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토마스 의사는 참된 신앙인이자 애국자의 표본으로 살다 가셨습니다.
1. 안중근의 천주교 입교
황해도 해주 진사 안태훈의 3남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난 안중근(1879~1910, 아명 : 안응칠)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됐으며,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의 빌렘(한국 이름 : 홍석구) 신부를 만나 성서를 읽고 교리를 익힌 후 19세 때인 1896년 7월 황해도 안악군 매화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명은 토마스(도마, 多墨)입니다.
2. 안중근의 천주교 선교
안중근은 교리와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교의를 토론하면서 천주교 선교에 나섰습니다. 점차 신앙이 깊어지자 안 의사는 빌렘 신부와 장터 등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권면하고 전도하고 설교했습니다. 1898년 4월 하순, 빌렘 신부가 청계동 본당을 설립하자 숙부 안태건(가밀로)회장과 함께 교회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당시 안 의사는 빌렘 신부와 함께 공소를 방문하기도 하고, 미사 복사도 하고, 비신자에게는 천주교를 안내하는 등 빌렘 신부의 선교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1899년에는 청계동본당 총대(지금의 사무장직)에 추대돼 7년간 금광 감리사건 등 교회 안팎의 여러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3. 안중근의 신앙
신성국 신부(청주교구 대소본당 주임)가 안 의사를 신앙인 관점에서 상세하게 연구하여 펴낸 <의사 안중근>(도서출판 지평)에는 안 의사의 천주교 교리 설교 내용이 상세하게 담겨있습니다. 그의 천주교 교리 설교는 곧 그의 신앙고백이었는데, 천주교의 핵심 교리인 인간 존엄성, 영혼의 존재, 영혼의 불사불멸, 상선벌악, 구속강생, 교회 등에 이르기까지 교리 설명이 매우 논리정연하고 체계적이며 분명합니다. 또한 깊이있는 동양철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 접근이 돋보이며, 안 의사의 철저한 신앙관과 사생관(死生觀)을 엿볼 수 있습니다.
4. 당시 천주교 한국교구의 행태
그러나 당시 한국교구청의 모습은 바람직한 목자의 모습 그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조선에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이후 프랑스인으로 한국교구장에 임명된 뮈텔 주교는 1899년 대한제국정부 내부(內部) 지방국과 정교분리 원칙을 고수하겠다는 교민조약을 체결합니다. 이후 한국이 제국주의 열강의 세력다툼의 틈바구니 속에서 갈수록 어려움에 처해졌지만, 프랑스 주교는 정교분리의 원칙을 고수하면서 한국인들의 자주독립 열망을 사실상 외면했습니다. 거의 한 세기에 걸쳐 무리한 박해의 칼날을 경험한 서양선교사들은 한국의 독립보다는 교회의 보호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5. 천주교 성직자들에게 대항한 안중근의 의기
그러나 안 의사는 신실한 신앙인인 동시에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는 애국자였으며, 비록 자신이 따르는 성직자라 할지라도 옳지 않은 일에는 거침없이 나서서 지적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안 의사의 자서전을 보면 자신이 따르던 빌렘 신부와 크게 다툰 일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때 나는 홍 신부(빌렘)와 크게 다툴 일이 생겼다. 즉, 홍 신부는 언제나 교우들을 억압하는 폐단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여러 교우들과 상의하여 말하기를 "성스러운 교회에서 어찌 이와 같은 도리가 있을 수 있겠소. 만일 홍 신부의 행위가 개선되지 않으면 서울로 가서 주교에게 청원할 것이고, 만약 주교가 듣지 않는다면 로마로 가서 교황에게 이를 청원하여 이와 같은 폐단을 없애도록 할 것이오."...>
당시 프랑스인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을 무시하고 심지어 노인들에게까지 손찌검을 해대는 무례를 범하는 일이 많았는데 처음엔 빌렘 신부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안 의사가 저렇게 교우들을 대표해 항의하자 빌렘 신부는 크게 노하여 안 의사를 무수히 때렸습니다. 안 의사는 분했으나 욕됨을 참았습니다. 뒤에 빌렘 신부는 안 의사에게 용서를 청하여 둘은 화해하였고 둘도 없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안 의사는 빌렘 신부 밑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교회의 앞날에 대하여 많이 고민하였고 빌렘 신부와 함께 서울에 가서 뮈텔 주교를 만나 대학 설립을 청원하게 됩니다.
