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
---|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 2008년 5월 25일
요한 6, 51-58.
오늘은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입니다. 지금 우리가 들은 복음은 말했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이 말씀은 초기 신앙공동체가 성찬을 거행하면서 그들이 믿고 있던 바를 예수님의 입을 빌려 표현한 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마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서 머무른다.’ 신앙인들은 성찬 안에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삶 안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실천들이 보인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되시자 각자 자기 생업으로 돌아갔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고 믿으면서, 그들은 다시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그들과 함께 나누셨던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여, 함께 식사를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최후만찬의 식탁에서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시오.”(루가 22,19)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이 식사 중에 그들과 함께 사셨던 그들의 스승에 대해 회상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회상한 것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들의 회상은 반복되면서 이야기들이 되었고, 후에 수집되어, 책으로 엮어져서 오늘 우리가 가진 네 개의 복음서들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초기 신앙 공동체가 성찬을 중심으로 예수님에 대해 기억해 낸 것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전달된 복음서들입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실 때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병고를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가르치던 유대교 지도자들의 행동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신 것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겨서 하신 일이라고 복음서들은 말합니다. 그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신 마음이 하느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베짜타 못가에서 38년 동안이나 고생한 병자를 고쳐 놓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전합니다. “아직까지 내 아버지께서 일하고 계시며 나도 일하고 있습니다.”(5,17). 불쌍히 여기며 고치고 살리는 일이 하느님의 일이었습니다.
제자들의 회상에 의하면 예수님은 죄인들과 세리들과 어울리셨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이 버린 사람들이고 경건한 유대교인이면 상종하지 말아야 하는 죄인들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사람들과 어울린 것은 하느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실 뿐 아니라, 그들과도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양 한 마리도 잃지 않으려는 목자와 같은 하느님이라고 믿으셨습니다.
유대교는 지엄하신 하느님이 율법을 주셨고,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하느님은 가차 없이 벌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 하느님은 복수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때때로 율법을 범하셨습니다. 그것으로 율법이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결정하는 절대적 요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율법이 아니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중요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그분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위해 목숨을 버리기까지 하셨습니다. 이것이 성찬의 식탁에서 그분에 대해 회상하면서 제자들이 내린 결론입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생명을 사셨고, 신앙인은 성찬에 참여하면서 그분이 사셨던 그 생명을 산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자비하신 하느님의 생명이었습니다. 성찬은 제자들 안에 예수님의 그 믿음과 그 실천을 살아있게 하는 성사(聖事)입니다. 성찬은 하느님의 자비를 당신 생애 끝까지 실천하신 예수님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그분의 몸과 피에 참여하여 우리도 그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이 되라고 초대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다.’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신 예수님입니다. 우리도 그 몸이라는 빵을 먹고 그 피라는 포도주를 마셔서, 하느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살아 있게 한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몸은 인간관계이고 피는 생명입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예수님의 인간관계와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살아나게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평소에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하신 일은 모두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신 것이었습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며 그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버리는 이유는 많습니다. 그런 우리의 관행을 하느님의 자비의 눈길로 극복하면서 새로운 실천을 하라고 요구하는 성찬입니다.
성찬에서는 빵과 포도주만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던 하느님이 달라집니다. 하늘 저 멀리 높이 홀로 고고히 계시면서 우리를 지배하고 심판하는 분이라고 믿었던 하느님이 자비로우신 아버지로 변합니다. 우리는 그 생명을 이어받아 실천하는 그분의 자여로 변합니다. 자기 한 사람 잘 되기 위해 재물과 권력을 탐하며 살던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 우리 주변을 돌아보고, 아무런 대가없이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으면서 행복한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에게 이웃은 경쟁 대상이 아니라, 이해하고 돌보고 가엾이 여겨야 하는 대상으로 변합니다. 성찬은 대자연도 변하게 합니다. 이제 대자연은 우리가 마음대로 이용하고 버리고 가면 되는 곳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대자연이고,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며 사는 무대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베푸신 은혜로운 것이며, 우리가 깨끗하게 보존하여, 우리 후손들도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체험하며 살 수 있도록 그들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찬에서는 모든 것이 변합니다. 그리고 성찬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선을 줍니다. 자녀들을 위한 부모의 희생적 사랑,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가지는 관대하고 희생하는 마음, 다른 생명을 살리기 위한 살신성인(殺身成仁), 이런 현상들 안에 성찬은 자비하신 하느님의 일을 읽어냅니다. 크신 하느님의 자비 안에 사는 인간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현장을 외면하면, 하느님의 일을 그만큼 보지 못합니다. 성찬이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내어주고 쏟으신 예수님의 삶입니다. 성찬이 우리에게 촉구하는 것은 우리도 같은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주신 생명입니다. 무상으로 주어진 은혜로운 기회입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그 하느님의 힘이 우리 안에 충만하여, 우리도 같은 실천으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우리 주변에 나타나게 하라는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입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