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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찬 [ujesus] 쪽지 캡슐

2008-05-21 ㅣ No.120603

거룩한 연옥 영혼들과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하느님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다른 신들을 믿는 사람들과 쉬는 교우들을 위해서 라는 지향을 미사에 참례때 혹은 기도하면서 붙이면 매우 큰 선행과 보속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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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순위를 올바로 정하자
(요한네스 홀트 신부)

하인리히 슈패만(Heinrich Spaemann) 신부는 97세의 고령으로 사망했다. 슈패만 신부는 수많은 저서를 남긴 훌륭한 영적 저술가로 명성이 드높다. 여기 이 글은 슈패만 신부가 "또다른 그리스도인이 전하는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을 위한 삶의 규범들" 이란 제목으로  발표한 글을 흘트 신부가 요약하고 종교적 주석을 단 것이다. 이 여덟 개의 규범들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산상수훈의 진복팔단과 관련된 것이다.


제1규범, 가장 중요한 것을 두 번째 위치에 두지 않기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와 하느님의 유대이다. 그것은 죽을 때까지 우리에게 변하지 않는 실제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께 생각과 말과 행위의 첫째 자리를 내드리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신문이나 다른 것이 아닌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기도로 하루를 가득 채우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과의 유대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하느님께 첫째 자리를 내드리는 것은 예수님께 첫째 가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신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마태 22, 37)는 말씀을 실천하는 것을 뜻한다. 지구가 태양을 돌듯, 사람도 하느님을 주위를 돌면서 하느님을 자신의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의 창조주이신 아버지 하느님이 정말로 우리 삶의 첫째 자리에 계신지는 우리가 어떻게 하루를 시작하는지를 통해 알 수 있다. 우리는 하루의 첫마디, 첫생각을 하느님으로 시작하는가? 하루의 언제쯤 처음으로 하느님을 생각하는가? 아니면 전혀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는가? 우리는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기도로 하루를 마치고 있는가?

기도란 하느님을 생각하고 하느님과 대화하고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기도의 스승, 성 베네딕도는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가끔씩 오래 기도하는 것보다 짧게 자주 기도하시오."
우리 삶의 첫째 자리를 하느님께 내드리기 위해서는 청원을 하든 감사를 하든 어떤 참회의 말을 하든 언제나 하느님과 함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느님과 살아 있는 대화 속에 머물게 되고, 하느님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게 될 것이다.


제2규범,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
하느님의 부성애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괴롭고 나쁜 일, 기쁘고 좋은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모든 미사 때 사제는 성찬례의 감사기도에서 이렇게 말한다.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전혀 기쁘지 않을 때나 슬픔과 불행 중에 있을 때에도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슈패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느님의 부성애와 그분의 섭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주관하시므로 우리는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에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 28)라고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삶 속에서 어려움이나 고통이 주는 의미를 알고 계신다. 그분은 그것이 좋은 결과로 바뀔 것을 아시기에 우리에게 난관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숙해지고 더 멀리 가기 위해 우리에게는 고통의 학교가 많이 필요하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데살 5, 18).
모든 일에 하느님께 감사하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을 철썩같이 믿는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의 마지막 보루이다.


제3규범, 온갖 피상적인 것들이 삶 속에 퍼지지 않고 줄어들도록 노력하기
우리 주위에는 정신적 소비재가 상당히 많다. 우리가 그것이 시간을 할애할 경우 특히 TV, 라디오, 신문, 잡지 등은 잘 선택하고 제한해야 한다. 위험한 것은 우리가 제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중심을 잃어버리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세상은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모든 것까지 파는 하나의 큰 수퍼마켓이다. 광고는 다양하고 과장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가치도 없는 것을 사도록 유혹받는다.
"여러분은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십시오!" (골로 3, 2) 사도 바울로의 이 말은 다음과 같이 바꿀 수 있다. '하느님과 하느님의 일에 맛들이시오. 이 세상의 시장이 제공하는 것에 맛들이지 마십시오.'


제4규범, 검소하게 생활하고 욕심내지 않기
"생명으로 가는 문은 좁다."
짐이 없는 사람, 어린이, 가난한 사람들만이 이 문을 지나갈 수 있다. 그러므로 부유해지려고 하지 말고 가난해지려고 노력하라. 자신에게 필요치 않은 것은 기꺼이 내 주어라. 남에게 베풀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가지려 하지 말라. 놓아 버리려 하지 않기 때문에 좁은 문을 지나갈 수 없다. 그리고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부자가 되는 것을 좋아하지 말고 가난해지는 것을 좋아하라."는 말은 역설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존재해 온 많은 것이 반대된다. 왜냐하면 많이 소유하는 것은 복지사회의 모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은 전혀 다른 가치관을 제시한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그러나 부요한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는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았다"(루가 6, 20-24).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가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마르 10, 23-25).

부유한 사람은 자신의 소유물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거기에 묶여 있다. 그는 더 이상 하느님을 보지 못 한다. 그는 유감스럽게도 이미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가졌다. 그러므로 부와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은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는 위험 요소이다. 따라서 가난해지기를 좋아하라"는 복음의 말씀은 맞는 말이다. 다시 말해, 나누고 내어 주어 다른 사람과 자신의 소유를 나눠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좁은 문"의 신비에 대해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 가거라!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또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많지만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험해서 그리로 찾아 드는 사람은 적다" (마태 7, 13-14).