"지금 한국인 교인들은 학문을 배우는 것이 없어서 선교를 하는데 손해가 많습니다. 서양의 수도회에서 박학한 사람들을 초청하여 대학을 설립하고, 국내의 재주가 뛰어난 자제들을 교육한다면 얼마 안 가서 큰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뮈텔 주교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한국인들이 만약에 학문을 하게 되면 믿음에 좋지 않소, 앞으로 또다시 이와 같은 말을 내어놓지 마시오."
안중근은 주교에게 여러번 대학 설립을 권고했으나 끝내 거절당하여 그 분함을 참지 못하여 "서양의 교회(천주교)가 진리임에는 믿을지언정 서양 사람의 마음은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다."고 개탄하며 그동안 열심히 공부하던 프랑스어를 더 이상 배우지 않았습니다.
뮈텔 주교가 조선의 천주교가 뿌리내리는 데 큰 공헌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한국 천주교회 총 책임자이던 뮈텔 주교가 바란 것은 천주교 선교 그 이상은 아니었습니다.
이상의 기록에서 당시 한국 내 프랑스인 교회 지도자들의 비뚤어진 대(對)한국관과 안중근 의사의 의로운 신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안 의사는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 발전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하였지만, 성직자들의 잘못에 대하여는 솔직하게 비판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참된 용기도 함께 갖추고 있던 신앙인이었던 것입니다.
6. 안중근 의사의 의거
안 의사는 의거 전에 "하느님 성공을 주십시오."라며 성공을 기원하는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또한 의거를 위한 하얼빈 역 사전 답사 후 의거를 함께 준비해온 동료 우덕순에게 건네준 총알에는 총알 끝에 십자가형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 저격 후 "코레아 후라(대한국 만세)"를 세 번 외치고 체포된 안중근은 저격 직후 이토의 죽음을 확인하지는 못하였는데, 안중근을 지켜본 간수는 감옥에서 간수에게 이토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는 십자성호를 그으며 "하느님 감사합니다."하며 기도하였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6. 안중근 의사의 옥중 고해성사, 성체성사, 유언
1910년 안중근과 빌렘신부의 옥중 재회를 상세히 묘사하여 보도한 제호를 알 수 없는 만주의 일본어 신문(2002년 발견)을 인용합니다.
안 의사는 1910년 3월 중국 뤼순(여순)의 일본군관동도독부에서 순국하기 전 감옥으로 찾아온 빌렘 신부를 3월 8일, 9일, 10일 3차례에 걸쳐 만납니다.
고해성사를 위해 안중근은 8일 밤에 가로 34cm 세로 24cm 가량의 얇은 양지 20여장에 자신의 고해할 내용을 조목조목 적어 참회를 했습니다. 9일 고해성사를 위해 빌렘 신부를 만날 당시 면회실에는 이 기사를 기록한 신문기자와 교도소장, 통역관, 감리, 간수 1명이 배석했는데 빌렘 신부는 교회법을 인용하여 고해성사를 위해 그들이 물러갈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합니다. 그래서 안중근은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20분에 걸쳐 빌렘 신부의 귀에 입을 대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고해성사를 본 후 후 안중근은 “이제 아무것도 참회할 것이 없다”고 말했고, 빌렘 신부는 “이처럼 용의주도하게 (성사를) 한 것은 일찍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이라며 “안중근은 고해성사를 통해 영아처럼 깨끗한 몸이 됐다”고 말했습니다. 이 고해성사 광경을 지켜본 일본인 통역관 소노키는 “고해 후 안중근은 평상시와 전혀 다른 사람처럼 신비적인 모습을 보였다”서 말했다. 또 다른 일본인 배석자는 “한국어로 귓속말로 고백을 해 알아들을 수가 없었으나 안중근과 빌렘 신부는 이심일체(二心一體)가 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묘사했습니다.
