문경시 중평동 (054-572-0531 문경성당)

 

일기예보는 따뜻할 거라 했고 오전 내내 따뜻했던 날씨였다.

가장 깊은 산골이 예상되는 안동 교구 순례는 어려운 숙제였다.

갑자기 상주의 신앙 고백비에서부터 불던 바람은 진안리에서 거칠어졌다.

진안리의 칼바람을 맞고 차를 돌려 출발했다. 3시반 쯤.

상주 옥산 신부님께서 알려 주신 <동로> 가는 길로 계속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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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후미진 산골...

약 30분쯤 차를 달렸는데도 여우목은 커녕 아무 것도 없다.

길에 돌로된 표지석이 있다고 가르쳐 주셨기에 그걸 살피며 갔다.

그러나 가늠할 수 없어서 길 가에 서 있는 택시기사에게 물어 보았다.

 

"네, 아직도 한 5킬로미터를 더 가면 오른쪽에 주막이 하나 있습니다.

그 곳에서 왼쪽으로 올라가면 거기에 길이 잘 만들어져 있을 겁니다."

기사는 매우 친절했다.

길에서 저런 사람을 만나면 종일 기분이 좋지..

아마도 크리스토 폴 성인이 보내셨을지..

순례자의 주보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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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안가서 왼쪽에 <내고향 중평리>란 표지석이 커다랗게 서 있었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표지석 가까이 가 보았다.

가장 아랫쪽에 잘 보이지도 않게 '여우목 1.5킬로미터' 더 가라고

씌어 있었다. 반가운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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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목 주막>, 아무도 없는 빈 주막에 가랑잎이 구르고 있었다.

왼쪽으로 약 300미터 쯤 걸었을까?

월악산 국립공원관리인이 써 둔 팻말이 입구에 붙어져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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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눈을 피해 살았던 옛 교우촌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사람 살던 흔적은 남아 있었다.

빠알간 감이 늦가을 찬 바람에도 하늘 높이 달려 영롱한 빛을 발하며

달랑달랑 달려 있었다.

숨어 살면서 얼마나 가슴 졸이며 서로를 위한 따뜻한 정으로

서로를 감추며 더 큰 사랑을 주고 받으며 살있던 것일까?

늙은 감나무, 모과나무..그리고 높이 달린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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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교구에서 최근에 사들인 300평으로 꾸며진 곳이다.

순교자들의 고통을 생각하게 하는 14처의 조각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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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치보와 그 아들의 동그만 두 묘소.

순례자를 위한 자연 친화적인 화장실.

늙은 감나무 아래 정답게 놓여 있는 돌 의자들....

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슬픈 신앙의 조상들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쓸쓸한 가랑잎 깔린 호젓한 길과

주인 없이 붉고 맛있는 감을 매달고 섰는 늙은 감나무들과

아직도 이윤일 요한님, 하고 외치면 왜, 하고 대답할 것 같은

그분들의 숭고한 죽음을 상상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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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아무리 없더래도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웅얼웅얼

'어머니께 청하오니 내맘 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 주소서'

사르륵 사르륵 가랑잎이 대답을 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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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었으니 얼른 가 봐. 지금은 추우니까, 더 따뜻해지면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오게나.

감나무 밑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나 나누시게

아픈 이야기도, 사는 이야기도. 그대 소망도 기도하면 다 들어주실 걸세

저기 저 하느님께서..."

우리는 다음 해를 기약하고 그 호젓한 교우촌을 나섰다.

여우의 울음인지 "꺼억꺼억" 짐승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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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우목 성지는 103위 성인인 이윤일 요한 성인(대구 관덕정, 대구대교구 제2의 주보 성인,

당시 여우목 공소회장)과 서치보 요셉 가정에 의하여 이루어진 교우촌이다.

충청도 홍주 태생의 요한 성인은 1866년 병인박해때 11월 18일 30명의 신자들과함께 체포되어 상주 감영으로,

다시 대구 감영으로, 1867년 1월 21일 관덕정에서 참수 순교 했다.

미리내 묘역에 있던 그는 120년 되던 1987년 1월 21일 대구 관덕정 순교 기념관에 옮겨 모셨다.

여우목은 부근에 교우촌인 ‘건학’과 ‘부럭이’(부락이)가 산길로 불과 20-30리 내에 있다한다.

이들 세 교우촌은 처음부터 서로 빈번한 접촉을 하면서 이웃집 드나들 듯이

서로 긴밀하게 연락하고 서로 도와가며 열심한 교우촌을 이루어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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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목 성지는 소백산맥이 높고 험준한 대미산(1,115m)을 경계로 하여

충북 단양과 경계를 이루는 문경 지방의 최동북단에 위치해 있다.

대미산 중턱에 잡리 잡고 있어서 옛날부터 경상도 동쪽 지방의 사람들이 서울로 가기 위해서는

이 여우목 고개를 넘어 문경 읍내와 새재로 넘어갔던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곳에 처음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600년경 현재 이곳에 살고 있는

장원의 10대 조부인 장기풍이 단양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와서 움막을 짓고

다래덤불을 걷고 산지를 개간하며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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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신자들이 이 곳에 살기 시작한 것은 1839년 기해박해를 전후해서이다.

충청도 홍주가 고향인 성 이윤일 요한 가정이 상주 갈골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왔고,

그 무렵에 경상도 초대 교우 서광수의 손자인 서치보 요셉 가정이 충북 정원에서

이곳으로 피난 옴으로써 신자들이 살기 시작했다

(1815년 을해박해, 1827년 정해박해때 순교한  박경화 바오로와

아들 박사의 안드레아의 가정이 몇 곳으로 피난을 다니다가 이곳으로 우거해 살았다.

또한 경상도 첫 신자 가정 중의 한 가정인 서광수의 후손들이

1839년 기해박해쯤 이곳 여우목으로 피난 와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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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치보 요셉(1791-1840)은 가족들과 함께 이곳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1840년 9월 19일(음)에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셨다. 그 때 나이 49세였다.

그 후 선산(현 여우목 마을이 있는 뒷산)에 묻혀있던 그의 유해는

1999년 9월 18일 이곳에 새로이 산소를 마련하여 아들 서인순 시몬과 함께 이장하여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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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곳에 살다가 상주 경산 등지로 피난 갔던 서치보의 아들들인

서인순 시몬과 서익순 요한, 서태순 베드로는 병인박해 때 순교하였다.

서인순 시몬은 경산 모개골에 살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대구의 경상 감영에서 문초를 받고 감옥에서 옥사했다. 서익순 요한은 대구에서 서울로 이송되어 가서 서울 절두산에서 백지사형을 받고 치명하였다.

서태순 베드로는 박해를 만나 대구에서 문경 한실로 피난 갔다가

문경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문초를 받고 상주 진영으로 이송되어 다시 혹독한 심문을 받은 후

상주 감옥에서 옥사했다.

한편 베로니카라는 노파는 이곳에서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가는 도중에 마을 앞 노상에서 순교하였다.

                               (출처:안동교구청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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