제5규범, 불안해하며 걱정하지 말고 안심하기. 앞일을 하느님께 맡기기
많은 소출을 얻었지만 자신과 가족만을 위해 창고에 넣어 두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에게 하느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 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 가리라"(루가 12, 20).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 그러면 재물이 없어질 때에 너희는 영접을 받으며 영원한 집으로 들어 갈 것이다"(루가 16, 9).

슈패만이 인용한 부자의 창고 비유는 되풀이해서 읽고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어떤 상속 싸움에 대해 들으셨을 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수께 '선생님, 제 형더러 저에게 아버지의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고 부탁하지 예수께서는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재산분배자로 세웠단 말이냐?' 하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사람이 제 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하고 말씀하셨다"(루가 12, 13-15).

상속 분쟁은 불쾌한 일이지만 언제나 현실적인 문제이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는 영원한 상속이 약속되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이기 때문이다(로마 8, 17). 우리에게는 오로지 이 영원한 상속이 관심사가 되어야 하고, 결국 사라질 때 재산 때문에 영원한 상속을 잃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느님께 앞일을 맡겨야 한다. "거룩한 무사태평"은 복음서의 주요 사상이다. 우리의 근심의 정도는 우리가 얼마나 하느님을 믿는가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된다.
요셉 켄테니치 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일순간도 아무 걱정이 없을 것', 이것이 우리의 가장 큰 걱정이 되어야 한다. 무관심 때문에 태평한 게 아니라 하느님께 의탁하기 때문에 오는 태평함이어야 한다."


제6규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곁에 있기
십자가는 따른다는 표시이다. 주목받지 못하고 무시되고 나이 들어 잊혀진다고 해서 기분 나빠하거나 화내지 말라. 어떤 소망이나 생각이 이루어지지 않고 다른 사람 때문에 좌절된다고 해서 화내지 말라. 오히려 다음과 같이 말하여라. "이것은 그리스도 신자가 되기 위한 단련이며 시험이다. 나에게는 그것들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고통에 참여함으로써 사람들은 비로소 그분의 부활 능력을 경험하게 된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져야 한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가 9, 23). 매일 새로이, 싫어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믿음과 소망 안에서 자신의 삶의 십자가를 지는 것, 이것은 큰 믿음이다.
바오로 사도는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십자가의 어리석음"에 대해 말한다(1고린 1, 18). 세상에서는 칭찬을 얻기 위한 자기 실현에 가치가 있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마태 10, 39)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자기 실현은 오로지 자기 포기 안에서만 존재함을 의미한다.


제7규범, 민감한 양심으로 깨어 있기
어떠한 불성실도, 어떠한 불친절도 자신에게 허용하지 말라. 그런 것은 솔직하게 찾아 내어 반성해야 한다. 하느님은 정직한 마음에 언제나 새로운 시작을 주신다.
회개는 그리스도 신자가 되는 핵심 요소이다. 회개 없이는 그리스도교도 없다. "때가 다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 15). 예수님은 회개하라는 부르심으로 당신의 공생활을 시작하신다. 그러나 오늘날 참회는 찾아보기 어려운 귀한 행위가 되었다. "우리 시대의 죄악은 죄의식의 결핍이다" (교황 비오 12세). 사람들은 이것을 바리사이파 증후군이라고 부른다. 즉 나만이 옳고 다른 사람은 모두 틀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회개의 시선을 가르치신다. "어찌하여 너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제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뉸이 잘 보여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지 않겠느냐?"(마태 7, 3-5)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한다. 특히 우리 안에 있는 선과 악의 판별 기관인 양심이 깨어 있어야 한다. 양심에서 일어나는 식별은 빨리 지나가기에 알아채기가 어렵다. 양심이 깨어 있지 못한 이유는 평균적인 수준, 보통 수준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런 말에 귀를 기울인다. "모두가 다 그렇게 해" "요즘 엔 다 그래." 이렇게 말하는 것은 쉽고 편한 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멸망 선고와 같다.


제8규범, 마리아를 사랑하고 공경하기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면서 당신의 어머니를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면서 하신 마지막 일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서있는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먼저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시고 그 제자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 26-27). 여기에서 사랑 받는 제자는 예수의 모든 제자들과 교회를 대표한다.

십자가 밑에서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가 되셨다. 그러므로 마리아 공경은 개인적인 관심사나 개인의 특별한 신앙심이 아니다. 마리아 공경은 신앙의 본질적 요소에 속한다. 마리아는 이유 없이 사도신경 안에 들어 있는 게 아니다. 올바른 마리아 영성은 신앙에 온기와 빛을 더해 주고, 그리스도인이 침체되거나 길을 잃지 않고 살아가도록 도와 준다. 독일의 유명한 문학가 테오도르 폰타네(Theodor Fontane)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성모님의 머무시는 곳에 아름다움과 기쁨도 함께 머문다."

(마리아 121호에서 부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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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성인의 통공 교리를 생활화 한다면 지상에서 행할 수 있는 선행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성인의 통공 안에 있는 가족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께 찬미와 흠숭을,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와 요셉께 사랑을! ) 

( http://예수.kr   ,  http://마리아.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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