10일 빌렘 신부는 안 의사 앞에서 미사를 집행하고 성체성사를 주었습니다. 이를 보도한 신문은 “홍 신부(빌렘)는 미리 휴대한 제기(祭器) 중에서 진주로 만든 긴 주배(酒盃)를 꺼내서 공손하게 이것을 받들고 이 속에 한 방울의 포도주를 떨어뜨리고 그 위에 냉수를 붓고 또 그 속에 그리스도의 상이 붙은 과자를 넣고 주문을 외면서 그 과자를 둘로 나눠 작은 쪽은 안에게 주고, 남은 한 쪽은 그대로 냉수의 컵을 스스로 기울여서 마셔버렸다”고 상세히 묘사했습니다. 영성체 후 안중근은 한복을 차입해 달라고 빌렘 신부에게 요청했고, 빌렘 신부는 안중근에게 현재 매일 쓰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안중근은 ‘동양 평화론’이라고 답했습니다. 빌렘 신부와 헤어지면서 안중근이 눈물을 흘린 모습을 본 통역관 소노키는 신문 기자에게 “오늘까지 100여일간 거의 매일 얼굴을 보았지만 안중근이 우는 모습은 처음”이라면서 “중근의 낙루는 아마 이것이 처음이고 마지막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안 의사의 사형 집행일은 3월 25일 또는 27일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25일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성 금요일이었고 27일은 부활절이었습니다. 안중근은 그리스도교 교인답게 성 금요일인 25일에 집행을 받기를 원하였고, 27일은 부활절이어서 빌렘 신부가 집행을 강력하게 반대하였습니다. 결국 집행일은 26일로 결정되었는데 25일은 순종황제의 탄신일이고 27일은 부활절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집행 전날인 25일 안중근은 동생인 정근과 공근을 면회하며 "친척들과 논의하여 가사를 정리하고 자식들은 빌렘 신부와 의논해 양육할 것", "동양평화와 한국독립을 위해 끝없이 노력할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으며, 이 장면을 지켜본 소노키 통역관은 "자신이 건 도박에서 이긴 사람"이라며 감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면회에 입회한 미즈노 변호사가 자신을 위로하자 그에게 “천주교에 입교하면 어떻겠느냐”며 “천주교에 입교하면 장래 언제든지 천국에서 다시 만나 천천히 이야기를 듣겠다”고 말해 그를 아연케 하였습니다.
7. 당시 한국천주교회의 대응
안 의사의 의거 당시 뮈텔 주교 하의 한국교구의 반응은 실망스러움 그 자체입니다. 안 의사의 의거소식이 전해지자 전 한국인들은 크게 고무되었으나 프랑스 외방선교회 신부들로 이루어진 한국천주교회 지도부는 상기한 바와 같이 한국독립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바, 교회에 피해가 돌아올까봐 전전긍긍하였으며, "안응칠 도마라는 신도가 있느냐"는 일본정부의 물음에 ''천주교인이 아니다''라며 교인인 사실을 부인하였습니다.
결국 빌렘 신부는 안 의사를 면회하지 말라는 뮈텔 주교의 명을 거역하고 홀로 뤼순감옥으로 가서 안 의사에게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주었습니다. 안 의사의 사형이 집행되던 3월 26일 오전 10시 바로 그 시각, 서울 명동성당과 황해도 신천성당에서 안 의사를 위한 미사가 봉헌되었으며, 빌렘 신부는 "우리 모두 함께 깨어 그분을 보내자"라며 신자들을 새벽에 성당으로 모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밝혀지자 뮈텔 주교는 빌렘 신부에게 2개월 미사 집행 정지 처분을 내리고 본국 프랑스로 송환조치하는 징계를 내립니다. 그러나 빌렘 신부는 바티칸 교회법원에 상고하여 승소하였고, 그가 안 의사에게 집행한 고해성사와 성체성사가 정당함을 확인 받았습니다.
8. 현재 천주교회의 안 의사 평가
해방 후 1979년 노기남 대주교 집전으로 명동성당에서 처음으로 안중근 의사 탄신 100주년기념 추모 미사가 열린 이래, 여러 차례 안 의사를 추모하는 미사를 열었습니다. 또한 2000년에는 과거사 참회미사를 봉헌하면서 비록 프랑스 신부들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지만 안중근 의사에 대한 당시 천주교회의 행동을 반성한다는 발표를 하였습니다.
