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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밭 추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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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올라와서 중학교를 다닐 때 동급생들에게 ‘보리 문디(문둥이)’라고 놀림을 억시기도 많이 받았던, 경상도 촌놈인 나는 유난히 보리밭을 좋아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100년이 넘은 묵은 기와집이었던 우리 시골고향집 앞마당은 30여마지기 논을 가진 부잣집답게 아주 널찍했다.
가을에 추수를 하게 되면 마당귀퉁이 여기저기에 집채 만한 나락가리를 쌓아놓아야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타작을 해야만 했으니 마당이 널찍할 수밖에 없었다.
그 넓은 마당 끝에 텃밭이 펼쳐져 있었고, 텃밭 끝은 바로 문전옥답이라고 하는 논이 이어져 있었다.
그 시절엔 모든 논이 2모작을 하던 때라서 벼를 추수한 후에 다시 논을 갈아 엎어 나락그루터기를 골라내고, 골을 잡아 겨울이 오기전에 서둘러 보리를 파종하곤 했다.
찬 바람이 불거나 눈이 내려도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긴 겨울을 보낸 파란 보리 싹이 봄이 오면 마치 잠에서 부시시 깬 듯이 고개를 처들고 일어나 하루가 다르게 금세 쑥쑥 자라서 이맘 때가 되면 마을앞 넓은 논은 온통 푸른 보리 파도로 넘실거렸다.
바람이 부는 날 보리밭을 한참 바라보노라면 마치 내가 바닷가 방파제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곤 했다.
억센 나락 잎과는 달리 잘 휘어지는 보리 잎은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마치 파도가 하얀 물거품을 얹고 밀려오듯이 은빛을 내다가 바람이 방향을 틀면 다시 푸른 빛 파도가 되어 넘실댔다.
그 시절은 참으로 배가 고픈 시절이었다. 특히 마을 앞 논에 보리파도가 칠 무렵이면 ‘보릿고개’라고 하여 더욱더 배가 고플 때였다. 가을에 머슴새경을 처 주고, 농지세라고 할 수 있는 공출을 하고나면, 또 고리채인 장리쌀 빌린 것도 갚아야만 하고... 나머지 쌀을 팔아서는 형님 대학 등록금도 보내 주어야 하고, 마을에서 부자 집이라고 하는 우리 집도 보릿고개 때는 제사상에 뫼를 제외하고는 하얀 쌀밥을 구경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들에 나가 쑥을 뜯어다 쌀가루나 밀가루에 버물어서 쪄서 먹고, 산에 가서 소나무 껍질을 벗겨 와서, 물에 담아 빨간 물이 우러나면 그것을 건져다가 디딜방아에 찧어 쌀가루를 조금 넣고 송기떡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쌀이 없으면 라면 먹으면 되지"하는 요새 아이들이 들으면 아주 먼 나라 이야기로 들릴 테지만....................
모래알도 삭인다는 어린 나이에 배고픔을 느꼈으니 보리밭을 바라보면서 어찌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감상에만 젖었겠는가? 배에서 꼬르륵 꼬르륵 소리가 나는데........
‘어서 저 보리가 누렇게 여물어야 하는데....어서 저 보리가 여물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했을 것도 같다. 아니면
‘어서 저 보리가 누렇게 익어야만 아이들과 보리서리를 해 먹을 텐데’ 하는 생각도 했을 것도 같고......
보리 이삭에 박힌 알이 통통하게 여물 무렵에 아이들과 보리이삭이나 밀이삭을 뽑아 모래갱변으로 가지고 나가 불에 꺼슬러 먹으면서 입술이며 얼굴까지, 온통 검댕이 칠을 하면서 보리서리를 해 먹던 기억도...
누런 밀짚을 다듬어서 물에 푹 적셨다가 꼬깃꼬깃 엮어서 여치 집을 만들고, 들에 가서 목청이 좋는 잘 우는 여치를 잡아다가 여치집 속에 집어 넣어 툇마루 끝 서까래 밑에 달아 놓으면 바람이 불 때마다 여치집이 팽그르 돌아가며 찌르르 찌르르 울어대던 그때 그 여치소리가 지금도 듣고 싶다.
너무나 보리밭 생각이 나서 금년 봄에 사무실 앞에 있는 커다란 화분에 보리씨를 구해 와서 파종을 했다.
우리 문화회관에 찾아오는 어린학생들에게 보리에 얽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며 절약과 검소를 가르치고 싶은 마음에서......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리듯. 아이들은 내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하지만 그 중에서 한 아이라라도 내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 아이가 있을 것만 같아 올가을에는 반드시 겨울이 오기 전에 보리 파종을 서둘러 마쳐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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