1999년 <의사 안중근>을 펴낸 신성국 신부는 안의사는 ''순교의 맥''이며, 실학을 몸으로 완성한 ''실학의 맥''이며, 해방자로서 ''한국의 모세'', 선교열정의 측면에서 ''한국의 사도 바오로''라고 평하였습니다.
또한 2000년에 한국천주교 군종교구 대표단은 제31회 국제군인사도직총회에서 한국의 군인신자상으로 안중근 의사를 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1997년부터 한국교회사연구소 등 많은 천주교 단체에서 순교자이자 순국자인 안중근 의사를 복자위, 나아가 성인위에 올리는 시복시성운동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변기찬 박사는 <안중근 의사의 시복시성을 위한 소고>에서 안 의사를 성녀 잔 다르크(요안나 아르크)와 비교하여 시복시성의 필요성을 피력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천주교회에서 안중근 의사가 정식으로 성인이 되어 ''중근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쓸 수 있게 되기까지는 많은 연구와 노력이 뒤따라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결정적인 어려움은 잔 다르크는 한 사람의 인명도 해하지 않은 반면 안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사실이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 의사는 의거 직후 법정에서 자신의 의거 이유를 이렇게 밝혔습니다.
"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은 한국 독립전쟁의 한 부분이요, 또 내가 일본 법정에 서게 된 것도 전쟁에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 자격으로 이 일을 한 것이 아니라 한국 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 한 것이니 만국공법에 의해 처리하도록 하라."
안 의사의 요구는 묵살되었으나 그의 주장대로 그는 일본 국내법(당시 한국은 사법권도 일제에 강탈당함)에 의한 범죄인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라 교전단체의 일원으로서 국제법에 의거한 포로대우를 받는 것이 법적으로도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교회법적으로도 안 의사의 의거는 교황들의 사회회칙 ‘민족들의 발전’(1967년)이나 ‘그리스도인들의 자유와 해방에 관한 신앙교리성 훈령’(1986년)에서 볼 수 있듯이 “교회의 교도권은 개인의 기본과 공동선을 심대하게 손상시키는 명백하고도 장기화된 폭정을 종식시키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자유의 자각’ 제79항) 무력저항이나 폭력, 혁명적 반란이 용인되는 경우에 해당됩니다. 한국 교회에서도 안 의사의 의거는 전시에 허용되는 군인의 정당한 행위로 보고 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안 의사의 의거를 이렇게 평했습니다.
"안 의사의 의거는 가톨릭 신앙과 상치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안에서 우러나온 것이며, 신앙심과 조국애는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서, 일제의 무력앞에 민족의 존엄과 국권을 지키기 위해 행한 모든 행위는 정당 방위와 의거로 보아야한다."
또한 안 의사가 신앙인으로서 보여준 모습과 교회에 대한 헌신, 그리고 현대에 적용하여도 손색이 없는 위대한 이론인 ''동양평화론'' 등 일본인들까지 감화시킨 그의 인격은 우리가 반드시 받아 공경해야할 자세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영화에 부연하자면 서세원 감독의 ''도마 안중근''은 추기경께서도 시사회에 참석하셨지만 졸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듯 합니다. 개그맨인 서세원 씨가 안중근 의사를 소재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처음부터 우려의 목소리를 자아냈는데 안 의사가 쌍권총을 쏘며 싸우는 등 3류 액션물처럼 만들어져 실제로도 그러하다는 평입니다. 우리가 진정 보고 싶은 것은 안 의사의 높은 인격과 고뇌하는 모습일테니, 권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혈육을 같이 하는 내 민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더라도 좋습니다. 조금도 걱정하지 않겠습니다." (로마 9, 3)
안중근 신앙교리
(안중근의자서전을 통해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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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아버지는 널리 복음(福音)을 전파하고 원근에서 권면하여 입교하는 사람들이 날마다 늘어갔다. 우리 모든 가족들도 모두 천주교를 믿게 되었고 나도 역시 입교 하여 프랑스 사람 선교사 홍신부요셉에게서 영세를 받고 성명을 도마라 하였다.
경문을 강습도 받고, 도리를 토론도하기 여러달을 지나, 신덕이 차츰 굳어지고 독실히 믿어 의심치 않고 천주 예수 그리스도를 숭배하며, 날이 가고 달이 가서 몇 해를 지났다. 그때 교회의 사무를 확장하고자 나는 홍교사와 함께 여러 고을을 다니며 사람 들을 권면하고 전도하면서 군중들에게 연설했었다. 「형제들이여 내가 할 말이 있으니 꼭 내 말을 들어 주시오, 만일 어떤 사람이 혼자서만 맛있는 음식을 먹고 그것을 가족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다거나, 또 재주를 간직하고서 남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그것을 과연 동포의 정리(情理)라고 할 수 있겠소. 지금 내게 별미가 있고, 기이한 재주가 있는데, 그 음식은 한번 먹기만 하면 장생불사(長生不死)하는 음식이요, 또 이 재주를 한번 통하기만 하면 능히 하늘로 날아 올라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가르쳐 드리려는 것이니까, 여러 동포들은 귀를 기울기고 들으시오. 대개 천지간 만물 가운데서 오직 사람이 가장 귀하다고 하는 것은 혼이 신령하기 때문이오.
혼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생혼이니 그것은 초목의 혼으로서 능히 생장하는 혼이요,
둘째는 각혼이니 그것은 금수의 혼으로서 능히 지각하는 혼이요,
셋째는 영혼이니 그것은 사람의 혼으로서, 능히 생장하고, 능히 지각하고,
그리고서 또 능히 시비를 분변하고, 능히 도리를 토론하고, 능히 만물을 맡아 다스릴 수 있기 때문에, 오직 사람이 가장 귀하다 하는 것이오. 사람이 만일 영혼이 없다고 하면, 육체 만으로서는 짐승만 같지 못할 것이오.
왜 그런고 하니 짐승은 옷이 없어도 추위를 나고, 직업이 없어도 먹을 수 있고 날을 수도 있고, 달릴 수도 있어 재주와 용맹이 사람보다 낫기 때문이오. 그러나 하많은 동물들이 사람의 절제를 받는 것은 그것들의 혼이 신령하지 못하기 때문이오. 그러므로 영혼의 귀중함은 이것을 미루어서도 알 수 있는 일인데, 이른바 천명(天命)의 본성이란 것은 그것이 바로 지극히 높으신 천주께서 사람의 태중에서부터 부어 넣어 주는 것으로서, 영원무궁하고 죽지도 멸하지도 않는 것이오.
그러면 천주는 누구인가.
한 집안 가운데는 그 집주인이 있고, 한 나라가운데는 임금이 있듯이, 이 천지 위에는 천주가 계시어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삼위일체 로서(성부.성자.성신이니 그 뜻이 깊고 커서 아직 해석하지 못했음) 전능(全能), 전지 (全知), 전선(全善)하고 지공(至公), 지의(至義)하여 천지만물, 일월성신을 만들어 이 루시고, 착하고 악한 것을 상 주고 벌주시는, 오직 하나요 둘이 없는 큰 주재자가 바 로 그 분이오.
만일 한 집안의 아버지 되는 이가 집을 짓고 산업을 마련하여 그 아들 에게 주어 재산을 누리며 쓰게 했는데 아들은 제가 잘난 척 생각하고 어버이를 심길 줄 몰라 불효 막심하다면 그 죄가 중하다 할 것이오. 또 한 나라의 임금이 정치를 공 정히 하고 백성들의 생업을 보호하여 모든 국민들이 태평을 누릴 수 있게 되었는데 백성이 그 명령에 복종할 줄 모르고 전혀 충군 애국하는 성품이 없다면 그 죄는 가장중하다 할 것이오.
그런데 이 천지간에 큰 아버지요, 큰 임금이신 천주께서 하늘을만들어 우리를 덮어 주시고, 땅을 만들어 우리를 떠받쳐 주시고,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들어 우리를 비추어 주시고 또 만물을 만들어 우리로 하여금 쓰게 하시니 실로 그 크신 은혜가 그같이 막대한데 만일 사람들이 망녕되이 제가 잘난 척, 충효를 다하지 못하고 근본을 보답하는 의리를 잊어버린다면 그 죄는 비길 데 없이 큰 것이니어찌 두려운 일이 아니며, 어찌 삼갈 일이 아니겠소.
그러므로 공자도 말하기를,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데도 없다」했소. 천주님은 지극히 공정하여 착한 일에 갚아주지 않 는 일이 없고 악한 일에 벌하지 않는 일이 없거니와, 공죄의 심판은 몸이 죽는 날 내 는 것이라 착한 이는 영혼이 천장에 올라가 영원무궁한 즐거움을 받는 것이요, 악한 자는 영혼이 지옥으로 들어가 영원히 다합없는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오. 한 나라의 임금도 상 주고 벌주는 권세를 가졌거늘 하물며 천지를 다스리는 거룩한 큰 임금이 겠소. 혹시 어째서 천주님이 사람들이 살아 있는 현세에서 착하고 악한 것을 상 주고 벌주지 않느냐고 하겠지마는 그것은 그렇지 아니하오. 이 세상에서 주는 상벌은 한정이 있지마는 선악에는 한이 없는 것이오.
만일 어떤 사람이 한 사람을 죽여 시비를 판별할 적에 죄가 없으면 그만이려니와 죄가 있을 적에 어찌 그 한 몸뚱이만 가지고 대신할 수 있겠소. 그리고 또 만일 어떤 사람이 여러 천만 명을 살린 공로가 있을 적에 어찌 잠깐 되는 세상영화로써 그 상을 다했다고 할 수 있겠소. 더구나 사람의 마음이란 때를 따라 변하는 것이어서 혹 금시는 착하다가도 다음 시간에는 악한 일을 짓기도 하고 혹시 오늘은 악하다가도 내일은 착하게도 되는 것이니 만일 그 때마다 선악에 상벌을 주기로 든다면 이 세상에서 인류가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 분명하오.
또 이세상 벌은 다만 그 몸을 다스릴 뿐이요. 그 마음은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지만 천주님의 상벌은 그렇지 아니하오. 전능(全能), 전선(全善)하고 지공(至公), 지의(至義)하기 때문에 사람의 목숨을 너그러이 기다려 주었다가, 세상을 마치는 날 선악의 경중을 심판한 연후에, 죽지 않고 멸하지도 않는 영혼으로 하여금 영원무궁한 상벌을 받게 하는 것인데, 상은 천당의 영원한 복이요, 벌은 지옥의 영원한 고통으로서, 천당에 오르고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한번 정하고는 다시 변동이 없는 것이오.
아~사람의 목숨은 많이 가야 백년을 넘지 못하는 것이오. 또 어진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귀하고 천한 것을 물을 것 없이 누구나 알몸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알몸으로 뒷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간 다는 그것이오. 세상일이란 이같이 헛된 것인데, 이미 그런 줄 알면서 왜 허욕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거리며, 악한 일을 하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인지, 나중에 뉘우친들 무엇하리오. 만을 천주님의 상벌도 없고 또 영혼도 역시 몸이 죽을 때 같이 따라 없어지는 것이라면, 잠깐 사는 세상에서 잠깐 동안의 영화를 혹시 꾀함직 하지마는, 영혼이란 죽지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이며, 천주님의 지극히 높은 권한도 불을 보는 것처럼 명확한 것이오. 옛날 요(堯) 임금이 말한, 「저 흰구름을 타고 제향에 이르면 또 다른 무슨 생각이 있으리요」한 것과 또 「혼은 울라가는 것이요, 넋은 내려가는 것이라」한 것들이 모두 다 영혼은 멸하지 않는다는 뚜렷한 증거가 되는 것이오.
만일 사람이 천주님의 천당과 지옥을 보지 못했다 하여 그것이 있는 것을 믿지 않는다 하면, 그것은 마치 유복자가 아버지를 못 못보았다고 해서 아버지있는 것을 안 믿는 것과 같고, 또 소경이 하늘을 못보았다고 해서 하늘에 해가 있는 것을 안 믿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이오. 또 화려한 집을 보고서 그 집을 지을 때 보지 않았다 해서 그 집을 지은 목수가 있었던 것을 안 믿는다면 어찌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소. 이제 하늘과 땅과, 해와 달과 별들이 어째서 어김없이 운행되는 것이며, 또 봄.여름.가을. 겨울이 어째서 틀림없이 절서가 돌아갈 수 있을 것이오. 비록 집 한 간, 그릇 한 개도 그것을 만든 사람이 없다면 생겨질 수가 없는 것인데, 하물며 수륙간에 하많은 기계들이 만일 주관하는 이가 없다면 어찌 저절로 운전될 리가 있겠소. 그러므로 믿고 안 믿는 것은, 보고 못 본 것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이치에 맞고 안 맞는 것에 달렸을 따름이오.
이러한 몇 가지 증거를 들어, 지극히 높은 천주님의 은혜와 위엄을 확실히 믿어 의심하지 아니하고 몸을 바쳐 신봉하며, 만일에 대응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인류들의 당연한 본분인 것이오.
지금으로부터 일천팔백여 년 전에 지극히 어진 천주님이 이 세상을 불쌍히 여겨,
만인의 죄악을 속죄하여 구원해 내시고자 천주님의 둘째 자리인 성자를 동정녀 마리아의 뱃속에 잉태케하여 유태국 베들레헴에서 탄생시키니 이름하되 예수 그리스도라 했소. 그가 세상에 머무르를 33년 동안, 사방을 두루 다니며 사람들을 보고 그 허물을 뉘우치게 하고, 신령한 행적을 많이 행하였으니 소경은 눈을 뜨고, 벙어리는 말을 하고, 귀머거리는 듣고, 앉은뱅이는 걷고, 문둥이가 낫고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 원근간에 이 소문을 듣고 따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소. 그 중에서 12인을 가려 제자를 삼고 또 특히 한 사람을 뽑으니 이름은 베드로라. 그러써 교종을 삼아, 장차 그 자리를 대신케하고자 권한을 맡기고 규칙을 정해서 교회를 세웠던 것이오. 지금 이태리국 로마부에서 그 자리에 계신 교황은 베드로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자리로서 지금 세계 각국 천주교인들이 모두 다 그를 우러러 받드는 것이오.
그 당시 유태국 예루살렘 성중에서 옛 교를 믿던 사람들이 예수의 착한 일하는 것을 미워하고 권능을 시기하여 무고로 잡아다가 무수히 악형하고 천만 가지 고난을 가한 다음, 십자가에 못을 박아 공중에 매어 달았을 때, 예수는 하늘을 향해 「만인의 죄 악을 용서해 줍시사」하고 기도한 뒤에 큰 소리 한 번에 마침내 숨이 끊어졌소. 그 때 천지가 진동하고 햇빛이 어두워지니 사람들이 모두 놀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었고, 제자들은 그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냈소. 예수는 사흘 뒤에 다시 살아나 무덤에서 나와 제자들에게 나타나 같이 지내기를 40일 동안에 죄를 사하는 권한을 전하고 무리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소.
제자들은 하늘을 향하여 예배하고 돌아와 세계를 두루 다니며 천주교를 전파하니 오늘에 이르기 까지 2천년 동안에 신도들이 몇 억만 명인지 알지 못하고 천주교의 진리를 증거하고 천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려는 사람들도 몇 백만 명인지 모르오. 지금 세계 문명국 박사. 학자. 신사들도 천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이 없소. 그러나 지금 세상에는 위선의 교도 대단히 많은데 이것은 예수께서 미리 제자들에게 예언했으되 「뒷날 반드시 위선하는 자가 있어, 내 이름으로 민중들을 감화시킨다 할 것이니, 너희들은 삼가서 그런 잘못에 빠져들지 말라.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은 다만 천주교회의 문 하나밖에 없다」고 하였소.
원컨대 우리 대한의 모든 동포 형제. 자매들은 크게 깨닫고 용기를 내어 지난
달의 허물을 깊이 참회함으로써 천주님의 의자가 되어, 현세를 도덕시대로 만들어 다 같이 태평을 누리다가, 죽은 뒤에 천당에 올라가 상을 받아 무궁한 영복을 함께 누리기를 천만번 바라오」 이같이 설명했는데 듣는 사람들로는 혹은 믿는 이도 있었고 믿지 않는 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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